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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48화 (148/179)
  • @148

    제법 먼 거리지만 어쩐지 그의 이름부터 떠올랐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마치 환영을 본 기분이었다.

    ‘뭐지?’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신기한 은색 머리칼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보았던 사람들뿐.

    ‘내가 잘못 봤나?’

    새벽을 앞둔 시각. 성문 근처에 선 경비병들이 연거푸 하품해 댔다. 지위가 꽤 있어 보이는 기사들은 종이를 들고 짐마차들을 점검했다.

    제 차례를 기다리는 상인들은 화톳불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껏 늘어져 잠잠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쪽은 확인됐고…….”

    오웬과 대화를 나누던 경비병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세이나는 입을 꾹 닫은 채 라샤드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없어.’

    왜 아쉬움이 먼저 드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의 등장은 절대로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만났다면 도주 계획이 탄로 났다는 뜻인데…….

    ‘잠깐, 정말 없는 것 맞아?’

    디온은 이제 적이다. 그 사실을 되새긴 세이나가 다시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일단, 성벽으로 향하는 계단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의 담소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경비병도 계속 그녀의 통행 확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꼼꼼한 건지, 아니면 눈이 침침해서인지 모르겠으나 경비병은 읽는 속도가 꽤 더딘 편이었다. 그의 눈이 더 가늘어지고, 허리도 앞으로 굽었다.

    ‘혹시 뭐가 잘못되었나?’

    세이나가 문득 불안해진 그 순간.

    “좋아요, 통과…….”

    갑자기 경비병의 몸의 앞으로 쏠렸다.

    바로 다음, 휘익! 매서운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일었다.

    경비병은 영문도 모른 채 바닥을 굴러야 했다. “윽!” 하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과 함께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어느새 세이나의 바로 뒤에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거센 힘으로 그를 잡아당겨 던져 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짓……!”

    터져 나온 불만은 채 마무리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경비병의 눈이 점점 커지고, 그의 턱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앞.

    그가 서 있던 자리엔 어느새 낡은 도끼가 하나 꽂혀 있었다.

    손잡이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어둠 속에서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드러났다. 붉은 횃불 아래 선 도끼의 주인은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넝마 같은 옷. 텅 비어 어둠이 자리한 두 눈.

    관을 뚫고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살점 하나 없는 턱뼈가 움직이며 빠드득 소리를 냈다. 다시 그것의 고개가 기울었고.

    “마…….”

    경비병은 도끼를 회수하는 해골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 마물이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눈이 닿는 모든 땅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꺄아악!”

    복잡한 낙서처럼 시작된 실금은 눈 깜짝할 새 크게 갈라졌고, 그 사이로 뼈만 남은 손들이 불쑥 솟아났다.

    마치 지옥의 문을 열고 망자들이 돌아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곧이어 새하얀 두개골이 드러나자 누군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스켈레톤이다!”

    저주로 인해 탄생했다던 마물이 땅을 파헤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뼈만 남은 몸. 손에는 모두 제각각의 무기를 들고 있다.

    한눈에 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수였다.

    “도망쳐!”

    “모두 무기를 들어라!”

    광분과 혼란 속에서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 경비병들이 검을 빼 들었다.

    땅을 굴렀던 어떤 경비병도 허둥지둥 제 허리춤의 검을 꺼냈다. 겨우 몸을 바로 세우자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라는 말 못 들었어!? 어서 가!”

    세이나는 그 소리를 듣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신을 잃거나 너무 놀라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금빛 눈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기를 고쳐 쥐는 해골 떼들 사이에 홀연히 나타난 그 남자를.

    “디온.”

    디온 프라벨은 이 지경 속에서도 몹시 평온해 보였다.

    밤 산책을 즐기러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가벼운 복장, 반쯤 감긴 눈은 나른한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것은 검이었다. 횃불에 비친 칼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설마 네가 벌인…….”

    별안간 매서운 바람이 일었다.

    세이나는 급히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거센 흐름에 실린 모래가 후두둑 그녀의 온몸으로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당해 낼 재간이 없었는지, 해골들마저 비틀댔다.

    겨우 눈을 뜨자 계단 위에 새로운 형체가 보였다.

    3m는 훌쩍 넘는 크기. 양어깨에는 괴상한 팔들이 붙어 있다. 가장 뒤에 있는 것은 박쥐 같은 날개였다.

    ‘마족을 지키던 괴물!’

    그리고 갑자기 도끼가 파고들었다.

