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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저음이 황제의 서재를 장악하던 침묵을 깨트렸다.
“제 약혼녀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시에 정지했다.
찻주전자를 들고 있던 시녀도, 옆에서 트레이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하인도, 벽 쪽에 붙어 있던 기사와 바로 그 옆에서 기록을 살피던 서기, 심지어는 그가 넘기던 책장까지.
누구보다 놀란 이는 황제였다.
“다들…… 나가 있게.”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마지막은 황제의 측근인 서기였다. 그가 기사에게 “내가 뭘 들은 거야?”라고 작게 묻는 소리를, 라샤드는 놓치지 않았다.
문이 닫힌 후 침묵이 찾아왔다.
황제는 평소 습관대로 제 콧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화려한 복장. 한낮의 햇살이 닿은 왕관이 눈이 아프도록 반짝였다.
“천천히 말해 보게. 칼만 공작.”
“폐하께서 오늘 잡아들이라 말한 이가 제 약혼녀라고 말했습니다.”
“……정말인가?”
“유클레스 후작이 그녀를 잡으라 했습니까?”
질문에 질문이 돌아왔고 황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나 그는 트집을 잡는 대신 이마를 매만지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깊은 한숨. 곧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라샤드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칼만 공작. 황제가 그리 부를 땐 신하로서 그를 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친분이든, 동정이든, 애정이든.
뭐든 이용해야 했다.
다행히도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단호하던 눈빛에도 점차 온기가 찾아왔다. 잠시 후,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봤던 외숙부의 모습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모함입니다.”
“증거는?”
“마물이 나타났을 때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마물은 그 여자의 집 근처에서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황제는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집도 오가는 사이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폐하.”
“당연히 중요하지! 언제부터?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아, 잠깐만…… 그럼 엘렌 유클레스는?”
“마족입니다.”
연이어 던져진 충격적인 말에 황제의 녹색 눈이 흔들렸다. 그 역시 남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처음부터 모두 설명해.”
라샤드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라는 부분은 미안하지만 따르지 못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읊는다면 아마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
고저 없는 음성이 서재를 채웠고, 황제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으나 라샤드는 매우 조급한 심정이었다.
그녀를 두고 떠나는 걸음이 어찌나 떨어지지 않던지. 호화로운 서재 안에서도 라샤드는 감옥에 있는 것 같은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황제를 붙잡고 있는 이 시점에도 감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엄한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글쎄.
‘역시 황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보러 가야겠어.’
불안함을 지우기가 힘들다. 차라리 투정하고 매달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괜찮다고 해서, 참을 만하다고 해서 더 마음에 걸렸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한참을 움직이던 라샤드의 입술이 멎었다. 동시에 테이블 아래의 손이 제 무릎을 꽉 쥐었다.
마침 황제가 반문하던 찰나였다.
“후작이 엘렌 유클레스에게 마족의 혼을 넣었다고?”
“예. 정확히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으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렌 유클레스가 마족으로 변모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저번엔 주변 이들이 자신의 눈빛을 보고 속내를 추측하는 것이 짜증 난다며 냉엄한 표정을 고수하더니.
라샤드와 단둘이 된 황제는 거리낌 없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말투도 달라졌다.
“그럼 네가 잡은 마족이 남긴 일기는?”
“라프만이라는 일족이 마족의 힘을 받고 그 마력을 얻게 됐다고 하더군요. 일기의 주인은 마족이 아닌, 마력을 받은 사람일 겁니다. 엘렌 유클레스를 주인처럼 따랐으니까요.”
“허…….”
“아마 마족의 힘을 받은 후유증으로 모든 기억을 잃었으리라 추측됩니다.”
“끔찍한 필체는 그 때문이겠군.”
“확신이 없어서 그동안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그 말을 마쳤을 때는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긴 했다.
황제는 마족과 일기에 관련된 문제를 그에게 일임했었다. 유클레스 후작이 의심스럽다고 논의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소식은 바로 전달해 드리겠다고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해이해진 걸까 고민하다 보니 또, 그녀가 떠올랐다.
세이나를 만난 이후부터는 하루가 너무 빨리 저물었다.
‘공작님이 매일 책에 빠져 있으니까 그렇죠.’라고 투덜거리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히 그리 말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평소와 달리 작은 미소조차 지을 수 없다. 창살 뒤 세이나 로힐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괜찮아요.
자신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할 말이었다.
“유클레스 후작이 이번 사태의 책임을 그 여자에게 물으라 말했다.”
황제의 목소리에 라샤드는 상념을 거두었다. 그는 예의도 잊고 살짝 찌푸리며 황제를 보았다.
