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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47화 (14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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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샤드는 말린 종이를 건넸다.

    “이걸 사용하도록 해.”

    살펴보니 낯선 이름과 어려운 설명들, 마지막엔 또 다른 낯선 이름의 인장이 있었다.

    “공작가의 인장은 의심받을지도 몰라서 다른 이에게 부탁했다. 꼼꼼하게 작업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세이나는 짧게 끄덕인 후 종이를 바로 품 안으로 넣었다. 이제부터 그녀의 것이 될 새로운 신분. 받아들이는 표정은 어두웠다.

    오웬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젠장,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몇 시간 전.

    대신관들의 회의를 엿들은 후 오웬은 바로 세이나를 데리고 신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그 신전은 옛날부터 스승님을 따라 제집처럼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제는 신관들이 쓰지 않는 폐쇄된 구역도, 친한 신관이 알려 준 비밀 통로도 그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전에서 나오자마자 가끔 은신처로 쓰던 낡은 집으로 숨어들었다. 사정을 적은 종이를 접어, 지나가는 아이를 붙잡아 칼만 공작저로 보냈다.

    라샤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신처를 찾아왔다. 위장 신분. 잘 관리된 말 2마리. 그리고 몹시 침울한 표정과 함께.

    급작스러운 전언이었으나 부족한 준비는 아니었다.

    문제는 세이나였다.

    세이나는 그를 따르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딴 말 듣지 말라고, 무시하라고 해주고 싶었으나 그녀에게 섣불리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세이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계속 그녀를 지켜보고, 함께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닥치든 늘 괜찮다며 떨치고 웃는 그녀니까.

    디온 프라벨. 그 개자식의 배신을 알고 난 후에도 세이나는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 미소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위로? 격려? 무엇도 통하지 않을 테다. 대신관들은 결국 그녀를 죽이기로 다짐했다. 속이고, 숨겨서, 기어코 독약을 먹이기로.

    대의를 위해서.

    ‘빌어먹을.’

    이를 악물던 그때, 문득 옛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벌써 며칠 전이나 된 우연히 당도한 꿈속에서.

    거대한 물체가 세이나를 향해 달려들던 바로 그 순간이.

    돌로 만들어진 전설 속의 마물 같았다.

    멀리 서 있어도 그 거대함이 한눈에 보였다. 생애 한 번도 마주쳐 본 적 없는 커다란 물체는 놀라운 속도로 세이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바로 꿈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눈을 뜬 후에도 오웬은 그때의 충격을 쉽게 떨치기 힘들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오싹한 한기가 일었다. 한겨울 찬물 속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먼저 저에게 손을 뻗어 깨우지 않았다면 꽤 오랫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오웬은 그 어마어마한 물체의 정체를 묻지 못했다.

    세이나는 그 꿈이 자신의 전생을 반영한 곳이라고 했다.

    낯선 공간은 자신이 일하던 직장, 고양이는 이전에 보았던 마물. 그렇다면 그 사고는.

    ……그것 역시 그녀가 겪었던 일일까.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는 중에도 종종 그것이 세이나에게 달려들던 장면이 아른거렸다. 넋을 놓고 주저앉은 자신 역시.

    어떤 날은 너무 선명해서 심장이 내려앉는 듯하다가도 이내 살아 있는 그녀를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더 도와주게 되었다. 그녀가 걱정되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곁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웃으며 살았으면 했다.

    그리고 세이나가 협회에서 붙잡혀 갔던 날.

    떠나는 그녀의 등 뒤로 오웬은 그 끔찍한 꿈을 다시금 겹쳐 보았다. 곧이어 닥친 무력감은 꿈속보다 더 뼈저리게 아팠다.

    칼만 공작을 도와 그녀를 구하려고 했지만, 계속 고개를 드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아냈으나…….

    오웬은 그늘 속에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이든 대신관, 그 자마저 배신할 줄은.

    “세이나.”

    “……아.”

    긴 침묵 끝에 라샤드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동시에, 오웬도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세이나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듯한 눈이었다. 여전히 기운 없는 안색으로,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공작님. 부탁이 있어요.”

    “그래.”

    “우리 집…….”

    오웬은 점점 더 그녀를 볼 낯이 없어졌다.

    안심해도 된다고, 그렇게나 호언장담했는데 결국 도망자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하이든 대신관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부터 찾아왔다.

    오늘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상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제가 없어지면, 우리 집을 가져도 된다고 했었죠.”

    “……그랬지.”

    “집을 지켜 주세요. 부탁해요.”

    세이나는 줄곧 눈물을 꾹 참고 있는 듯했다. 더는 보기 힘들어 오웬이 시선을 내린 그때, 세이나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제야 오웬은 지난 몇 시간 동안 자신이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이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거니까요. 그렇죠?”

    * * *

    세이나는 놀란 눈이 된 오웬을 보고 생각했다.

    ‘탓하지 않아. 절대.’

