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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40화 (14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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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너무 믿었다.

    마침내 도출된 결론이 그녀를 아프게 찔러 들어왔다.

    조금씩 느꼈지만 외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습이라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숨조차 뱉기 힘들다는 점에서 치명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적이다.

    엘렌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 작은 희망이 타올랐다.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을 품고 세이나는 오늘까지 버텼다. 그러나.

    그가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연거푸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죄인이 될지도 모를 위기 속에서도 디온을 찾는 자신이 한심하고 우스웠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를 너무 믿었다.

    뼈아픈 사실을 곱씹으며 세이나는 가까스로 정신 줄을 잡았다.

    “제가 아닙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음성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하던 주변을 잠재웠다. 세이나는 목에 힘을 주고 다시 말했다.

    “그 여자는 제가 아닙니다.”

    사나운 금색 시선이 닿은 곳은 후작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을 보며 세이나는 머릿속의 잡념을 모조리 쓸어 지웠다. 한번 숨을 내뱉자 해야 할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되었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래이시 세르본의 고저택에는 꽤 많은 수의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중 검은 머리가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죠.”

    그리고 황제를 믿어라.

    왕좌에 앉은 그는 다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세이나는 반쯤 기도하는 심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증인이 본 여자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자네 외에 그 사실을 확인해 줄 사람이 있나?”

    황제의 물음에 라샤드의 손이 올라갔다.

    잠시 뒤, 세 번째 증인이 올라왔다.

    그레타. 엘렌의 친구였던 소녀는 세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세이나는 마주 인사할 겨를이 없었다.

    ‘오웬은 어디 갔지?’

    그녀가 내면의 혼란을 잠재우기 전에 증언이 시작되었다.

    “제, 제가 저분에게 선생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땐 선생님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요.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확신할 수 있나?”

    황제의 냉엄한 물음에 그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은 계속 선생님을 의심했어요. 함께 방문했을 때 선생님과 싸우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세이나는 그레타의 말을 거의 듣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를 살펴도 그 특이한 주홍빛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증인은 당연히 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 그리고 저분의 말처럼 선생님의 제자분 중 검은 머리가 있었어요. 주로 현관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었는데, 세이나처럼 긴 검은 머리였지만 키는 훨씬 컸습니다.”

    “확실한가?”

    “네. 그 제자 분은 자주 봐서 확신해요.”

    “……자네는 세이나 로힐과 무슨 사이지?”

    “건너 건너 아는 사이입니다.”

    그레타는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세이나가 아닌 세이나의 옆집에 사는…….”

    “됐네.”

    후작은 듣기 싫다는 듯 끼어들었다. 다시 그레타가 눈치를 살폈고, 라샤드가 괜찮다는 듯 턱짓했다.

    소녀는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이나 로힐은 선생님과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레타는 몇 마디를 더 덧붙이고 증인석에 내려온 후에도 세이나는 충격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오웬이 없어.’

    왔다면 못 봤을 리가 없다. 텅 비어 있는 라샤드의 옆 좌석을 본 세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없다. 어디에도.

    사정이 있겠지. 그리 생각하고 싶어도 계속 나쁜 쪽으로만 사고가 돌아갔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다.

    1명도 힘든데, 2명씩이나.

    “연기였을 겁니다.”

    후작은 그레타의 등장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척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죠. 싸움 정도야 사전에 말을 맞추면 어렵지도 않습니다.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르고.”

    세이나를 향한 그의 미소는 먹잇감을 보는 짐승 같았다.

    “모르는 사이인 척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지요. 첫 만남에 싸우는 일이, 어디 흔합니까?”

    그러자 후작의 뒤쪽에 있는 귀족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은 곧 옆으로, 앞으로 전염되었다.

    근엄한 인상의 귀족 여인은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그러게, 다른 건 몰라도 보통 성격은 아닌가 보군.”

    애써 침착을 유지하던 라샤드의 미간마저 확 구겨지고 말았다. 그가 발언권을 요청하려 앞으로 나선 그때, 후작이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세이나 로힐은 거짓말에 꽤 능한 편이죠.”

    “무슨…….”

    “1년 전에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미 끝난 건입니다!”

    다급해진 라샤드가 크게 외치며 그의 말을 잘랐다.

    “이번 재판은 그 사건과는 관계없습니다. 폐하, 제가 다음 증인을…….”

    “허, 아니죠.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피해자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후작!”

    “그리 떳떳하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금 밝히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침 이곳에 그날의 증인도 있군요.”

    “증인?”

    마지막 물음은 황제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려 좌중을 진정시킨 후 낮게 말했다.

    “듣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후작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1년 전, 세이나 로힐은 동료들을 살해하고 아닌 척 연기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오늘날까지 협회에서 헌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

    “심지어 그 동료들은 몇 년을 함께한 절친한 친우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무참히 살해한 여자입니다.”

