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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5화 (15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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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꽤 즐거웠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 낯선 음식. 무엇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유클레스 영지를 빠져나온 이후부터 어머니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디온이 보기에도 어머니는 능숙한 여행자같았다.

이상한 놈들이 시비를 걸어와도 어머니는 한 번도 지지 않고 멋지게 마법으로 맞받아쳤다. 그때 굳은 얼간이들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도 퍽 즐거웠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벅찬 마음에 불편한 잠자리도 괜찮게 느껴졌다.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곤경에 처한 마을 사람들을 구해 준 것을 계기로 모자는 한적한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심 디온은 실망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날 줄 알았는데.

그러나 서운한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디온의 어머니는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었다.

그제야 디온은 어머니의 멋진 마법들이 수명을 바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약했고, 다시는 마법을 쓰면 안 되는 몸이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오직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10살이 되던 해, 디온은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 눈물을 참아야 했다. 그즈음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목소리는 힘을 잃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디온의 손을 끌어 잡으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나는 어렸을 때, 유클레스 영지를 떠나 수도의 아카데미에 입학했단다. 그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지…… 칼만 공작 가의 후계자는 오랫동안 내 가장 절친한 친구였어.”

칼만 공작. 뜬금없는 이름에 디온이 시선을 들었다.

“똑똑하고, 성실하고, 야망 있었지…… 엇나가지 않았다면 분명히 훌륭한 공작이 되었을 거야.”

어머니의 옛 친구는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질 나쁜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막대한 도박 빚을 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당시 칼만 공작이 후계자를 바꿀 것이라는 소문이 수도에도 파다했어. 그러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불렀지. 손에는 반지가 있었어.”

“반지요?”

“그래. 대대로 칼만 공작들에게 전해 오는 반지였지.”

어머니는 아직도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불러서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반지는 아버지가 자는 사이 몰래 빼내어 책에 숨겨 두고, 받았다고 하던가…… 아무튼, 듣는 내내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그래서요?”

“그가 절대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고 악에 받쳐 소리치더구나.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족의 힘을 빌려서라도 가문을 차지하겠다고 했어.”

디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족이라.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개념이었다.

“당시 나는…… 그가 너무 간곡히 부탁해서 거절하지 못했단다. 그의 계획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했지. 가장 온순한 마족을 찾아서, 계약을 제시한다고.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철이 없었는지.”

“…….”

“결국 그와 함께 성국으로 가서 봉인석을 훔치고 다른 보석들로 그 자리를 채워 뒀다. 만약을 위해 3개씩이나. 하지만 봉인석을 들고 다닐 수는 없었어. 봉인석은 그 자체로 마물을 끌어당기니까.”

“…….”

“그와 나는 성국에서 우리만 아는 장소에 봉인석을 잠시 묻어 두고 일단 떠나기로 했다. 성국의 결계가 마물을 막아 줄 것이라고 믿었어.”

성국은 제국의 수도만큼이나 강대한 결계가 보호하고 있다. 알고 있는 내용에 디온은 작게 끄덕였다.

“성녀를 찾아 다시 돌아오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지. 나는 문헌을 통해 성녀의 특징을 몇 개 알고 있었어. 오랜 탐색 끝에 성녀를 찾아내서, 그 피를 받았다.”

“…….”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

디온의 어머니, 레티샤 유클레스는 계속 반지와 병을 보관했다. 수도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협력 차원에서 나갔던 마물 토벌에서.

그녀는 디온의 아버지를 만났다.

“아카데미도 그만두고 그를 따라다녔어. 당시 그는 마물에 대한 깊은 혐오가 있었지. 아마 내게 호감 가진 것도 내가 유클레스 가문의 사람이어서 일 거야.”

유클레스 가문은 성녀와 마족을 토벌한 5개의 가문 중 하나. 가문의 가르침 덕분에 그녀는 보통 사람들보다 마물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레티샤는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마침내 그가 ‘모험가 협회’를 세우고, 결혼식을 올리고…….

둘 사이의 아이가 몇 년도 살기 힘들다는 판정을 받을 때까지.

“나는 마족에게 소원을 빌기로 했다.”

디온의 아버지는 반대했다. 마물을 끔찍이도 싫어하던 그다. 마물을 만든 마족 역시 그에게는 악. 그런 이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맡길 수 없다고.

갈등의 골은 좁혀지지 않았고, 극심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약을 찾아 오겠다고 디온의 아버지가 집을 떠난 직후.

레티샤는 아이와 함께 성국으로 떠나는 길에 올랐다.

수도를 떠나기 위해 지나치는 성문에서 오라버니와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친혈육을 만나니 바로 눈물부터 쏟아지더구나. 오라버니는 그간 내가 겪었던 일을 묵묵히 들어 주었단다. 그때도 그 계획을 마음에 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구나. 내 눈에는 한없이 선량한 오라버니였지.”