    세이나는 구르듯 뒤로 몸을 피했다. 아슬아슬한 간격. 조금만 늦었으면 낡은 도끼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두 번이나 목표를 놓친 해골은 지치지 않고 다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세이나도 물러서지 않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앞으로 달려든 것과 동시에, 스켈레톤들이 무서운 기세로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이나!”

    성문 앞이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기를 든 모든 이들과 마물 사이에 사투가 벌어졌다. 병기들이 부딪치며 낸 날카로운 소리가 긴장된 대기로 울려 퍼졌다.

    자신을 공격한 스켈레톤을 처리한 세이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곧이어 다음 공격. 그녀는 어느새 마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 번째 해골을 해치우자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오웬은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가야 해.”

    “네? 하지만…….”

    “이 많은 마물들을 보고도 모르겠어? 스키아의 짓이야! 네 발목을 잡을 셈이라고!”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마물들은 공격을 쉬지 않았다.

    오웬은 검을 휘둘러 저에게 달려든 해골을 단숨에 해치웠다. 쓰러지는 그것 너머로 멀리, 고군분투하고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세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때문에, 관계없는 이들이 다치고 있었다.

    마물에 대한 두려움보다 죄책감 때문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다시금 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 독이 통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경비병들의 진영이 흩어졌다. 해골들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 한 병사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세이나는 물론, 그녀를 잡아끌던 오웬도 멈칫한 순간이었다. 낡은 도끼가 그의 목을 향해 쇄도했고.

    이어서 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쉭!

    붉은 검기가 허공에 남긴 잔영을 따라 우수수 해골들이 무너졌다. 세이나는 경비병과 해골 사이에 나타난 라샤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서 가!”

    세이나가 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돌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라샤드에게 달려들었다.

    신비로운 은색 머리칼이 휘날리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맞댄 검 사이로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라샤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디온……!”

    동시에, 세이나와 오웬의 앞에도 누군가 나타났다.

    커다란 날개를 접으며 하얀 얼굴이 양쪽으로 흔들렸다. 며칠 전, 마족으로 변화한 엘렌과 함께 사라진 바로 그 괴물이 물었다.

    “까득, 까드득?”

    다시 들어도 이상한 소리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 * *

    라샤드는 좀처럼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처음 검이 부딪혔을 때부터 계속 그러했다.

    그 싸늘한 푸른 눈을, 감정 하나 없는 메마른 얼굴을 보자마자 지난 기억이 밀려왔다. 곧바로 쏟아진 두 번째 공격은 살기가 실려 있었다.

    챙! 검과 검이 스쳤고, 다시금 라샤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디온의 검에는 검기가 전혀 없었다. 마족이니 그렇겠지, 라샤드는 허망함 속에서 깨달았다.

    디온 프라벨은 마족이다.

    그 사실은 라샤드에게도 큰 실망감을 선사했다. 비록 티는 내지 않았지만 세이나 만큼이나 그도 좌절한 순간이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집에서 식사하고, 책을 읽고, 으르렁대며 여러 날을 보냈다. 마주 보면 열을 올리는 순간이 더 많았지만.

    언젠가 나간 밤 산책은 그의 일생에서 손에 꼽을 즐거운 날이었다.

    부하와 상관의 명령이 아닌,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했다. 친구가 있으면 이런 느낌이겠지…….

    그리 생각했는데.

    “왜!”

    라샤드는 포효하듯 소리쳤다.

    “대체 왜!”

    물러선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의 분노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가운 눈이었다.

    “왜 배신했지?”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다.

    세이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후작의 사람이니까. 마족이니까. 집에도 목적이 있어 찾아온 것이라고.

    머리로는 라샤드도 이해했다. 디온 프라벨이 세이나를 협회로 불렀다는 것을 알았을 땐 확신도 들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 이성적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진심이나, 마음, 그딴 것을 찾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항상 객관적으로,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어른들은 그를 가르쳤다.

    하지만.

    “정말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나?”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라샤드는 그제야 그의 이마에 주변의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양 서 있지만 라샤드의 검을 받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이 라샤드로 하여금 더욱 울화를 끓어오르게 했다. 힘든 상대인 것을 알면서도 감수할 만큼이나.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웃은 적은 없었나?”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계획이었다면 그땐 왜…….”

    “예전부터 느꼈는데.”

    줄곧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후우, 가볍게 숨을 몰아쉰 디온은 제 턱을 훔쳤다. 다시 시선이 마주쳤고 그가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공작님은 이미지에 비해서 말이 너무 많아요.”

    기억과 똑같은 밉살스러운 미소였다.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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