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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4화 (154/179)
  • @154

    소녀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소멸한 괴물, 그가 남긴 마력에 끌려 달려든 와이번들, 돌풍과 함께 날려 버려진 검은 여자와…….

    디온의 몸을 꿰뚫은 검까지.

    “절대로.”

    소녀는 눈 주위를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꽉 움켜쥔 그녀의 주먹이 하얗게 물들었다.

    “네 생각처럼 되지 않아. 절대로.”

    “너…… 너, 괜찮아?”

    그리고 세이나 로힐이 있었다.

    소녀는 울분이 가득 찬 눈으로 제 옆에 선 그녀를 보았다. 일으켜 주고 싶어 손까지 뻗었지만, 소녀의 험악한 분위기 탓에 닿기를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소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녀의 팔을 콱 붙잡았다.

    세이나가 흠칫했고, 오웬과 라샤드가 그녀의 뒤에 도달했다. 오웬이 이상함을 느낀 그때.

    “미안, 세이나 로힐.”

    소녀가 마력을 불러들였다.

    “다시 돌아가 줘야겠어.”

    “뭐?”

    다음 순간, 소녀와 세이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며, 디온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몸을 뚫고 나올 듯한 마력도, 지독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득히, 더 멀리 현실이 멀어지면서 허공에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마치 깃털처럼.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그를 환영할 리가 없기에, 디온은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모든 의지를 버렸다.

    이내 도착한 곳은 눈에 익은 장소였다.

    “어머니.”

    그의 첫 기억.

    “아버지는 언제 와요?”

    돌이켜 보면 그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붙이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등을 돌려 기침을 쏟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디온은 걱정보단 호기심이 더 가득했다.

    “이번 생일에는 온다고 하셨잖아요.”

    “디온, 아버지는…….”

    어머니는 슬픔 어린 눈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지 못하실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직 화해 못 하신 거예요?”

    아주 오래전에 싸워, 헤어졌다고 들었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그뿐. 더 물어도 어머니가 말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기에 디온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자, 소원 빌어야지?”

    7살.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자 뒤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혈육은 단둘. 그러나 어머니를 따르는 하녀들까지 더하니 식당이 가득 차 버렸다.

    ‘……그래, 아버지 외에도 가족은 많으니까.’

    모자람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넓은 집과 수많은 방. 잘 정리된 정원 가운데에는 분수대도 있었다. 자신의 옷만 정리한 옷 방이 2개. 침대는 너무 넓어서 마음껏 뒹굴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주치는 이들 마다 모두 ‘도련님’이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칭찬하는 말도 많았다. 영특하다. 총명하다. 대개는 외모에 대한 극찬이었다.

    “본관 도련님들은 디온 도련님의 미모에 발끝도 못 미칠 거예요.”

    본관.

    그 가깝고도 먼 곳에, 어머니는 매일 드나들었다.

    어린 디온은 늘 의아했다.

    언젠가 만났던 본관의 ‘안주인’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반미치광이였다. 가구를 하도 부숴 대서 하녀들이 무서워한다던가.

    본관의 머저리…… 아니, 도련님들이 그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울음을 터트리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서 바로 자리를 피했던 경험도 있었다. 밖에 나갈 때도 의식적으로 본관을 피해 다녔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본관에 갈까.

    디온은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따라가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긴 고민 끝에 답했다.

    “……절대로 내게서 떨어지지 말렴.”

    어머니가 향하는 곳은 본관의 정문이 아닌, 뒤쪽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따르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실.

    낡은 문 너머에 있는 금발의 여자를 보자마자 어린 디온은 바로 어머니의 등 뒤로 숨었다.

    일순 유령이라고 착각했다. 지하실은 축축하고 음산하기 짝이 없었고, 여자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도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디온은 그제야 그녀의 옆에 있는 아기 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2살쯤 되었을까.

    기척을 느낀 아기가 하늘빛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짧은 곱슬머리는 옆에 있는 여인처럼 금색이었다.

    “누구예요?”

    용기 내어 뱉은 질문은 곧 여인의 요란한 기침 소리에 묻혀 버렸다. 어머니는 급히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만 더 버텨요.”

