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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약 올리려고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디온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터너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보면 훼방을 놓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하지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만날 때마다 먼저 웃으며 다가가긴 하지만, 터너는 저 남자에게서 조금의 친근감도 느끼지 못했으니. 그보다는…….
‘거부감에 가깝겠지.’
그의 태도나, 표정, 혹은 말투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기본적인…… 아니, 본능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터너는 한 번도 저 남자가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물은 마시는지 모르겠다. 잠은? 가끔 보면 눈도 잘 안 깜빡이는 것 같다. 화를 내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잘 웃지만 진심 같지도 않았다. 마치 가면을 쓴 듯. 누구를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워낙 비현실적인 외모여서일까.
터너의 눈에 저 남자는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모방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근본적인 위화감이, 그를 볼 때마다 항상 느껴졌다.
‘마족.’
책에서나 접하던 바로 그 존재들은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함께 있는 이 순간조차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네가 스키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조금 뒤, 후작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 라?”
아니나 다를까. 시야 끝에 걸린 후작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뼈아픈 실패에 이어 빈정거림까지. 오늘은 후작에게 혹독한 날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후작은 터너의 예상보다 빠르게 침착을 되찾았다. 조금 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키아는 마지막까지 네 명령을 어겼으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각성했다면 스키아가 아닌, 다른 마족을 선택했겠지.”
“…….”
“하지만 마족의 부활을 먼저 제안한 건 너였다.”
방 안의 분위기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터너는 자신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디온 프라벨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눈빛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후작은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네 발로, 스스로 날 찾아와서 말하지 않았나. 거래? 허, 아니지. 이건 협력이다.”
아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끼어드는 것조차 어려웠다. 터너는 속으로만 열심히 동의했다. 그래! 그랬잖아! 이 건방진 자식아!
“아니면 이제 와 ‘디온 프라벨’로 살고 싶어졌나? 우습군. 그런 취급을 당했으면서.”
후작은 기가 찬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이름을 스스로 버린 건 너였다. 네 아비도, 형제도 너를 피하고 헐뜯기에 바빴지. 너를 흠모하는 인간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글쎄. 과연 네 정체를 알고도 계속 그럴까.”
“…….”
“네가 언제든 사람을 세뇌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난 이후에도?”
터너는 갑자기 서늘함을 느끼며 제 팔을 쓸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남자의 능력을 알게 된 뒤부터 어찌나 꺼림칙하던지. 이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그걸 알고 있어서, 동족을 바란 게 아닌가. 너와 같은 눈, 같은 피, 같은 생각을 하면서…….”
후작은 어느새 그 남자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잠시 가라앉은 정적 사이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열기가 후작의 눈매 속에서 살벌하게 빛났다.
“너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를.”
디온의 대답은 그러고도 한참 후에 흘러나왔다.
“……뭘 원하지?”
“성녀를 데려와.”
후작이 뒤로 물러섰다. 종이가 어지럽혀진 책상 앞에 멈춰 선 그는 곧이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힘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지. 인간도, 마족도 다르지 않아. 그 여자만 있으면 바로 회복할 수 있어.”
“…….”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당장 내 앞에 끌고 와.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조만간 황제가 나를 잡아가겠지. 그 틈에 그 여자는 수도에서 도망칠…….”
“내가 움직일 수 없다고 했던가?”
돌연 난입한 낯선 목소리에 터너는 고개를 돌렸다.
서재의 입구, 디온 프라벨이 걸어온 바로 그 길목에 은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를 알아본 순간 터너는 긴장된 상황도 잊고 일순 넋을 놓아 버렸다.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는 미모였다.
그녀의 정체를 알면서도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씩 웃어 보였다.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터너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반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후작의 음성은 건조하기만 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그 여자, 충실한 개가 셋이나 있더군.”
여인은 그러고 천천히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그저 걸어가는 것뿐인데도, 마치 춤을 추는 듯 유려하게 보여 터너는 그녀의 발치만 빤히 보았다.
마침내 멈춘 곳은 소파였다. 디온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녀가 긴 다리를 꼬았다.
“한 번 더 소동을 벌여야 해. 마물로 그들의 발을 묶고 그 틈에 성녀를 붙잡아 오는 거지.”
“가능한가? 회복은…….”
