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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의 문이 돌연 열리기 직전까지, 세이나 로힐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흥분해 있는 것은 보이는데, 어쩐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형 선고. 그 이후부터 계속 이랬다. 마치 저만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
그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라샤드는 황제에게 계속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유클레스 후작의 얼굴엔 음흉한 미소가 사라지고 당황이 스쳤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디온이 일어나자 우습게도, 일순 작은 즐거움이 찾아왔다. 덩치 큰 기사의 기척을 알아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죽여!”
갑작스레 열린 귓구멍은 여과 없이 모든 소리를 받아 내었다. 죽여! 환호성 같은 외침들이 날카롭게 그녀에게 꽂혔다.
돌아보자 큰 체구의 기사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와중에도 소란은 이어졌다. “죽여!”, “죽여라!” 군중들의 선명한 적의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더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저 기사가, 함성이. 모든 것이 생생하고 또렷했다. 이윽고 황제의 냉혹한 눈빛과 마주친 찰나.
‘죽는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평생을 몸에 익혀 온 본능이 먼저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머리 위를 떠다니던 의식이 현실로 잡아당겨지고, 팔을 타고 올라온 소름이 전신으로 퍼졌다.
‘죽는다.’
무기는 하나도 없고, 한쪽 발목에는 쇠사슬과, 손목은 무거운 수갑이 채워져 있다.
흉흉한 살기를 풍기며 다가오는 기사는 한눈에 봐도 보통 놈이 아니었다. 뽑아 든 칼날이 금세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이렇게.
죽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그때, 갑자기 빛이 쏟아졌다.
“아, 제가 딱 맞는 타이밍에 왔나 보네요.”
찬란한 빛 속에서 세이나는 제 바로 앞에 멈춘 검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저기에 제 몸이 꿰뚫렸을 것이란 생각에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느리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줄지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성기사와 신관, 그리고.
“모시러 왔습니다. 성녀님.”
“오웬?”
세이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재판 내내 열심히 찾았던 바로 그 붉은 머리가 시야 아래로 푹 꺼지더니, 곧 그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 제대로 보였다.
붉은 천을 어깨에 건 노인이 온화한 낯빛으로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뒤로는 수많은 성기사들이 정렬해 있다.
푸른색 정복 위 금색으로 박힌 성국의 문장이 믿기지 않아 세이나는 계속 눈을 깜빡였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검을 거두시죠.”
제대로 상황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오웬이 몸을 일으켰다. 기사를 보는 눈빛은 황제에 필적할 만큼 차가웠다.
그러나 결정을 내릴 이는 그가 아니었다. 기사가 황제를 돌아보았다. 입을 떼진 않았지만, 그가 뭐라고 묻는 것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홀에 감돌았다.
모두의 눈길이 황제로 향했다. 제국의 주인은 꽉 주먹을 움켜쥐었을 뿐, 어떤 말도 뱉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맹약을 잊으셨습니까?”
오웬이 기가 찬다는 듯 말하자 이젠 세이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평소대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그는 누가 봐도 도저히 황제를 영접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은 없었으나 제국민으로서 황제가 두려운 것 역시 당연한 일.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부분이 있었기에 세이나는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맹약이요?”
“성녀의 존재가 확인되면 그 즉시 성국에 알리고 그녀를 인도해야 한다.”
그의 등장 이후로 관중들은 모두 굳은 듯 멈추어 있었기에,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오웬은 매우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들뜬 음성이 홀의 적막을 가로질렀다.
“처음부터 어기긴 하셨습니다만, 뭐, 피치 못할 사정이라고 생각해 드리죠.”
잠잠해진 알현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오직 황제만이 계속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세이나는 놓치지 않았다.
“제국은 세이나를 재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유클레스 후작 역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가 분개하여 뒤를 돌아보자 잠시 후 황제가 탄식처럼 말했다.
“……사실이네.”
후작은 분을 참지 못하고 제 옆에 있는 단상을 내리쳤다. 꽤 힘을 준 것처럼 보였으나 관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바로 묻히고 말았다.
그땐 세이나도 조금 유쾌해지긴 했다. 하지만 곧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 마음껏 웃기는 어려웠다.
“성녀라고? 저 여자가?”
이젠 모두가 알게 되었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아직 자신이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라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데, 이런 자리에서 공표되고 말았다.