    여자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맙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자, 어머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몰래 사람을 고용했어요. 제대로 병을 봐 줄 수 있는 신관이에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불규칙한 발소리를 가장 먼저 알아챈 이는 디온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불길하다는 느낌에 그는 바로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디온? 왜…….”

    “또 여기 있었군!”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키 큰 남자가 지하실에 들어섰다. 디온은 용기를 내어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빠르게 디온을 지나쳐 어머니의 손을 끌어당겼다.

    “레티샤 유클레스!”

    그의 외숙부, 루이반 유클레스 후작은 옛날부터 막무가내인 사내였다.

    *

    어렸던 디온에게 후작은 늘 어렵고 무서운 상대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지하실에 가지 말라고.”

    원체 험악하게 생기기도 했고, 목소리가 거칠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디온과 달리 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딴 곳에 밀어 넣지 말았어야지! 좋은 방에서, 좋은 음식 대접하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넓은 서재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한동안은 괜찮은가 싶더니 또 저런 곳에……. 오라버니 눈으로 직접 확인했잖아! 저 여자는 성녀가 아니야! 의사를 만나야 해!”

    디온은 후작이 기대고 있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들을 주시했다.

    상당한 양. 글자는 거의 없고, 이상한 도형들이 종이마다 빼곡했다.

    “설마, 벌써 실험을 시작……했어?”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손까지 덜덜 떨었다.

    “미쳤어! 이제 겨우 2살이야!”

    “그 정도면 충분해.”

    그러고 후작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디온은 너무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때도 2살이었지.”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섬뜩한 눈빛이었다. 어머니가 뒤로 숨겨 주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때까지 보아 온 것 중 가장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작은 그녀에게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날 돕기로 했잖아, 레티샤.”

    그때, 다시 어머니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내 뜻에 동의해서, 함께하기로 했잖아. 왜 이제 와서 내 실험을 막으려고 하는 거지?”

    가녀린 손이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긴 침묵 후, 어머니가 나지막이 뱉었다.

    “……알겠어.”

    “이건 세계를 위해서다. 작은 희생은 감수해야 해.”

    어머니가 끄덕이자 후작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험악한 분위기가 좀 풀리고,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내 어머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가 뭔가를 후회하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결심한 것도.

    “디온.”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부드럽게 디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을 깨웠다.

    긴 설명이 있었으나 잠결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한 대답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그때부터 도주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후작에게서 벗어나 그가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디온은 절대로 다른 이에게 발설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당부를 지켰다.

    무섭거나 싫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으니까.

    후작이 싫은 이유도 있었다. 그는 못생겼고, 소리를 빽빽 잘 지르고, 어머니를 자주 울게 했다.

    그 금발의 여자를 가둬 두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실험’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쁜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디온은 떠날 각오를 다졌다. 후작만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옷장을 하나만 가져도 괜찮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찾아온 결행일.

    하녀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디온은 바로 쪼르르 어머니의 방으로 달려갔다.

    본관에서 큰 연회가 열리는 날. 낯선 손님을 실은 낯선 마차들이 끊임없이 마당으로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인 듯했다. 별관을 빠져나오는 것도 순조로웠다. 그러나 조심스레 내려간 지하실은…….

    누구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아기도, 여자도 없었다.

    디온은 황망함 가득한 눈으로 굳어 있는 어머니 옆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제가 몰래 가서 보고 올게요.”

    “안 돼!”

    어머니는 그러고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실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오늘밖에 기회가 없어. 오늘이 지나면 너를…….”

    어머니는 당장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젖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시 후.

    “우리끼리라도 가야 해.”

    그녀가 디온의 배낭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다른 쪽 손으로는 아들을 꽉 붙잡은 채, 어머니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디온.”

    디온은 끌려가면서도 텅 빈 침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딱 한 번 본 것일 뿐인데도 그녀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자신보다 더 마음에 걸렸으리라.

    “가자.”

    디온은 그렇게 하늘빛 눈동자가 예쁜 아기를 기억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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