    자책감과는 일가견이 있는 그녀다. 지금까지 오웬이 왜 침묵을 지켰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보였다.

    두 남자는 진심으로 자신을 구하고자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세이나는 지난 일을 더 따지고 싶지 않았다.

    “계약서 기억하시죠? 동물은 안 돼요.”

    “명심하지.”

    세이나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지자 라샤드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세이나는 주도적으로 지도를 펼쳐 도주 경로를 탐색했다.

    “일단 제국을 벗어나야겠죠? 방향은 어디로 할까요?”

    “서쪽.”

    멀찍이 물러나 있던 오웬이 그제야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지도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고향으로 가자. 거기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서 숨기 좋을 거야.”

    오웬은 그러고 속삭이듯 말했다.

    “번쩍번쩍 눈이 아플 테니까 각오해.”

    “와, 벌써 기대 되네.”

    “……역시 나도 함께 가야겠어.”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풀린 것도 잠시. 곧 라샤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네? 공작님은 수도에서 후작을 감시해야죠.”

    “그래도…….”

    갑자기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도 갈래. 안 됩니다. 나도 갈 거야. 안 됩니다. 근엄한 공작님은 어디로 갔는지, 칭얼거리는 소년이 등장했다.

    그리고 오웬은 단호하게 모든 요청을 잘랐다. 드물게도 그가 연장자답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유치한 말다툼이 예전에 다 함께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세이나는 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성문까지만이라도 같이 가지.”

    라샤드는 그곳까지 가는 동안에도 내내 입을 쉬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이름을 바꿔라. 절대로 떨어져 행동하지 마라. 관리들은 되도록 피해 다녀라.

    새겨들을 만한 조언에 오웬과 세이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도움말들은 세세한 것들로까지 뻗어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말 걸어오면 조심하고.”

    “…….”

    “무료로 준다고 해도 혹해선 안 돼.”

    “…….”

    “문단속도 잘하고.”

    세이나는 웃어야 할지, 이것마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계속 걸어 나갔다.

    염려해서 하는 말인 건 알겠는데…… 점점 긴장감이 빠지기 시작했다. 오웬은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네, 네, 엄마. 꼭 그럴게요.”

    “흘려듣지 마! 잠깐의 방심이 큰 사고로 직결된다.”

    “엄마도 이불 꼭 덮고 주무세요. 감기 걸려요.”

    “잠시라도 경계를 늦추면 안 돼. 그리고 난 이불은 잘 덮고 자는 편이다.”

    놀려줄 구석이 잔뜩 있는 대답이었지만, 세이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성문으로 향하는 길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신전에서의 일이 점점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만약 내가 대신관이라면…….’

    세이나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신전에서부터 은신처까지. 라샤드를 기다리는 내내 고심했지만 아직까지도.

    하이든 대신관의 방법은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이다.

    평생을 신에게 헌신하고 그의 뜻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면. 그리고 세월이 저물어 가는 지금, 성력도 희미해진 상태에서.

    마족이 부활을 위해 성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역지사지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를 마음껏 비난하기 어려웠기에,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들을 마주한다 해도, 시원하게 반박할 자신조차 없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말 밖에는.

    “세이나?”

    라샤드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회상을 끝낸 세이나의 시야에 걱정스러워하는 두 남자가 들어왔다.

    “왜 그래?”

    세이나는 바로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그들은 하이든의 선택 따위, 조금도 고려치 않는 듯했다. 세이나는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도 앞으로는 이불을 꼭 덮고 잘게요.”

    “음, 중요하지.”

    “엄마는 잔소리쟁이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수다에도 이윽고 끝이 찾아왔다.

    성문 앞에는 밤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짐마차를 끌고 온 상인들이 대부분.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듯한 헌터들도 몇 보였다.

    모두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이었다.

    깊은 밤. 그것도 겨울. 이 시간에 수도를 빠져나가는 이들은 세이나와 오웬밖에 없었다.

    “신전에서 온 사람은 없는 것 같군.”

    “그래도 오가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눈에 띄겠는데요. 새벽에 갈까요?”

    “아니, 더 늦으면 성문이 봉쇄될지도 몰라.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합니다.”

    오웬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자르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대충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마무리했다.

    세이나도 오웬을 따랐다.

    “나중에 봐요. 공작님. 몸조심하세요.”

    그를 뒤로하는 발걸음이 무거웠으나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오웬의 지적처럼 언제 신전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성문의 경비병은 예상대로 의아해했다.

    이 시각에 왜 나가냐는 질문에 오웬은 윗분이 시켜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하여튼 귀족 놈들은 아랫사람 생각은 전혀 없지.”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너희도 고생이 많네.”

    그때, 주변을 살피던 세이나의 시선 끝에 어떤 인영이 스쳤다.

    성벽으로 이어진 돌계단 위.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큰 키에 짧은 머리칼. 너무 그늘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입술은 어느새 반사적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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