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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39화 (13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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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의 처벌은 칼만 공작의 명령 하나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간수들은 마틴에게 확인해 봐야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고분고분 그녀의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렇게 체벌은 고작 20분이 지나 막을 내렸다.

    ‘권력이 진짜 좋긴 좋구나.’

    그러나 라샤드가 후작처럼 감옥 밖에서 만나야겠다고 했을 때는 간수들도 우는소리를 했다. 마틴은 오전 이후 모든 면회를 금지했다.

    지금은 그가 마침 식사를 하러 가서 다행이지, 만약 이 상황을 보았다면 노발대발했으리라고 라샤드는 설명했다.

    “그 기사는 확실히 후작 사람인가 보네요.”

    “최근 가문의 빚을 해결했다고 들었어. 누군가 싶었는데, 후작이 개입했나 보군.”

    “아, 혹시 빚을 갚아 준 사람이 헥터 바실?”

    “……어떻게 알아?”

    세이나는 한숨 후에 대답했다.

    “디온이에요.”

    귀족들에게 그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준다던 그 검은 가면의 졸부. 투기장에서 함께했던 디온의 또 다른 이름에 세이나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이럴 때 이용하려고 돈을 빌려주는 거였군.’

    또 그와 있던 기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함께 산책하고, 식사하고, 공연을 보고, 웃고…….

    아직도 저 정도 곡예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을 때 만류하던 손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 말하는 얼굴이 가면이라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후작을 위해 움직이는 신분일 줄은.

    그냥 엘렌의 일로 화가 나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는 싶어서 그리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세이나는 창살을 힘껏 쥐었다.

    역시 디온은 후작의 편이구나. 새삼 또 슬퍼졌다.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 내가 꺼지라 했으니 미워졌겠지.’

    ……라고 생각하다가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러는 게 어디 있냐.’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천사와 악마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긴 고민 끝에 승기를 거머쥔 쪽은 천사였다. 그는 작게 덧붙이기도 했다.

    ‘혹시 디온에게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는 마지막까지 엘렌을 데려갈 것이라 했다. 그 소녀의 곁에 있으면 위험해진다고.

    당시엔 엘렌이 성녀라고 생각해서 ‘엘렌을 데려간다’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되짚어 보면 ‘엘렌이 위험하니까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 쪽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문득 시작한 생각을 잘라 낸 것은 라샤드의 목소리였다.

    “협회장이 말하기를, ‘새’를 보낸 건 자신이 아니라더군.”

    “네? 그럼…….”

    “디온 프라벨.”

    설마 하던 이름이 다시 나와 버리자 세이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협회에 가기 전, 그녀는 이미 공작의 저택으로 가는 쪽으로 마음이 조금 기운 상태였다.

    집은 소중한 곳이었으나 마족의 공세로부터 안전하지는 않았다. 또 비슷한 소동이 일어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휘말릴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다.

    차라리 수도를 벗어나서 숨어 버릴까. 그 선택을 고려해 보기까지 했다.

    ‘협회로 가지 않았다면 그리 무력하게 잡히지 않았을 텐데.’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계속 그 순간을 곱씹었다. 회장의 얼빠진 얼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들이닥친 기사들.

    몇 번을 회상해도 이상한 그림이다.

    세이나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디온은 나를 후작에게 넘길 생각이네요.”

    부정하고 부정해도 다시 이 지점.

    더 이상 그를 위한 변명을 떠올리기가 어려워지자 세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악마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계획이 있다면 왜 아직 찾아오지 않지?’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창살. 차가운 돌바닥. 죄인.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

    “세이나.”

    라샤드의 나직한 부름에도 세이나는 시선을 올리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도 알고 있었다. 이틀 뒤 재판을 준비할 것.

    뭐든 말해야 하는데.

    나를 위해 힘써 주고 있는 공작님을 위해 무엇이든 입을 열어야 하는데.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피가 차갑게 식고 눈앞마저 조금씩 아득해져 갔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련은 익숙하다며 웃었던 과거의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막다른 골목을 마주하니 바보같이 머리가 새하얘졌다.

    시간이 지나고 처음 떠 오른 것은 또, 우습게도 그 남자였다.

    부드러운 머리칼. 보기 좋은 입술. 처음엔 눈물로 젖었지만…….

    이젠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버린 푸른 눈.

    그걸 계속 외면하고, 부정하고 버티면서 믿으려고 했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세이나.”

    견디기가 어려웠다.

    “괜찮을 거야.”

    라샤드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쥔 것은 그때였다.

    비좁은 창살 틈 사이로 뻗어온 팔은 꽤 답답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닿은 후의 미세한 떨림도, 세이나는 느낄 수 있었다.

    “폐하께서 우릴 돕겠다고 약속하셨어. 다른 귀족들이 부재판관으로 서겠지만, 모두 내게 우호적인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손길은 조심스러웠으나 절대 가볍지는 않았다. 그걸 바라보다 보니 또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무거운 것을 겨우 삼키고 세이나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공작님.”

    그 말 외에 감옥 안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 * *

    황제의 알현실은 무척 넓고 호화로운 곳이었다.

    천장에 있는 화려한 그림들을 바라보던 세이나는 느리게 고개를 앞으로 내렸다.