“……래이시 세르본도 후작이 개입했습니까?”
“내내 입을 닫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공범을 댔으니, 그렇다고 생각해야겠군. 하지만 이미 이름이 나왔으니 로힐을 쉽게 풀어 주긴 어려워.”
황제는 눈가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 의자 손잡이를 쥐었다. 툭. 툭. 손가락이 금속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마물이 수도에 나타난 이 상황에서 결계가 사라진 것을 인정하면 여론이 더 악화할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
“모든 것을 로힐 탓으로 돌린다면 일시적으로라도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그 여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부정하기 힘들더군.”
‘시간을 버는 사이 후작이 결계를 고치겠다고 했겠지.’
황제와 후작이 나눈 대화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가 이전과 달리 그 제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혹시 오늘 나타난 마물도 후작이 만들라고 지시했을까.’
상황이 후작에게 너무 유리하게 굴러가고 있다.
저번 회의, 그러니까 처음 결계의 소실을 인정할 때만 해도 황제는 이렇듯 여론을 걱정하지 않았다.
겨울은 대부분의 마물이 동면에 들어간다. 게다가 최근은 마물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
이 시점에서 ‘결계가 사라지면 수도에 마물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라는 것은 다소 비관적인 전망이었다. 결계 없이 오랜 세월을 버티는 도시들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로 그 전제가 바뀌었다. 이미 한 번 습격당했기에 사람들은 언제 또 마물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불안해할 것이다.
왜 결계를 복구하지 못하냐며, 황실은 뭘 하고 있냐며 바로 비난의 화살을 황제에게 돌릴 것이다.
그러다 만약, ‘유클레스 후작이 결계를 살릴 수 있다’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결계를 고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군.’
라샤드는 점점 초조해졌다.
황제는 후작의 제안을 다시 고려 중일 것이다.
결계는 제국의 상징. 초대 외에 결계 없이 자리를 보전했던 황제는 없다.
결계를 원상 복구하면 마물 소동 따위는 단숨에 진압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후작은 제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제국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 그 영웅이 지목했으니…….
세이나 로힐이 범인이다.
“……후작은 세이나도 손에 넣을 속셈입니다.”
라샤드는 큰 손으로 제 이마 양쪽을 꾹 눌렀다.
“그녀를 죄인으로 만든 후 그 처분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할 겁니다. 사형이라면 처형대에 올리기 전에 빼돌려서 그 피로 마족을…….”
점점 더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뼈아픈 자책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협회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그때 막았더라면, 느낌이 좋지 않으니 일단 공작저에 몸을 숨기라고 했다면.
젠장, 그 이상한 새만 오지 않았어도…….
“로힐을?”
“세이나가 성녀니까요.”
“뭐?”
아, 이걸 빼먹었군.
“왜 성녀를 필요로 하지? 혼을 옮긴 후에도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았나?”
“마족은 세이나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지금 붙잡은 것을 보면 성녀의 피를 이용해서 완전히 봉인을 풀 계획일 겁니다.”
“후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직 거기까진……. 송구합니다.”
저번 회의 이후로 후작에게 사람을 붙여 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성과는 없었다. 부하들은 잔뜩 풀이 죽어서 후작이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서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마법일 테지. 라샤드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유클레스 후작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다.
“그래, 그래서 약혼이었군.”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이면 공작가가 그녀의 일에 개입할 명분으로 충분하지. 음, 원래 성녀를 그렇게 보호하려고 했으니 당연한 건가?”
그래, 그래서 약혼이었다.
누구도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칼만 공작 부인이 될 여인이라 하면 저 냉정하기로 유명한 황제도 한 번쯤 자비를 베풀지도 모르니.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간수장은 라샤드의 말을 듣고 그녀가 머물 장소를 옮겼다. 창문이 하나, 침대가 하나, 담요도 하나 생겼다.
‘제기랄.’
하지만 감옥은 감옥이었다.
간수장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소신을 꺾지 않았다. ‘아직은 공작 부인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덧붙이던 얼굴이 너무 밉살스러워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고작 그것밖에 해 주지 못했다. 고작.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닌가 본데.”
이미 너덜너덜해진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던 라샤드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뭐가 재미있는지 씩 웃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만났지?”
“……예?”
“세이나 로힐.”
라샤드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갑자기 낯이 뜨거워졌다. 만났다, 란 사전 그대로 의미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깊은 사이였지?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다. 불현듯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순간이 뇌리를 스쳤다.
가는 내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수백 번은 상상하고 또 고민했다.
심각해야 하는데. 심각해야 하는데.
그런 주인의 속도 모르고 심장은 터져 나갈 듯 널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