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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반전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조잡하게 이어 가던 계획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하얀 도화지가 떠올랐다. 짧은 첫 질문 후 이어진 두 번째도 간소했다.
왜.
오랜만에 만난 디온은 전과는 저번과 전혀 분위기였다.
머리도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예복 같은 하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너무 깨끗해서 누구나 입기 부담스러워할 법한 복장인데도 그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장난기 하나 없이 굳은 표정에는 성직자 같은 엄숙함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고요해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나를 보고 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세이나의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호수같이 깊고 잠잠한 눈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이나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심장의 세찬 리듬은 이제 욱신거림을 동반하고 있었다.
앞으로 찾아오지 마.
이유는 어쨌든, 그건 자신이 뱉은 말이었다.
당시에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간 그가 해왔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머리가 멍해 떠오르는 대로 뱉었다.
그런데 이렇듯 그를 다시 만나자 그때 곱씹었던 배신감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나는 미안해서 그를 보기 힘들었다.
집에 오지 말라고 했을 때도 애원하듯 그녀를 붙잡은 남자였다.
마족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해도 묵묵히 참으며 옆을 지켰다. 그녀를 도와준 것도 여러 번. 그게 전부 다, 계획 때문에 감수했던 것이라 해도…….
‘상처받았겠지.’
점점 더 그를 마주하기 어려워졌다.
단단한 돌바닥마저 뚫어 버리고 땅바닥으로 푹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서는.
그간 함께 있었던 시간을 먼저 저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설명해 주겠다고 했는데. 기다려 줬어야 했는데. 침착했어야 했는데. 다시금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던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디온이 다가오고 있다.
세이나의 고개가 드디어 올라왔다. 바로 앞에서, 디온 프라벨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가에는 늘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늘 그렇듯.
가슴의 두근거림이 커졌다.
세이나는 넋을 잃고 디온을 응시했다. 언제 봐도 보기 좋은 얼굴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다가온다.
세이나는 더 참지 못하고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디…….”
“오래 기다렸습니까?”
하지만 겨우 뱉은 말은 끝맺기도 전에 바로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잡아먹혀 버렸다.
세이나가 당황하여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디온이 빠르게 그녀의 옆을 스쳐 갔다.
“나도 방금 왔어.”
“하, 망할 황성. 올 때마다 얼마나 헤매는지.”
낮게 투덜거리는 이는 지저분한 수염을 지닌 사내였다. 터너. 회의실 앞에서 후작의 뒤를 졸졸 따라오던 바로 그자였다.
세이나로부터 몇 걸음 뒤에서 두 남자는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를 끌고 가던 간수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하고, 세이나도 그들을 보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저 남자라고?’
디온은 터너와 대화하면서 한 번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가볍게 흘깃 보는 시선도 없다. 그래서 더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세이나를 본 것이 아니라…….
‘저 남자?’
남자를 보고도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이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세이나는 긴장으로 힘을 꽉 주고 있던 주먹을 풀고 인상을 구겼다. 수갑만 없었다면 얼굴을 쓸어내렸으리라.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표정. 저 눈빛. 저 미소. 항상 자신에게만 향해 있던 모든 것들은 지금 다른 남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
……어쩌면 고모의 약혼자를 꼬셨다는 능력은 세뇌가 아닐지도.
‘언제는 잡아 죽일 듯이 쳐다보더니.’
어두운 골목길에서는 상하 관계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영락없이 친한 친구다.
터너가 그녀를 돌아본 건 길어지는 수다에 세이나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 없이 실소를 흘린 무렵이었다.
“저 여자입니까?”
그러자 마침내 디온의 시선이 세이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 세이나는 다가오는 터너의 등 뒤로 이미 몸을 반쯤 돌린 디온을 노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터너 루반스…… 오우, 눈빛 진짜 살벌하네.”
터너의 인사도 그냥 흘려들어 버렸다. 그러나 서 있는 방향이 겹쳐서인지 터너는 그녀가 디온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뭐, 날이 너무 춥죠? 오래 세워 둬서 미안합니다.”
그리 말할 때는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세이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어, 저 기다린 것 아닙니까? 설명 안 해 줬습니까?”
마지막 질문은 간수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간수 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지 않았어?” 라고 책임을 전가하며.
터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만났으니 가죠.”
뭘? 이라고 되묻기 전에 발이 움직였다.
세이나는 매서운 눈길로 제 등을 떠민 간수들을 돌아보았으나, 그들은 또 서로에게 눈길을 돌렸다. 네가 했지? 네가 했잖아.
‘도망칠걸.’
뒤를 쫓아가며 살펴본 터너란 남자도 그리 싸움에 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도주 중에 그를 봤다면 잠시 놀라긴 했겠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리라 세이나는 확신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나와서는.