    “…….”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아주 악독한.”

    후작과 세이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는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루카스 로브엘을 다음 증인으로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홀에 나타났다.

    좌중의 눈길이 일시에 돌아가고, 세이나도 뒤를 보았다. 검은 갑옷의 기사 2명. 그사이 작은 소년이 굼뜬 걸음을 내디뎠다.

    펑퍼짐한 로브를 입었으나 안에 감춰진 그의 마른 체구를 추측하기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

    그는 증인석에 올라 자신을 소개할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깨는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루카스.’

    그녀가 끌어안았던 소년이었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해서, 업고 산을 뛰어다녔던. 이젠 내가 도와주겠다고, 세이나가 나를 구했으니 나도 세이나를 지켜 주겠다고 말했던 바로 그 소년이.

    “저, 저, 저는…… 1년 전…… 세이나가, 세, 세이나가…….”

    “천천히 말하게.”

    “세이나가 시켜서…… 거짓을 증언했습니다.”

    그녀를 배반했다.

    폭풍 같은 소란이 홀을 찾아왔다.

    경악과 충격, 그리고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세이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정말입니다…… 저는, 저는 협박당해서…….”

    루카스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도 울먹이는 그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어서 후작의 의기양양한 외침이 들리자.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요!”

    문득 이상함이 느껴졌다.

    ‘세뇌당했다면 울먹일 리가 없어.’

    누구보다 당당하게 나타나서 저 여자가 자신을 괴롭혔다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루카스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발음도 겨우 알아들을 수준. 공포에 질린 눈은 산에서 그를 구했을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로브엘 백작이라면 저 아이를 절대로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야.’

    아들을 잃을 뻔한 사건 이후로 그는 루카스를 애지중지했다. 관객석에 로브엘 백작 부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이나는 다시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 나를 봐.

    기도하듯 속삭인 순간,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 두 사람의 시선이 고요하게 마주쳤고.

    ‘미안해요…….’

    소리 없이 루카스의 입술이 움직였다.

    ‘미안하다고…… 한 건가? 지금?’

    후작이 외쳤다.

    “이미 한번 거짓말을 한 여자이니, 이번 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여자가 마물을 푼 주범……!”

    “그만.”

    후작의 의기양양한 외침을 자른 이는 후작이었다.

    조금씩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이 정적으로 잠기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결을 내리겠다.”

    엄격한 얼굴에는 라샤드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세이나는 다가오는 황제를 가만히 주시했다. 이윽고 그가 연단 끝에 서고.

    “세이나 로힐에게…….”

    결정이 내려졌다.

    “사형을 선고한다.”

    * * *

    라샤드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어서 관중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자 더는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죽여야 해!”

    “저 거짓말쟁이를 당장 죽입시다!”

    결국 실례를 무릅쓰고 연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는 기척을 분명 눈치챘을 텐데, 황제는 아래만 보고 있었다.

    “폐하! 이대로 후작의 손에 성녀가 넘어가면……!”

    “그래, 저 여자는 성녀이지.”

    그때, 돌연 오싹한 한기가 뒷덜미를 타고 엄습했다.

    “마족의 부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라샤드.”

    황제는 이미 결심을 마친 눈이었다.

    “유일한 수단을 아예 없애는 것이지.”

    “설마…….”

    “성녀를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폐하!”

    “카이븐!”

    연단 아래에 있던 기사가 검을 뽑았다. 황제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기사.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내가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죄인을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한다.”

    유클레스 후작이 충격에 빠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뒤에 있던 은발의 사내도 벌떡 일어나는 것을, 라샤드는 볼 수 있었다.

    그사이에도 검을 빼 든 기사는 세이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세이나는 맨손으로라도 그에게 맞설 생각인지 쇠고랑을 채운 손을 들어 올렸다.

    “죽여라!” 사람들이 열을 올리며 외치고, 라샤드가 연단을 뛰어 내려간 그 순간.

    “젠장, 세이나!”

    갑자기 홀의 문이 열렸다.

    찬란한 빛의 선이 맨 처음 닿은 곳은 검을 쥔 기사였다. 그가 눈이 부신 듯 손을 들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이들도 제 눈을 가렸다.

    일시에 목소리들이 잦아들고, 빛이 홀 안을 가득 채운 가운데,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웃고 있는 이는 단 1명.

    “아, 제가 딱 맞는 타이밍에 왔나 보네요.”

    빛 속에 선 남자가 장난스레 말했다. 반짝이는 붉은 머리칼. 그 뒤로 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정렬하여 홀로 들어섰다.

    쿵. 쿵. 쿵. 묵직한 울림들이 홀을 깨트릴 듯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죄인.

    세이나 로힐의 앞까지.

    “모시러 왔습니다. 성녀님.”

    한쪽 무릎을 꿇은 오웬 라프만의 손에서 성황의 반지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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