“그 정도는 괜찮아.”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는 자신이 성녀인 것도 모르는 눈치였어. 이후 계속 감옥에 있었으니 마족을 봉인할 만큼 능력을 각성했을 리도 없고. 데려올 수 있지?”
마지막 질문은 옆의 남자를 향한 것이었다.
디온은 그녀가 온 후에도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 따위 조금도 모른다는 것 같은 철저한 외면이었다. 대답도 없었다.
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터너가 눈치를 살필 무렵 여자의 몸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
디온은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의 손길을 매섭게 쳐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준비해.”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여인을 보지 않았다.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내디디며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바람과도 같은 퇴장이었다. 그가 지나친 복도를 바라보던 터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야기가 잘됐군요.”
“그렇게 들려?”
그쪽에서 답이 올 줄은 몰랐는데. 터너는 여자에게 말을 붙여도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아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엄격한 표정의 그는 터너처럼 복도만 지켜볼 뿐,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터너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 하지만 방금 돕겠다고 한 것 아닙니까?”
“우리 형제께서는 예전부터 겉과 속이 달랐거든. 귀엽지?”
여자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역시 숨을 멎게 할 만큼이나 아름다웠기에 터너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바꿔 버리곤 하지.”
그녀의 시선이 디온이 떠난 방향으로 향했다. 그 순간, 뜻밖에도 터너는 여자의 얼굴에서 복잡한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전조조차 없어.”
그러나 아주 잠시. 여자는 곧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후작이 말했듯 날 싫어하기도 하고.”
‘뭐라고 했는지 다 들었단 거야?’
작은 설렘이 없어지고, 다시 오싹함이 찾아왔다. 마족은 미친 청력을 소유한 게 확실했다.
이 저택 어딜 가도 편하게 있기는 글렀다.
“그래도…… 누, 누구보다 동족을 바라지 않습니까. 그 여자의 피가 없으면 마족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렇긴 하지.”
여자가 작게 끄덕이며 제 턱을 쓸었다. 겹쳐진 한쪽 다리가 까딱까딱. 깊은 고민을 마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흠, 안전장치를 하나 둬 볼까.”
* * *
예배당에서 빠져나온 후에는 바로 대신전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린 세이나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당에서 대신전으로 향하는 길 포석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50명은 훌쩍 넘는 수. 남자와 여자, 노인부터 아이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모두 신관복이다.
대신전의 신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성녀님.”
‘오우, 엄청 부담스러운걸.’
말로만 듣던 귀빈 대접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이 정도의 엄청난 환대는 처음이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고 눈만 끔뻑이게 된다.
세이나는 대신관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를 보며 마주 꾸벅거리려는데, 오웬이 뒤에서 등을 쿡 찔렀다.
라샤드가 작게 속삭였다.
“안 그래도 돼.”
‘아, 그런가.’
그제야 사람들 사이를 그냥 지나가던 귀족의 행차가 떠올랐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도 살짝 드는 모습도 기억났지만 거기까지 따라 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냥 놀랍기만 했다.
본관에 도착하자마자 또래로 보이는 여자 2명이 또 정중하게 인사했다.
“앞으로 성녀님의 시중을 들 아이들입니다.”
“시중이요?”
“앞으로 신전에 계실 테니까요.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니 곁에 두셔도 괜찮으실 겁니다.”
“자, 잠깐만요!”
의아해하는 신전 사람들을 뒤로하고, 세이나는 바로 라샤드와 오웬에게 속삭였다.
“나 계속 신전에 있어야 해요?”
“음, 나는 그거까지 요청한 적은 없어.”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 나는 신전에 있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래도 좀 갑작스러운데.”
쉽게 발을 옮기기 어려웠다. 헌터 일을 하면서 신관들과 몇 번 마찰이 있기도 했고, 지나치게 규칙이 많아서 생활하기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신전은 예전부터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장소였다. 이유는…… 사실 딱히 없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것도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세이나는 잠시 고민 후 뒤를 돌았다.
“저, 대신관님. 들어가기 전에 집에 다녀와도 될까요?”
“안 됩니다.”
“옷도 가져와야 하고. 며칠 전 소동으로 옆집이 무너져서 그것도 보고…… 네?”
‘왜요?’라고 물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빠르게 다른 대답이 나왔다. 당황하여 눈을 끔뻑이는 세이나를 향해 대신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반드시 신전에 머물러 주십시오, 성녀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