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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36화 (13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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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려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감옥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는 잠시 멈춰서 망설였다. 심각해야 하는데. 다시금 소리 없이 그 말을 중얼거렸으나.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건 청혼이었다.

비록 급하게 와서 반지도 꽃 한 송이도 없었지만. 우아한 분위기의 음악도, 잘 차려진 테이블도 없었지만.

라샤드는 쉽게 문을 열지 못하고 계속 마른침만 삼켰다. 옆에서 아론이 계속 종알대는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청혼.

그리고 첫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난생처음으로 현기증이 찾아왔다. 너무 긴장한 탓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논리도 이유도 없는, 말 그대로의 느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을 놓쳐선 안 된다.

라샤드는 확신에 찬 얼굴로 감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마자.

후회했다.

감옥은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불빛이라곤 오로지 입구에 있는 마정석뿐. 이런 공간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 그의 숨통을 갑갑하게 조여 왔다.

오는 내내 들떴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결코.

감옥에서 청혼 따위 받고 싶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는 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건조하게 말하게 되었다. 인생 첫 고백. 첫 청혼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참했다.

세이나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 밖의 상황이…… 많이 안 좋나 보네요.

거절인가.

멍청하게도 그 생각부터 떠올랐다. 이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 이 방법이 최선이야.

돌이켜 보면, 매달리고 싶었던 것 같다.

세이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평소대로라면 표정을 읽지 못했겠지만,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탓에 반대로 그녀가 더 확실하게 보였다

곤란해하는 기색. 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금색 눈동자가 빛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보였다.

- 공작님 판단을 믿어요. 하지만…….

-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세이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점점 더 아래로만 향했다. 라샤드는 돌연 불안을 느꼈다.

혹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올까 봐.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튀었다.

- 괜히…… 저 때문에 미래의 공작 부인께서 불편하실까 봐요.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래의 공작 부인이라. 세이나 로힐은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될 것이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의미의 거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 씁쓸했지만, 라샤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매달리기로 했으므로.

- 일단 나오고 의논하지.

- 네……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죠.

드디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세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제 처지가 좋지 않아서 공작님의 친절에 기대는 수밖에 없네요.

친절.

그녀가 판단한 감정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라샤드는 그 이름이 썩 달갑지 않았다.

난생처음 느끼는 이 자책감을, 실망을. 이런 순간에도 눈이 마주치자 속절없이 울리는 심장을 아직 완벽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려웠지만.

그것만 있진 않아, 세이나. 결코.

하지만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기에 라샤드는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줄 수 없는 노릇이다.

하고 싶은 말을 뒤로하고 라샤드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마주치자 세이나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와 다른, 안심시키기 위해 꾸며 낸 거짓 미소를 기억에 담으며 라샤드는 몸을 돌렸다.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계획한 일을 해야 했다.

떠나는 그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쳤다.

- 미안해요.

마지막까지 아픈 말이었다.

* * *

“네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깊어지던 라샤드의 회상을 깨운 것은 이번에도 황제의 목소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결혼식에 꿈이 크던 아이였지. 티를 내진 않았지만 제 결혼식을 그냥 보내 퍽 아쉬웠을 거야.”

라샤드의 어머니, 리에논 황녀의 결혼이 결정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이었다.

그 결혼식 준비가 얼마나 성대했는지는 라샤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어머니가 속삭여 주었으니.

그녀의 계획은 결혼식 이틀 전, 선황의 서거 소식으로 인해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새로 결혼식 날을 잡고 일정을 조절했으나 본래 그녀의 계획보다 조촐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살피면서…… 내가 결혼식에 무슨 옷을 입고 갈지도 확인하더군. 그땐 얼마나 귀찮던지…….”

황제의 주름진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어느새 따뜻해진 눈빛은 언젠가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정원을 뛰어다니던 작은 황녀를 바라보는 듯했다.

“정말, 좋아했을 텐데.”

선황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당시 황태자였던 황제에게도 인생을 바꿀 만한 사건이었다.

지금은 냉정하고 깐깐하기로 유명하나, 그때 그는 서류보단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흔한 청년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황태자. 그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을 잠재운 이는 바로 칼만 공작이었다. 오랜 친구의 도움으로 황태자는 무사히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황제는 칼만 공작 부부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들은 황제에게 어려울 때 기꺼이 도와준 친우와 소중한 누이였다.