세이나는 이를 악물며 원망하기만은 어려운 뒤통수를 빤히 보았다.
눈길 한 번 받지 못했는데도, 세이나는 계속 그가 돌아서 자신을 보고 웃는 환상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장난스럽고, 여유로운 미소로.
세이나.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줄 것 같다.
다시 우울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들을 따라 걸어갔다. 그녀를 아는 이라면 바로 의아하게 여길 만한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마침내 이른 곳은 감옥에서 꽤 떨어진 건물이었다.
침울에 잠겼던 세이나의 눈이 점점 사나워졌다. 처음 보는 곳. 처음 보는 문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남긴 터너는 곧바로 손잡이를 붙잡았다.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고, 또 처음 보는 공간이 나타났다.
삭막한 회색 벽. 작은 창문 둘. 제국을 상징하는 휘장과 그 아래에 세워진 무기. 구석에 낡은 테이블 하나. 방 한가운데에 또 테이블이 하나. 의자가 둘.
그중 하나를 차지한 중년 남자.
“유클레스 후작.”
“어서 오게. 세이나 로힐.”
유클레스 후작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
뒤이어 달칵, 디온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 * *
다시 봐도 정말이지.
유클레스 후작은 엘렌과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색이 바랜 듯 옅은 빛깔의 갈색 눈.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칼은 깔끔하게 넘겨 하나로 묶었다. 입가의 수염에는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회색빛이 희끗희끗 섞여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 엄숙한 분위기가 딱 귀족에 걸맞았다. 이윽고 나온 음성은 꽤 거칠었다.
“아, 내가 너무 오래 봤군. 신기해서 말이지.”
마침 긴 대치에 세이나의 미간이 꿈틀거리던 순간이었다.
후작은 몹시 건방진 학생을 보는 선생처럼 실소를 흘리곤 말했다.
“한눈에 딱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음, 예상보다 평범해. 그래서 더 의심할 수밖에 없겠어.”
“뭘요?”
“그 산에서 살아 나온 것.”
세이나도 결국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파고들기 좋은 사건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수행했던 다른 의뢰들과 달리, 1년 전 사건에는 목격자가 없었다.
루카스를 구하고 나오는 중에는 마물과 만나지 못했다.
어린 소년은 세이나를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저 여자가 어떻게 구하러 왔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곳에는 늪의 마물들이 섞여 있지. 또 다른 변종이 발견되어 보통 사람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됐네. 어떤 B급 헌터는 조사차 들어갔다가 시체로 발견되었지.”
그건 지금 처음으로 아는 사실이었다. 세이나는 이후 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네가 결국 이르지 못한 그 등급 말일세.”
등급. 그래, 그런 이유 때문도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난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도전은 거짓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루카스마저 살리지 못했다면 그녀의 인생에서 뼈아픈 후회로 남았으리라.
“그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떤가.”
후작은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몸을 숙였다. 주름진 눈매 사이 눈빛은 몹시 날카로웠다.
“구속구를 만드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이 누구지?”
“나는 그딴 것 만든 적 없어요.”
“발뺌하는 것 보니 혼자인 모양이군. 아, 혹시 쉐인 로힐의 연구였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 노인네는 꽤 아는 것이 많았으니 말이야.”
여기서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끌고 오다니.
“부끄러운 줄 알게. 세이나 로힐.”
후작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기로 작정을 한 듯했다.
“네 할아버지는 결코 이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을 거야. 하나라도 더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안한 구속구를, 어찌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에 사용하나.”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아니면…… 혹시 마기를 부르는 재주라도 익혔나?”
“뭐라고요?!”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세이나가 사납게 쏘아보는 와중에도 후작은 몹시 침착한 얼굴이었다.
1년 전 사건은 알지 못하지만, 어제 집 근처에 나타난 마물 사건의 원인은 명백했다.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맞서 싸워, 그 어깨에 검까지 찔러 넣었다.
더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을 만든 이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세이나는 후작이 엘렌의 몸에 마족의 혼을 넣었다고 추리하고 있었으니.
‘이 망할 귀족이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마물은 내가 아니라 엘……!”
“그만.”
그러나 제대로 뱉기도 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후작은 그녀에게 보인 손바닥을 거두며 덧붙였다.
“변명은 듣지 않겠네.”
시선은 세이나가 아닌 뒤로 향해 있었다.
세이나는 그제야 자신의 뒤, 벽에 붙어 있는 간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엘? 엘이 뭐지?” 하며.
‘엘렌은 끝까지 숨기겠단 거군.’
그리고 그들의 바로 옆.
무심한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세이나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디온 프라벨은 팔짱을 낀 채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마치 남의 일을 보듯 관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
머리끝까지 화가 끓어오르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