지끈지끈 골치가 아파진 그때, 손목의 수갑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사이 오웬이 기사에게서 열쇠를 받아 온 것이다. 오래지 않아 발목도 가벼워졌다. 오웬은 그녀를 보고 싱긋 웃더니 황제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제는 그의 우아한 인사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알현실을 떠나는 그를 세이나를 죽이려던 기사가 따라갔고, 이어서 다른 신하들이 따랐다.
후작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단상을 내려친 후 이마를 짚었으며, 라샤드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겨 다가왔다.
그리고 디온은…….
세이나를 보고 있었다.
“가자.”
세이나는 오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싱그러운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지금 안 나가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 순간에도 디온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를 뒤로한 채, 세이나는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언젠가의 숲속에서처럼, 자신을 따르는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 * *
“하, 이제 좀 진정이 되는군.”
찬물을 들이켠 라샤드는 한숨과 함께 소파에 주저앉았다.
벌써 3잔째.
그러나 그의 말과 달리 라샤드는 충격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답지 않게 멍한 눈빛은 아직도 그가 알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제가 잘 등장했죠?”
“잘…… 하, 지금 웃음이 나오나?”
“결과적으론 세이나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수를 쓸 생각이었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저도 확신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대신관께서도 오늘 오전에야 확답을 주셨고. 아무래도 황제에게 정면으로 맞서야 하니까요.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죠.”
말을 마친 오웬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라샤드가 미간을 찌푸렸을 때, 문이 열렸다.
“그래도 의논 정도는…….”
“네. 의논은 했어야죠.”
“세이나!”
다시 나타난 세이나는 옷을 완전히 갈아입은 후였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색의 신관복. 볼수록 거부감이 느껴지는 긴 소매를 휘날리며 그녀가 다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몸은 어때요?”
“뭐, 고문을 받은 것도 아니고. 며칠 갇혀 있는 것 정도였으니 괜찮아요. 옷도 갈아입었고. 그런데 왜 여기로 온 거예요?”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황성의 예배당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진 알현실에서는 꽤 먼 장소였으나, 그래도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웬이 말했다.
“대신관님이 황제를 만나러 가셨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거의 통보일 테니까. 그리고 예배당은 기사들도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으니 안심해도 돼.”
“허락?”
“물론 내 허락이지.”
“……어떻게 된 건지 다시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먼 옛날, 성황께서 초대 황제와 약속을 했어. 막 모든 마족을 봉인한 직후였지.”
다시 옛날이야기 시간이 찾아왔다.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세이나는 끄덕였다.
“마족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성녀도 반드시 존재해. 선대가 죽더라도 반드시 같은 피를 가진 성녀가 나타나지. 즉, 언제든 봉인은 풀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성황은 그걸 염려했군요.”
“황제도 염려했어. 마족의 힘을 안다면 누구든 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가질 테니까. 그 힘을 욕심낼 만한 상황도 꽤 흔하지.”
“……황위 계승 싸움.”
“그래, 황제는 다른 누구보다도 제 후손들을 염려했어. 그래서 황실에 반지가 없는 거야. 대신 성녀를 도왔던 다섯 가문들이 맡았지.”
세이나와 오웬의 시선이 라샤드에게 닿았다. 이마를 짚은 그는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알현실에서의 일을 계속 회상하고 있으리라.
세이나가 중얼거렸다.
“결국, 그 가문 중 하나도 힘을 탐하게 됐군요.”
유클레스 후작가 역시 반지를 소유한 가문 중 하나였다. 저를 쏘아보던 냉혹한 사내를 떠올리며 세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초대 황제도 그걸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야. 그래서 제국과 성국을 포함한 대륙의 모든 나라, 그리고 가문들 간에 약속이 생겼지.”
“어떤 거예요?”
“첫째, 성녀를 찾지 않는다.”
오웬은 오른손의 엄지를 접고 말을 이었다.
“성녀는 겉으로 봐서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거든. 기록에 따르면 초대 성녀가 죽은 후 거의 수백 년간 성녀가 나타나지도 않았어. 마족도 모두 봉인되어 있으니 직접 확인할 방법도 없지. 너도 계속 몰랐잖아?”
“흠, 그래도 각성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각성하면 여러모로 티가 날 것 같은데…….”
“맞아. 그래서 두 번째.”
다음 손가락이 접혔다.
“성녀는 성국에 소속된다.”
오웬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그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성국에서 반드시 보호하게 되어 있어. 제국을 비롯한 타국들 역시 존재가 밝혀지면 바로 성국에 인도해야 하고.”
세이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햇살 속에서 그의 반지가 반짝였다.
“이제 괜찮아, 세이나.”
비로소 안도감이 찾아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