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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43화 (143/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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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사들이 루카스의 부모님을 찾은 곳은 예배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외딴 창고. 황성 사람들도 잘 찾지 않는 곳에서 루카스의 부모님은 팔다리를 묶인 채 발버둥 쳤다. 입에는 재갈이 채워져 있어서 사람을 부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몸부림을 쳤고, 곧 근처에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제 발로 창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성기사들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에요.”

    루카스와 루카스의 부모님을 배웅한 세이나는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왔다.

    저택까지는 성기사들이 그들을 호위하기로 했다. 돌아간 후에는 미련 없이 수도를 떠날 것이라고, 루카스의 아버지 로브엘 백작은 말했다.

    “폐하께서도 더는 세이나 님을 구속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당으로 돌아오자 뜻밖에도, 대신관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는 노인이었다.

    “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일단 로브엘 백작이 협박당했다는 사실은 공표될 예정입니다.”

    “범인이 유클레스 후작이라는 것도 알려지나요?”

    “그건 폐하의 선택입니다만…… 아마 그냥 넘어갈 겁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디온이…….”

    오웬은 먼저 말문을 열고 세이나의 눈치를 살폈다. 세이나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온이 그들을 납치하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디온 프라벨은 협회장의 아들입니다. 유클레스 후작과 공식적인 연결 고리는 없습니다. 후작과 그가 가까운 사이라고 말해도 부인하면 그뿐이지요.”

    “그럼 결국…… 래이시 세르본의 단독 범행으로 종결 나겠군요.”

    그녀가 공범으로 지목한 이는 성녀였다.

    일반적으로 ‘성녀’란 아주 고귀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범죄와는 매우 거리감이 멀었다.

    바로 그 이미지가 이번 일에 도움이 되었다. 대신관은 ‘고귀한 성녀께서 그런 실험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라고 밀어붙이자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 산에서의 일도 이로써 의심을 덜 수 있겠어.’

    성녀는 마족, 그리고 마물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수많은 마물 속에서 살아남은 것도 가능한 것이리라.

    정화 능력이 아닌, 검을 쓰고 주먹을 휘둘러서 마물을 때려잡았지만 어쨌든.

    “그럼 마물 소동은 어떻게 되나요?”

    세이나가 묻자 대신관은 담담하게 말했다.

    “래이시 세르본의 은신처에서 뛰쳐나온 마물들이 벌인 짓이라고 결론짓자고 유클레스 후작이 주장했다더군요.”

    “……엘렌의 일은 끝까지 숨길 셈이군요.”

    “그냥 둘 수는 없지요.”

    백발의 대신관은 그리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세이나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곧 유클레스 후작을 체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요?”

    “마족의 부활은 제국으로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제가 세뇌당한 건 아니구나.’

    세이나는 라샤드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수심에 가득 잠긴 표정이었다.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 듯했다.

    ‘재판 중에 둘이 대화한 게 이 내용이었나 보네.’

    황제가 마족을 막고 싶은 것은 진심. 그걸 알게 되자 왜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죽으면 애초에 부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

    마족의 부활에 성녀가 필수라면, 성녀의 존재를 없애면 된다.

    다수를 위한 하나의 희생. 황제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

    “언제 잡아들인다고 하셨습니까?”

    고심 끝에 라샤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아직…… 신중해지실 수밖에 없겠지요.”

    “하긴,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마족 쪽에서 후작이 순순히 붙잡혀 가게 둘 리도 없고.”

    “방심을 유도하고, 틈을 노리실 계획이신 듯합니다.”

    오웬의 말에 대신관이 덧붙였다. 세이나는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네요.”

    “예, 그래서 도움 주기로 한 분이 계시는데…… 아, 왔나 보군요.”

    대신관의 시선이 세이나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본 세이나는 창문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주인공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세이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맬빈이었다. 뜻밖의 등장에 세이나는 물론, 다른 일행들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괘, 괜찮습니까?! 안 죽었어요?!”

    “음, 죽었으면 대화를 못 하겠죠?”

    “꾸, 꿈은 아니겠죠?! 그렇죠?! 아얏! 현실이네요! 정말입니다!”

    맬빈은 제 팔뚝 살을 여러 번 꼬집고 난 후에야 진정을 찾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내내 굳어 있던 라샤드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스쳤다.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재판에 가고 싶은데, 마법사는 못 들어간다며 계속 막아서지 뭡니까. 더군다나 귀족도 아니라서 허가 없인 안 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싸울 뻔했습니다!”

    “마법사는 황성에 못 들어오나요?”

    “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배척하죠.”

    그는 어린아이처럼 툴툴거렸다. 더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그에겐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다른 이들도 있었다.