    하얀 기둥들 사이로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100명은 훌쩍 넘는 수. 모두 공개 재판을 보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황제는 연단 위에서 알현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황좌는 멀리서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그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보다 작은 좌석에는 처음 보는 노인들이 있었다. 공작님이 말했던 ‘우호적인’ 귀족들이겠지, 세이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알현실의 좌측에는 칼만 공작이, 우측에는 유클레스 후작이 있었다.

    세이나는 바로 그 사이에 있는 작은 계단 위로 올랐다.

    절그럭절그럭. 발에 달린 쇠사슬 소리가 그녀를 따랐다. 세이나는 라샤드의 말을 되새겼다.

    황제를 믿어라.

    바로 그 황제가 말했다.

    “재판을 시작하지.”

    그리고 눈짓했다.

    “후작.”

    “네, 폐하.”

    유클레스 후작은 그날처럼 매우 밉살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의기양양한 눈으로 세이나를 힐끗 보더니 곧 옆에 두었던 지팡이와 함께 제 자리를 떠나 알현실의 가운데로 향했다.

    동시에 알현실을 가득 채운 수군대는 소리가 전부 멎었다. 후작의 지팡이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침묵을 가로질렀다. 탁. 탁. 탁. 탁.

    “세이나 로힐.”

    탁.

    “오늘 네가 이 자리에 오른 죄를 아는가?”

    그리고 오늘의 세이나도 그날처럼 사나웠다.

    너무 이를 악문 탓에 잠시 뒤 나온 말을 제대로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글쎄요.”

    “뻔뻔스럽군.”

    후작은 짧게 뱉은 후 몸을 돌렸다.

    “다들 며칠 전 수도에서 발견된 마물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넓은 알현실에 오직 그의 음성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후작은 진실로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망자는 없었으나, 다친 이들은 속출했습니다. 무엇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수도에서 마물의 공격을 입은 정신적인 충격은 어떤 것으로도 회복하기 어려울 겁니다.”

    후작은 황제를 돌아보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 충격은, 여기 계신 폐하를 향한 불충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관람석에서 작은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세이나는 작게 끄덕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결계가 있다고는 하나, 수도 안에 마물을 반입한 것은 중범죄. 저는 그 마물이 바로 저 여인이 들였다는 정보를 입수해, 폐하께 올렸습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청중들을 훑으며 후작이 말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모든 귀족이 볼 수 있는 공개 재판도 함께 말이죠.”

    그의 눈빛에서 세이나는 황제와 후작의 대화를 하나 더 추측할 수 있었다.

    ‘결계가 사라졌으니 다른 이들이 마물을 들일지도 모릅니다.’

    이건 귀족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마물을 수도 안으로 들이면, 저 여자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죄를 인정하겠는가? 세이나 로힐.”

    “아니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후작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

    “첫 번째 증인을 들이시오.”

    절그럭절그럭. 다른 쇠사슬이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세이나보다 허름한 옷, 파리한 안색이었으나 여자의 눈빛만큼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후작은 정중한 어조로 여인을 소개했다.

    래이시 세르본. 금지된 연구를 했다는 죄로 마탑에서 쫓겨난 마법사. 그리고 또다시 금지된 연구로 붙잡힌 점술가.

    래이시 세르본은 모든 죄를 인정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여인은 종국에 눈물까지 보였다. 한 차례의 흐느낌이 알현실을 침묵에 잠기게 했고.

    “모두 저 여자가 시켰습니다.”

    세르본 부인이 세이나를 지목했다.

    “저 여자가…… 저를 시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처음엔 별것 아닌 치료제 개발이라고 했습니다.”

    목소리만큼이나 떨리는 손으로.

    “그러더니 나중엔 마물을 통제할 수 있는 구속구 이야기를 꺼내서…… 저, 저는 그게 있으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 믿었습니다.”

    “그다음엔?”

    “구속구로 마물을 잡아 오더니…… 또 다른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강요해서…….”

    지금껏 전달받기만 했던 증언은 직접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혔다.

    세이나는 급히 끼어들려고 했으나, 후작이 손짓으로 가로막았다. 래이시 세르본이 내려가고, 두 번째 증인이 올라왔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 저택에는 선생님 외에 손님을 맞이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큰 키에, 검은 머리였습니다.”

    “그 여자가 세이나 로힐이라 확신할 수 있나?”

    “확신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검은 머리.

    문득 던져진 말이 세이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녀가 고저택을 방문한 날에도 섬뜩한 느낌의 여자가 있었다.

    ‘지하실에 들어갔을 때 우리를 기절시킨 사람도…… 혹시 그 여자인가? 세르본 부인은 아닌 것 같았는데.’

    왜 그 여자를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걸까.

    이후 벌어진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디온이 자신을 지키다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디온은…….’

    세이나의 고개가 우측으로 향했다. 관람석에 있는 은발의 사내는 매우 평온했다. 관심 없는 연극을 구경하듯 다소 지루해 보이기도 했다.

    세르본 부인을 잠재웠던 사람도 바로 그였다. 옮기기 쉬워서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세이나와 세르본 부인이 대화할 기회를 빼앗은 것이 되었다.

    설마 세르본 부인은 처음부터 후작의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세르본 부인의 일을 대신 수습해 준 걸까.

    다시 생각해도 의심할 구석이 너무 많은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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