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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53화 (153/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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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오래지 않아 목소리가 들렸다.

    “디온!”

    자신을 흔드는 낯선 손길에 디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힘들게 눈꺼풀을 여니 흐릿한 세상 안에,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세이나?’

    흐릿하게 깜빡이던 의식이 단번에 일깨워졌다. 하지만 곧바로 마주친 여자는 그녀와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라미아.”

    “너…… 너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디온은 이마에 제 손을 얹은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 리가 없지.’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그녀를 외면했다. 아마 조금이라도 남은 정마저 모두 떨어졌을 것이다.

    뭘 기대한 건지.

    느리게 다시 눈을 뜬 디온은 헛웃음을 흘렸다. 키에에에엑! 와이번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잘됐군.”

    “뭐?”

    라미아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느닷없이 돌풍이 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는 힘없이 바람에 밀려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하늘에서 그녀를 반긴 것은 굶주린 와이번 떼였다.

    “꺄아아아악!”

    그 찢어진 동공들을 마주하자마자 라미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가 마구잡이로 불러일으킨 마력이 칼날이 되어 와이번들에게로 날아갔다.

    “꺄악! 꺄아악!”

    “키에에엑!”

    마물과 마물이 자아내는 하모니를 들으며 디온은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똑같은 존재면서 뭘 저렇게나 치를 떨고 싫어하는지. 비명만 두고 보면 정말 마물 틈에 내버려진 가녀린 여인 같았다.

    결국 그 마물들을 썰어 버린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긴 했지만.

    “이게 무슨 짓이야?!”

    나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라미아가 지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흘깃 본 디온은 신음을 흘렸다.

    “어차피 금방 낫잖아.”

    “그래도 아파! 아프다고!”

    “시, 끄러워…….”

    그리고 바로, 그의 다리가 무너졌다.

    라미아는 허겁지겁 달려와 그를 붙잡았다. 거의 끌어안는 것 같은 부축이었다. 디온은 그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벌써 세 번째.

    이제 의식을 잃으면 네 번째다. 디온은 그 뒤에 자신이 온전한 상태로 눈을 뜰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괴물처럼 될지도 모르겠지.’

    그가 아는 한, 마족의 마력을 받아들인 인간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자신을 예외로 두기도 어려웠다.

    지금도 온몸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디온은 라미아의 팔을 꽉 붙잡았다.

    “스키아를 찾아 줘.”

    “뭐?”

    “분명히 멀지 않은 곳에…….”

    다시 시야가 흐려졌고, 디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계획을 위해서라도, 또한 자신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 라미아라는 마물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그나마 신이 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디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신은 그가 계획한 결말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차, 차, 찾아서 어떻게 하려고?”

    “죽여야지.”

    라미아의 몸이 크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엘렌과 함께.”

    스키아의 원래 몸은 아직 봉인석에 갇혀 있었다. 지금 그녀가 현신한 몸은 엘렌의 것. 그저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 혼의 무게가 남다른지, 도저히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디온의 힘이 약해진 탓도 있었다.

    정면 싸움으로 승산이 없다면 틈을 노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너보고 죽여 달라고 하진 않아.”

    “그 몸으론 무리야!”

    라미아는 경악에 차 소리쳤다.

    “그, 그러다 너도 같이…….”

    “알아.”

    그녀를 붙잡은 손에 실린 힘이 강해졌다.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감각을 견디며 디온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

    “너…….”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이대로 라미아가 스키아를 찾아낸다고 해도 디온은 아마 목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점점 더 의식을 붙잡기 힘들었다. 제 몸의 마력이 살갗을 뚫고 폭발할 것만 같다. 그래도, 디온은 스키아를 찾아가야 했다.

    그 앞에서 폭주하면 적어도 함께 죽을 수 있을 테니까.

    “알고…… 있어.”

    마족의 힘을 받아들인 인간은 끝이 좋지 않다. 디온은 이미 그 끝을 각오한 지 오래였다.

    “빨리…… 가야 해.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오직 그 생각만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집중했다. 숨을 쉴 때마다 수십 개의 바늘이 뱃속에서 찔러 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어섰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스키아는 마물을 불러들이는 특성이 있으니 쓰러진 몸 근처에 작은 마물들이 모여들어 있을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마력으로 와이번을 강제로 붙들어 올라타고, 찾아내고, 죽인다.

