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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38화 (13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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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모질게 내친 것은 자신이니까.

더군다나 그는 후작의 사람. 명령을 내린 상사가 바로 앞에 있는데 친한 척을 하는 것도 우스우니까.

몇 분 전에도 인사 하나 없이 무시당했다. 가늘어진 눈매 속에 비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 본 이를 마주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판에 찍은 듯 저렇게 똑같은 얼굴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세이나는 그를 의심했다. 지금의 디온은 그냥 낯설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극도의 무관심.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덮어쓴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디온은 태연했다. 당장 자신이 바닥을 굴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리라.

제 뒤에 선 남자에게선 그런 냉기가 느껴졌다.

저것이 그의 본래 모습일까.

역시 지금까지 보였던 것은 모두 엘렌을 더 편하게 감시하기 위한 위장이었던 걸까.

제대로 판단이 서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디온의 뒤로 빼꼼 고개를 내민 이는 낯선 청년이었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뒤따라 들어온 이는 그녀를 붙잡아 온 기사, 마틴이었다.

달갑지 않은 인물의 등장에 세이나가 눈살을 구기는 사이, 청년이 방구석의 낡은 또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두꺼운 책과 잉크. 이어 펜이 나왔다. 청년은 심문 내용을 작성하는 기록관인 듯했다. 마틴은 그의 옆을 차지했다.

“마침 이야기가 끝난 참이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자 후작이 다시 시선을 세이나에게로 향했다. 그의 주름진 손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리하자면 이렇군.”

사각사각. 기록관의 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년 전, 자네는 우발적으로 동료들을 살해했네. 하지만 돌아가면 범인으로 의심되는 것이 두려워 소년, 루카스를 데리고 가고자 했지.”

“나는 그딴 짓 한 적…….”

“그동안 할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 발명한 구속구가 도움이 됐을 테고. 그걸 이용해서 자네는 마물들을 억제했고 루카스를 데려올 수 있었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절대…….”

“엉성하게 만든 구속구는 생각보다 꽤 효과적이었어. 그때 자네는 깨달았지. 이걸로 돈을 벌 수 있겠다.”

“이봐요, 후작님!”

“구속구를 완성하기 위해 찾은 이는 래이시 세르본. 금지된 연구를 하던 그 여자만이 자네의 검은 야욕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어. 틀렸는가?”

“틀려요!”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더군.”

그동안 기록관의 손은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글이 작성되고, 종이가 넘어갔다. 마틴은 옆에서 고개를 연거푸 끄덕이고 있었다.

‘미친 또라이들 아니야?’

사전에 작당하고 들어온 사기꾼들 같았다.

세이나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입을 열 기운도 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든, 후작이 어차피 끊어 먹을 것이 뻔했기에.

후작은 그녀에게 반박할 조금의 틈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타이밍을 잘 잡아서 반론한다고 해도 저 기록에 남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기록관은 돈을 받았을 테고, 마틴은 골치 아픈 사건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어서 이득인가.

후작은 협회가 데려가지 못하도록 나를 죄인으로 만들 속셈이겠지.

‘빌어먹을.’

이 방 안에 그녀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억울하다며 울분을 토해내도, 눈물을 짜내도 그들은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후작과 마틴의 얼굴 위로 험상궂은 짐승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이리 떼들.

다시 그 계획이 튀어나왔다.

‘도망칠까?’

말의 폭포수를 쏟아 내던 후작은 잠시 소강상태였다.

아마 기록관이 작성하는 것을 기다려 주는 듯했다. 와중에도 기분 나쁜 눈빛은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

세이나도 그를 살폈다. 중년 남성. 딱히 몸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후작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녀는 마법 따윈 하나도 통하지 않는 몸이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선 주변 환경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런 마법에는 어김없이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다. 그사이에 도망치면 된다.

마틴은 기록관을 보고 있고, 간수들은 또 하품했다. 창문은 너무 좁고.

‘문밖에 없나.’

문제는 디온 프라벨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세이나는 계속 자신의 뒤에 있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과연 나를 보내 줄까.

세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잠깐 마주쳤던 눈은 한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보내 주지 않는다. 그 짧은 문장이 계속해서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세이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겨웠다.

디온은 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가슴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울적한 기분을 꾹꾹 누르며 세이나는 다짐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울 수 없었다.

저 얄미운 놈들이 승리감에 웃는 꼴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눈을 부릅뜨자.

“도망칠 생각인가?”

그녀를 지켜보던 유클레스 후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웃었다.

“우습군. 어차피 평생 지명 수배자로 쫓겨 다닐 텐데.”

네 속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여유로운 어조였다. 세이나의 눈빛이 사나워질수록 그의 비웃음은 더욱더 짙어졌다.

“혹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면 내 자비를 베풀어 줄 마음이 아주 없진 않은데 말이지.”

“자비라니요. 후작님. 저 여자는 중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번 건과 1년 전…… 함께 어울린 동료들도 무자비하게 살해한 악독한 자가 아닙니까.”