귀족들은 황제가 황태자보다 라샤드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지금도 수군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라샤드는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잠시 후, 황제가 서재의 침묵을 일깨웠다.

“가서 결혼식을 준비하거라. 라샤드.”

라샤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애써 침착을 찾고 바라본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뜻은…….”

“석방은 이 외숙부의 축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이후의 이야기도 순탄하게 흘러갔다.

몇 가지 사항을 황제와 합의한 후 라샤드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나오기 전에도 감사 인사를 올려, 황제가 “한 번만 더 하면 번복할지도 몰라.”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라샤드는 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확 미간을 좁힌 황제에게 라샤드가 물었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일찍도 묻는군.”

황제는 헛웃음을 짓더니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허공을 몇 번 가른 손은 이윽고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에 잘 있으니 걱정 말거라.”

라샤드는 끄덕인 후 서재를 벗어났다.

다시 찾은 복도는 고요했다. 닫힌 문에 등을 살짝 기댄 채 라샤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황제가 도와준다면 유클레스 후작 따위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황제는 세뇌도 통하지 않는다.

몇 번 더 숨을 고른 뒤 라샤드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앞으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자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성공이야.”

“정말입니까?”

오웬에 뒤이어 물은 이는 어린 기사, 펠립이었다.

라샤드가 끄덕이자 펠립의 앳된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그는 옆에 있던 오웬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공이라네요!”

‘대체 언제 친해진 거야?’

볼수록 놀라운 친화력이다.

펠립이 소식을 전하자 뒤에 있던 기사들도 하나둘 라샤드에게 다가왔다. 삽시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축하드립니다!”

“그래.”

“드디어 공작가의 안주인 자리가 채워지는군요.”

“결혼식은 언제로?”

기사들은 그저 황제에게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다 털어놔야겠지만, 그들 모두와 이 복잡한 사정을 공유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라샤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며 외투를 받아 입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그의 머릿속에 순서대로 펼쳐졌다. 제게 우호적인 귀족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고, 재판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어디 가?”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 오웬이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특유의 장난기 많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 몸을 돌렸다.

“저도 저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휘휘 손을 젓는 것이 인사가 아니라 꼭 파리 떼를 쫓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와 예의를 차릴 사이는 아니기에 라샤드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성큼성큼 걷는 그에게 펠립이 따라붙어 물었다.

“역시 결혼식은 봄이 좋겠죠?”

주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펠립은 벌써 아름다운 결혼식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기대가 전염이라도 된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라샤드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지.”

“세이나 님은 어떤 웨딩드레스가 어울릴까요?”

“전부 다.”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은발 남자를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눈을 떴을 땐 다음 날이었다.

“일어나.”

요란하게 창살을 때리던 간수는 세이나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마자 퉁명스럽게 뱉었다. 그의 바로 위에 있는 시계를 보고 세이나는 탄식을 뱉었다.

당황스러운 청혼으로부터 하루.

그녀는 아직도 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감옥에 있는 것도 이상해 미치겠는데, 이제는 진짜 예비 공작 부인이라.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 걸까. 막막해졌다. 딱딱한 침대가 익숙지 않아 더욱 그랬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사이 문이 열렸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들어선 간수들이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따라와.”

그냥 도망쳐 버려?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세이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공작 부인용 수갑은 이전처럼 그리 무겁지 않았다.

감옥을 옮기는 동안 주변 지리도 모두 파악했다. 앞에서 하품을 쩍쩍 하는 간수들은 둘 다 그리 단련한 몸도 아니었다.

도망칠까?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수갑으로 저 뒤통수를 후려치고 달려 나가, 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질까. 그리고 앞으로 도망가는 척 소리를 내고 옆으로 빠지면…….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창문을 몇 걸음 앞에 둔 무렵이었다.

계획에 딱 맞는 타이밍. 노리던 순간이 찾아왔음에도 세이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기계처럼 걷던 다리도 멈추고,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간수를 넘어, 창문을 지나, 그리고 몇 걸음 앞.

은발의 사내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팔짱을 끼고 등은 벽에 기댄 채, 시선은 줄곧 아래로만 향해 있다. 붉은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불만이 있을 때마다 보이는.

익숙한 표정.

“디온.”

그렇게 무심코 중얼거렸을 때.

차갑게 식은 푸른색 눈동자가 세이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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