    그의 머릿속에 빠르게 몇 가지 경우가 스쳤다. 그리고 라미아에게서 멀어지려던 그때.

    돌연, 또 다른 통증이 느껴졌다.

    디온은 멍한 눈으로 제 복부를 뚫고 튀어나온 검을 내려다보았다. 낯익은 문양, 익숙한 손잡이.

    조금 전 그가 신경질적으로 던진 바로 그 검날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반밖에 남지 않은 칼날은 그 주인의 예상보다 훨씬 예리하고.

    “너…….”

    아팠다.

    디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가슴을 적시고 이내 검을 쥔 라미아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작게 탄식을 흘린 디온의 배 속으로 라미아가 힘껏 검을 더 밀어 넣었다.

    “윽……!”

    다시 그의 머리가 라미아의 어깨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덕분에, 디온에게 그녀의 속삭임이 똑똑히 들렸다.

    “미안해.”

    라미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디온이 팔을 뻗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의 큰 손이 제 얼굴 위에 포개어진 뒤에도 라미아는 검을 놓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 미안해.”

    날뛰는 마력을 억지로 붙잡으며, 디온은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를 꽉 쥐고,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라미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녀는 재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 말만을 반복했다.

    제 손아귀에서 나온 검은 불꽃을 거두어들이며, 디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친 바람과 함께 라미아의 기억이 그에게로 흘러들어 왔다.

    - 그 남자가 날 배신하거든, 네가 죽여.

    소설 속 삽화처럼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도 후작이 잡혀가기 직전. 그의 저택 어딘가로 추정되는 방 안에서 라미아는 스키아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 무, 무, 무슨…… 제, 제가 어떻게 루드를…….

    - 내 힘을 빌려줄게.

    마물에게 마족은 부모와도 같다.

    마족이 가진 힘을 공유받는 것도 가능하며, 그 힘으로 마물을 성장시킬 수도 있다. 또한 마물은 마족의 명령을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라미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 전 못 해요.

    라미아는 바로 저택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마력을 부르기도 전에 스키아의 괴물에 목이 붙들려 버리고 말았다.

    괴물은 라미아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바로 그 순간.

    - 그럼 어쩔 수 없네.

    스키아와 눈이 마주쳤다.

    ‘세뇌.’

    그 푸른 불꽃 같은 눈동자의 기억을 떨치며, 디온은 손을 거두었다. 지탱할 것이 완전히 사라진 그의 몸이 쓰러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없이 쓰러졌으나, 이상하게도 아프진 않았다. 정확히는 배의 통증이 너무 강렬하여 다른 고통이 잊힌 것과 다름없었다.

    “읽혔……군.”

    흠잡을 곳 없는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꿰뚫려 버리고 말았다. 스키아는 그의 계획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 지금…… 어디 있지?’

    어쩌면 지금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배신을 예상했다면, 모든 힘을 끌어다 마물을 불렀을 리도 없다. 그럼 왜 직접 마무리하러 오지 않는 걸까.

    ‘성녀를, 찾으러 갔나.’

    역시 끝까지 그 여자의 곁을 지키는 쪽이 맞았다.

    버텼어야 했는데. 그 괴물에게 세 사람 모두 당해 버릴까 봐 걱정되어 직접 온 것이 패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무사히 도망치는 것을 직접 확인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디온은 땅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울컥 차오른 피가 그의 입술을 적시고 대지를 물들였다.

    ‘말, 해 줘야 하는데…….’

    그러나 고작 한 걸음.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넘어졌다.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불규칙하고, 시끄럽다.

    “하…….”

    문득 또, 그녀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기억나는 것은 화난 얼굴. 역시 그 복도였다.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황성의 복도와 대비되어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더욱 어둡게 보였다. 강렬한 금색 눈동자 속에 분노가 넘실거렸다.

    디온은 그때도 웃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척.

    -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네요. 세이나는.

    자신에게 남을 약 올리는 재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의 뒤를 지키는 두 남자가 부러워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세이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 나는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이들만 걱정해.

    “하…….”

    - 이제 당신을 걱정할 일은 절대로 없어.

    눈앞이 아득해지고,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멀어졌다. 고통마저 사라진 정적 속에서 디온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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