기사, 마틴은 경멸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풀어 주면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렇다는군. 아쉽게 됐어.”

후작은 그러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을 제대로 약 올릴 줄 아는 놈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후, 끝났습니다. 다음 진행하시죠.”

기록관이 긴 한숨과 함께 펜을 고쳐 쥐었다.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고, 후작의 입이 다시 열렸다.

“자네는 래이시 세르본이 잡혀간 뒤에도 계획을 멈추지 않았어.”

세이나는 이제 더는 화를 참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후작은 최종 보스다. 이 공간은 자신에게 불리하다.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그녀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를 발끝까지 잡아먹은 분노는, 놀랍게도 며칠 내내 단 1초도 빠짐없이 머릿속을 맴돌던 디온 프라벨마저 완벽하게 지워 버렸다. 탈출 계획도 사라졌다.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저 오만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다.

그때, 그녀의 발이 움직였다.

“그녀가 잡혀가자마자 일부 마물을 가져와 집에 숨겼지. 그런데 실수로 그 마물이 도망…… 커헉!”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가 끊긴 것과 동시에 마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갑자기 후작의 몸이 앞으로 세게 꺾여 버린 것이다.

글만 쓰던 기록관과 하품하던 간수들도 입을 떡 열었다. 죄수가…….

세이나 로힐이 테이블을 발로 밀어 후작의 가슴을 가격해 버렸다.

쾅!

그리고 그의 몸이 쓰러지기가 무섭게 한 번 더, 발로 테이블을 확 밀어 버렸다.

이미 강한 힘에 밀려 뒤로 기울던 후작은 무방비하게 테이블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쿵! 콰당탕!

후작이 의자째로 뒤로 넘어졌다.

모두가 경악한 반면, 세이나의 입가에 유유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후작이 일어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 죄송.”

잔뜩 비웃음을 머금은 채.

“너무 지루해서.”

그녀의 불같은 성격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 * *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방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기록관의 손에서 떨어진 펜이 도르륵 바닥을 구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클레스 후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한 눈이었다.

갑자기 가슴을 맞았고 세상이 뒤집혔다. 이어서 테이블이 날아와 그대로 얻어맞아 버렸다. 그 이상의 생각이 진행되지 않는 듯했다.

기사, 마틴은 후작보다 더 충격에 빠져 있었다. 마치 저가 맞기라도 한 것 같다. 굴러가던 펜이 멈추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고.

잠시 후.

“풉!”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작님!”

“이 여자가!”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모두가 일제히 움직였다. 기사와 기록관은 후작에게로, 간수들은 세이나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세이나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간수들이 제 양팔을 붙잡아도 저항하지 않고 곧게 허리를 세운 채 시선만 움직여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유클레스 후작을.

“뭐 하고 있나! 당장 무릎 꿇리지 않고!”

“하, 하지만 마틴 님. 칼만 공작님께서 함부로 대하면 엄벌을 하겠다고 하셔서…….”

“뭐?!”

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간수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손대지 못했다. 후작처럼 의자와 함께 넘어지리라 생각했던 세이나의 미소가 깊어졌다.

‘예비 공작 부인, 이거 제법 쓸 만한걸.’

마틴도 손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참기 힘들었는지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연 찰나,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됐네, 그만하게.”

“괘, 괜찮으십니까?”

“하, 듣던 대로 야생마 같은 여자로군.”

마틴은 황급히 몸을 숙여 그를 부축했다.

세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후작이 일어서는 모습을 주시했다. 안타깝게도 그리 큰 아픔을 선사하진 못한 듯했다.

그러나 놀라긴 확실히 놀란 모양이다. 후작은 일어선 후에도 세이나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마틴은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나중에 처리하겠습니다.”

“되었네.”

그리 말하는 입매가 비틀렸다. 후작이 그녀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 손에 죽을 테니.”

뒤에 있던 마틴마저 몸을 떨 만큼 소름 끼치는 살기였다.

* * *

“……그래서 이렇게 됐다고?”

라샤드는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낯이었다. 설마, 정말 그랬다고? 감옥 안의 세이나는 끄덕였다. 정말, 그랬으니까.

‘망할. 마지막에 한 번 더 발로 차 줬어야 했어.’

한 방 먹여 준 뒤에 온 희열은 얼마 가지 않았다. 후작의 뒤를 쪼르르 따라가는 터너와, 그 뒤의 디온을 보고 세이나는 또 입안의 여린 살을 씹어야 했다.

다음엔 마틴이 다가왔다. 그는 후작의 만류에도 어떻게든 그녀에게 보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기사 체면에 예비 공작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런 치열한 고민 끝에 그는 결국 두꺼운 밧줄을 꺼내 들었다.

양팔을 몸에 묶인 채로, 세이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나, 이대로 미라가 되는 건 아니겠죠, 공작님?”

라샤드는 참았던 웃음을 쏟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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