    그는 세이나의 뒤에서 인자하게 웃는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좀 전까지의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협력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대신관님. 맬빈 유벨르입니다. 편하게 맬빈이라고 불러 주셔도 됩니다.”

    “반갑습니다, 맬빈. 저 역시 편하게 하이든이라고 불러 주세요.”

    “한시가 급하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는 혼자 황성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뒤에 있던 어린 마법사가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렸다.

    잠시 후 나타난 것은 세이나도 아는 물건이었다.

    “선대 마탑주의 일기입니다. 이분께서 유클레스 후작과 협조하여 마족을 부활시킨 것으로 추측됩니다.”

    생기가 가득하던 맬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후작은 마족의 신체와 혼을 분리하여 혼만 자신의 딸에게 넣었습니다. 지금 그녀의 몸 안에는 2개의 혼이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대신관은 품 안의 작은 안경을 꺼내 얼굴에 끼고 책을 유심히 읽었다.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세이나는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지금까지의 성과를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리라는 것은, 조금 직감하고 있었다.

    엘렌이 성녀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보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작고 평범한, 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지켜 주고 싶었다.

    계속 집 근처에서 발견되는 마물은 성가시고 거슬렸지만 처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일상은 평화로웠다.

    그래서 안일했다.

    옛 기억과 함께 자책감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제 탓처럼 느껴졌다. 내가 엘렌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디온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원작을 제대로 기억했다면.

    “이건…….”

    대신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뗀 것은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가 안경을 벗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군요.”

    * * *

    유클레스 후작은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젠장!”

    반쯤 어둠에 잠긴 서재에 서 있는 사내의 등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발치에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보며 터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얻어맞을지도 모르겠군.’

    그의 주인은 완벽주의자였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독설을 날린다. 폭력은 이제껏 없었지만, 지금은 또 모르겠다.

    이어질 소식도 그리 좋진 않았으니.

    “루카스 로브엘의 부모가 도망쳤습니다.”

    “뭐?”

    예상대로. 날카로운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오싹한 살기에 등골을 타고 온몸에 소름이 쫙 퍼졌다. 제 주인은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 터너는 확신했다.

    그러니 맞으면 어마어마하게 아프겠지. 잠깐 상상해 본 미래는 어느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생각을 수습하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무래도 그분이…….”

    “내가 뭘?”

    터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먼 곳에서 시작한 구두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곧 서재에 다른 이가 들어섰다.

    디온 프라벨은 오늘도 우아한 귀족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긴 다리로 인사도 없이 서재를 가로지른 그는 곧 후작의 근처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모를 감시하는 건 네 담당이지 않았나, 터너?”

    마족은 청력이 미친 수준인지.

    분명 멀리서 온 것 같은데 바로 옆에 있었던 듯 이야기하는 꼴이 몹시 얄밉기 짝이 없었다.

    좀 전까지 이어졌던 구둣발 소리는 묘하게 경쾌하기도 했다. 어쩐지 저를 놀리는 것같이 들렸기 때문에 터너는 쉽게 표정을 풀기 어려웠다.

    그러든 말든. 디온 프라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소파 깊이 등을 기댄 채 그가 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물기도 전에, 후작이 물었다.

    “세이나 로힐은?”

    디온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여자를 왜 나한테 찾습니까?”

    “납치해서라도 그 여자를 데려와야지!”

    서재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사나운 외침이었으나 디온은 조금도 동요치 않았다.

    하지만 흥은 깨졌는지, 그는 불도 붙이지 않고 담배를 제자리에 두었다. 던지듯 놓은 담배 케이스는 테이블과 부딪혀서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후작님, 우리 거래를 명확히 하죠.”

    작은 웃음까지 머금은 얼굴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그만큼 건조하기도 했다. 온기라곤 하나 없는 눈으로 그가 후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게 부탁한 건 엘렌을 찾아오라는 거였지. 원하는 대로 엘렌을 데려왔잖아.”

    “…….”

    “성녀를 데려오라고? 잘못 건드렸다가 내가 봉인 당하면 당신도 손해가 적지 않을 텐데.”

    디온은 그러고 피식 웃었다.

    “일이 안 풀린 화풀이를 하려면 내가 아니라 신전에 가서 떠들어야지. 다 부수고 싶으면 말해. 거기까진 나도 기쁘게 도울 수 있을 것 같네.”

    “제대로 데려오지 못했지 않나!”

    쾅! 후작이 또다시 책상을 내리쳤다. 터너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부터 꼼짝도 못 하고 있어! 어깨에 저런 상처를 입을 때까지 뭘 했느냔 말이다!”

    반면, 새빨개진 얼굴을 한 공작을 마주한 디온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 자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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