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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기분이 이상해서 얼굴을 쓸어내리니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며칠이 눈앞에 스쳐 갔다. 관중들의 성난 외침이 잠시 들리는 듯하다가 아득히 멀어졌다.
살았다.
어떤 사람에겐 지극히 당연할 그 문장이 너무도 새롭게 느껴졌다.
천천히 가라앉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세이나는 거의 눕는 듯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제 몸이 액체가 되어 스르륵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았다. 세상에.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죠?”
“딱밤이라도 때려 줄까?”
오웬이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튕겨 보이자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세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멍한 시선을 위로 올렸다.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살았네요. 하하…….”
라샤드도 느끼는 감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지, 또 옆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그에게는 안도감보다 자책이 더 강해 보였다.
‘황제가 저렇게 나올 줄 몰랐겠지.’
며칠 전, 황제를 언급했던 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현실에서 황제의 결정에 가장 경악한 사람도 그였다. 지금도 배신감이 들어 괴롭겠지.
후작도 충격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사형 선고는 황제만의 단독 결정인 것 같다.
왜 그가 그런 결정을 한 걸까. 곰곰이 조금 전을 돌이켜 보던 세이나는 문득 잊었던 이를 떠올렸다.
“루카스!”
“응?”
“루카스가 협박당한 것 같았어요.”
파들파들 떨던 소년은 사람들이 아우성치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황제의 선고가 너무 충격이라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당장 만나러 가야겠어요.”
“지금? 어디에?”
“후작이 데려왔으니까 그와 함께 있을 것 같긴 한데…….”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일행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제 것으로 보이는 외투까지 걸치고 문을 열자 낯선 이 2명과 바로 마주쳤다.
성기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이야기 끝나셨습니까?”
“대신관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오웬에게 대답해 주는 어투도 정중했으나 기사들과 마주칠 때마다 좋은 일이라곤 없었기에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안심하세요.”
……그리고 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경계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에 괜히 마음이 시큰거렸다.
이상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처음 본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쩐지 감동으로 다가왔다.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디든 함께 가겠습니다. 세 분만으로는 위험합니다.”
성기사는 멋진 말을 퍽 잘하는 사내였다. 오웬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래? 그런 질문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같이 가는 편이 든든하긴 하지.’
어딜 가든 쪽수가 많으면 마음이 편하긴 하다. 부탁한 것도 아니고, 먼저 같이 가겠다고 해 줬으니 자연스럽기도 했고.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은 꽤 위압적인 기백이 있었다.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황성의 관료들도 일단 주춤하긴 할 것이다.
성기사와 신관은 성국 소속. 혹시라도 마찰이 생기면 국제 문제로 번질 테니.
‘그런데 성기사들을 우르르 끌고 황성을 다녀도 되나?’
복도 저편에서 한 사람의 인영을 발견한 건 막 그런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무렵이었다.
초록색 로브에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 빠르게 움직이는 다리는 다 성장한 성인이라기엔 짧았다.
“세이나!”
“루카스!”
작은 몸이 와락 그녀의 품 안에 떨어졌다.
1년 만에 만난 루카스는 하나도 성장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제 어깨보다 조금 높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이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안타깝게도 저번처럼 괜찮다고는 바로 하기 어려웠다.
루카스가 등장했을 때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의 감각은 아직 기억 깊숙이 남았으니까.
하지만 울먹이며 사과하는 소년을 무심하게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 옷을 꽉 붙잡은 손길이 너무나 간절하게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제, 제가…… 저 때문에…….”
‘세뇌당하지 않았어.’
마족에게 홀렸다면 사과할 리가 없다.
세이나는 루카스를 조금 떨어트리고 흰 소매로 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앳된 얼굴이 모두 눈물범벅이었다.
그러고도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아 망설이던 중, 돌연 또 다른 발소리가 예배당의 복도 위로 울려 퍼졌다.
품 안의 소년은 물론, 뒤에 있는 이들도 흠칫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세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응시했다.
디온 프라벨.
‘세뇌하지 않았어.’
은발의 청년은 산책하듯 여유롭게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한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복장과는 썩 안 어울리는 자태지만 세이나는 그답다고 생각했다. 디온 프라벨. 상냥한 미소 뒤에 정체를 숨긴 사내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어째서.’
저도 모르게 루카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께가 지끈거리고 속에서 뭔가 울컥 끓어올랐다. 오랜만에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희미한 희망의 불씨가 살아난 것도 그때였다.
‘루카스를 협박한 건 후작의 단독 소행이었을지도 몰라.’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세뇌가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래이시 세르본처럼 울면서 호소하라고 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테다. 후에 루카스가 말을 바꿀 염려도 하지 않아도 된다.
혹시 그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는 걸까. 새를 보낸 사람도 그가 아니고, 그동안 인사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보는 눈이 많아서일지도. 루카스를 데리고 와 준 것도…….
‘아직.’
기대해도 되는 걸까.
바로 그 순간, 루카스가 외쳤다.
“이제 부모님을 풀어 줘요!”
세이나를 똑바로 향하던 디온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루카스는 벌벌 떨면서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나, 난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게 약속이었잖아요!”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 했다. 소년은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이나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세이나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무슨 짓 했어?”
들리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도 디온은 계속 루카스만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더 불안해져, 세이나는 루카스를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루카스의 부모님께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저지르면?”
마침내 흘러나온 목소리는 비꼬는 투였다. 그는 곧 느리게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마주했다.
“저를 죽일 건가요?”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의……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용서 못 해, 정도의 다소 유치한 마무리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
하지만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조차도 내뱉기가 어려웠다. 그 찰나의 망설임을 디온은 긍정으로 알아들었다.
“그것도 재밌겠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이어서 날카롭게 실소한 그의 눈길이 다시 루카스에게 닿았다.
루카스 역시 느꼈는지 그의 어깨가 점점 떨려 오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그를 보호하듯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들을 풀어 줘.”
“글쎄요. 원래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풀어 드릴 예정이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저도 모르겠네요.”
“……네가 그들을 붙잡았어?”
“네.”
품 안의 어깨가 크게 떨리고, 세이나의 입술에서도 낮은 숨이 새어 나왔다. 세뇌하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희망은 사라졌다. 기대 역시.
디온 프라벨은 그들의 적이 맞았다.
“뭘 원하지?”
판단을 마친 세이나가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까스로 물었다.
디온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시선도 여전히 루카스에게.
정확히는 그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향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세이나는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고.
“저는…….”
“루카스!”
또 다른 음성이 대기를 울렸다.
루카스와 디온이 나타났던 복도 저편에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선두는 세이나도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확인한 루카스가 빠르게 디온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아버지!”
복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루카스는 세이나에게 했던 것처럼 제 부모님을 끌어안았다.
서러운 흐느낌이 들려오는 가운데, 디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 벌써 찾아 버렸네요.”
그들의 뒤로는 성기사들이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일단 두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에 세이나는 안도했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네요. 세이나는.”
그리 오래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 세이나는 바로 눈을 치켜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을 텐데. 몸이 여러 개라도 모자라겠어요.”
마지막까지 그를 믿었던 그녀를 비웃듯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치 악당 같은 표정에 세이나의 눈빛이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선언하듯 나온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이들만 걱정해.”
“…….”
“이제 당신을 걱정할 일은 절대로 없어.”
그러고 그녀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세 발자국쯤 내디뎠을까. 돌연 뒤에서 디온이 말했다.
“성국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내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이나는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또각또각 빠르게 걷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