마음이 놓인 레티샤는 유클레스 후작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오라버니는 레티샤의 아픔에 동감하며, 그녀를 돕겠다고 했다.

“유클레스와 칼만은 마족을 사냥하던 가문이다. 이 땅에서 그들을 가장 잘 알고 있지. 나와 내 친우는 33명의 마족 중, 계약에 응할 것 같은 마족 3명을 골랐다.”

“…….”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깨운 마족의 이름은 루드리에스.”

레티샤 유클레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육체에, 네 혼을 담았다.”

아들을 붙잡은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널 살리고 싶었어, 디온.”

*

디온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멍한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 몸이 마족의 것이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족의 육체는 사실 마력의 일부가 응집된 결정체로 봐야 한단다. 그 마력들이 모두 약해진 너의 몸으로 들어가서 신체가 전부 재구성되었어.”

그래서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소매를 걷어 살펴본 팔은 깨끗했다. 동화책에 나온 악마처럼 비늘도 없고, 검은빛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했다.

“육체와 혼의 연결은 견고해. 그것을 끊어 혼을 해방시킬 수 있는 마법은 내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지.”

“그, 그럼 그 마족의 혼은……?”

“사라졌다.”

어머니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혼은 육체가 없이 존재할 수 없어. 그냥 소멸하였지.”

“……그 마족은…… 어머니의 소원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

레티샤는 과거를 바라보는 눈으로 말했다.

“그는 따지고 보면 돌연변이였으니까.”

루드리에스. 그는 다른 동족들과 달리 인간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마족이었다. 성녀에게 동료들의 약점을 가르쳐 준 변절자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어머니는 설명했다.

“그는 더이상 동족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고 했어.”

“……아버지는요? 내가 살아 있는 걸 알아요?”

“그래. 바로 성국으로 쫓아왔단다.”

“뭐라고 했어요?”

“……많이, 놀랐지.”

그녀는 그러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로 젖은 갈색 눈동자는 차마 말하기 힘든 과거들을 모두 담고 있었다.

“정말 많이 놀랐어…….”

디온은 더 아버지에 관해 물을 수 없었다. 사실, 그 이후의 이야기를 추측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을 유클레스 영지에서 보냈다. 수도를 들른 것도 이번 여행이 처음. 마주친 이들 중에서도 어머니의 옛 친구는 없었다.

날 보고 싶지 않다고 했겠지.

디온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인 그때, 레티샤가 다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부탁이 있단다, 디온.”

순간 그녀가 다시 건강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눈동자는 단호한 빛을 품고 있었다.

맞잡은 손은 단단했고, 굳은 얼굴은 의지로 가득했다.

“내 오라버니는 남은 2명의 마족을 깨우려 하고 있다.”

“……네? 어떻게…… 성녀를 찾은 건가요?”

“지금은 다른 방법을 쓰고 있어. 하지만 성공하진 못할 거야. 나는 그들에게 비슷한 마법을 알려 줬을 뿐, 결정적인 것은 알려 주지 않았다.”

“왜…… 왜, 알려 주신 거예요?”

“그가…….”

어머니는 뭔가 차오르는 듯 잠시 입을 닫았다. 곧 나온 말은 디온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가 너에 대해, 성국에 말하겠다고 했으니까.”

“……내가 알려지면…… 안 돼요?”

침묵은 곧 긍정이다. 디온은 다시 푹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생 나에 대해서 숨겨야 하는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는, 차마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디온.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디온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더한 말을 하는 어머니가 다소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도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었다. 기억에 깊게 새겨서,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후작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를 지켜보고, 무슨 짓을 하는지 주시해. 그리고 그가 끝내 방법을 찾아내거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반드시, 성녀를 죽여야 한다.”

*

장례식을 치른 후 디온은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머니를 설득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두 번째, 세 번째를 보낸 후에도 소식은 결국 닿지 않았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계속 하나의 질문만 곱씹었다. 왜. 왜. 왜 도대체.

‘내가 살아 있는 게 그렇게나 싫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잖아. 아버지잖아. 그런데 왜.

몇 달 후, 돌연 결심이 섰다.

디온은 옛날의 여행처럼 가볍게 짐을 꾸렸다. 목적지는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이름도 알고, 언젠가 아버지가 주었다던 반지도 챙겼다.

‘만나서 직접 따져야겠어.’

디온은 그 길로 이웃들을 찾아가 수도까지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동안 어머니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기에 그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마차를 가지고 있는 사내가 나섰고, 다시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 대단한 낯짝이 너무 궁금했다. 어떤 목소리를 할지도. 당황할까. 충격받을까. 마족 따위 썩 꺼지라고 소리를 지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이다.

날 닮은 얼굴을 했을 그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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