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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33화 (133/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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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은 본디 상대를 봐 가며 덤벼야 한다.

    그 법칙은 마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열하게 영역 다툼을 하는 그들이라도 압도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마련이다.

    등급이 높은 마물들은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음험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람조차 꺼림칙한데 마물이라고 다를까.

    ‘뭐지?’

    어느새 숲속을 울리는 것은 세이나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고요한 대기를 가로지르며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심할 때 공격할 심산?’

    그러나 다가서는 기척은 없었다. 그저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선뿐. 느긋하게 속도를 맞춰 따라오는 것이 어쩐지 징그럽기도 했다.

    ‘저 마물 때문에 오염이 시작된 걸까?’

    그래도 저 녀석 외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조금 여유를 주었다. 세이나는 그제야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 의문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족처럼 마기를 다루는 S급 마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관찰된 바가 없어 전설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듯 직접 겪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차라리 다행인가. 저놈만 신경 쓰면 되니까.’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마물은 마물. 계속 따라오는 걸 보면 저 녀석도 자신과 루카스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른 마물들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내뺄 정도로 강한 개체인데.

    왜 먼저 공격해 오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걸까?

    혹시 계속 따라오면서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고약한 성격? 지쳐 나가떨어져서 ‘차라리 죽여라!’라고 애원하길 바라는 변태?

    ‘원하는 대로 해 줄까 보냐.’

    오기가 치민 세이나는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땅에서 튀어나온 굵은 뿌리를 넘어, 자신이 처리한 뱀을 지나치고, 파헤쳐진 땅들을 지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계가 찾아왔다. 지친 숨을 내쉬며 루카스를 내려놓은 후에도 다가서는 기척은 없었다.

    ‘뭐지?’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되고만 있었다.

    그녀가 어둠이 내려앉은 한구석을 째려보는 중, 일어나던 루카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세이나는 상황을 잊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도 마물은 반응이 없었다.

    “이, 이제 걸을 수 있어요!”

    ‘왜 안 오지?’

    “세이나?”

    “아, 응. 이제 갈까?”

    자신 있게 말한 것치고 루카스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갓 태어난 망아지가 걷는 수준. 그마저도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다리를 제대로 뻗지도 못했다.

    세이나는 루카스가 제대로 걸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너무 지쳐 있어서 그랬다는 쪽이 맞았다.

    ‘뭐야?’

    그동안에도 마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루카스가 겨우 원래의 걸음을 회복하여 언덕을 넘고, 야광초 꽃밭을 지나.

    산에서 내려온 마지막까지도.

    습격은 없었다.

    “다 왔어요!”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외치자마자 루카스는 바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쁨으로 활짝 웃은 것도 잠시, 곧 그는 제 얼굴을 가리고 끅끅 울어 대기 시작했다. 살았다는 기쁨에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대체 뭐야?’

    반면, 세이나는 아직도 의문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착각일 리가 없다. 산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단 한 번도 마물과 마주치지 않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스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당해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도중, 입구에 있는 작은 나무가 보였다.

    몇 달 전 그녀가 심은 것이었다. 붉은 과실은 온데간데없고, 줄기는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꿈틀대고 있었다. 켁, 켁, 켁! 이상한 소리도 났다.

    “변형이에요.”

    “일단 빨리 벗어나자, 루카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어?”

    소년을 재촉하던 그때,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습격인가? 매섭게 뒤를 노려보자 황당하게도 처음 보는 말이 있었다.

    안장까지 얹힌, 사람에게 훈련된 말이었다.

    ‘마물에게 당한 사람의 것인가?’

    조금 미심쩍었지만 가릴 처지가 못 되었기에 세이나는 바로 말의 고삐를 잡았다. 루카스를 앞에 앉히고, 바로 마을을 향해 말을 몰았다.

    ‘대체 뭘까.’

    달리는 중에도 계속 의문스러웠다.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었으면 왜 계속 쫓아온 거지? 마물들은 왜 쫓아내고?

    ‘설마 이 말도?’

    지나친 생각이다. 세이나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을 즈음 불빛들이 나타났다.

    마을 안은 황당할 정도로 조용했다.

    문지기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투덜대며 입구를 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사내는 좀 전까지 그녀가 겪었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산에서 마물을 만났어요. 변형이 일었다고요!”

    “변형? 그게 뭔데?”

    사내는 루카스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쳐도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마을과 산은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루카스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해지고 말았다. 죽을 고비를 넘어온 사람을 맞는 것치고 문지기의 반응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세이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을까지 피해가 안 왔으면 다행이다. 그리 생각하며 묻자.

    “제 일행들은 어디 있죠?”

    “일행?”

    문지기가 고갤 갸웃했다.

    “누구?”

    “제 동료들이요. 아시잖아요.”

    “아아, 걔들? 안 왔는데?”

    “……네?”

    다시 하품이 나왔고, 사내가 제 눈가를 문질렀다.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돌아온 사람은 너희가 처음이야. 내가 줄곧 지키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한테 확인할 필요도 없어.”

    다음 순간, 세이나는 다시 말에 올랐다.

    등 뒤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세이나!” “왜 또 나가!?” 그러나 금방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

    ‘제발.’

    다시 불길함이 그녀를 찾아왔다. 마물을 마주칠 때마다 느끼는 기척이 아닌, 끔찍한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예감.

    제대로 시간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루카스를 찾아 데려오는 과정은 꽤 길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다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제발.’

    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눈앞이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세이나는 말에서 쓰러지듯 내렸다.

    땅을 박차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손에 잡힌 풀을 쥐어뜯으며 그녀가 일어났다. 제발. 제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서 그들을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일단 달려갔다. 다시 찾아온 숲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울려 퍼지는 것은 오직 그녀의 숨소리뿐.

    무기도, 앞을 밝혀 주는 마정석도 하나 없으면서도 세이나는 미친 듯이 숲을 헤집었다.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걸 보자마자 그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그즈음 야광초들은 꽃봉오리를 접고 잠이 든 후였다.

    하지만 저 형형한 빛깔은 틀림없이 야광초의 빛이 맞았다. 야광초.

    “아나히…….”

    그녀가 표식을 남겼던 바로 그 액체가 눈앞에 있었다. 물웅덩이처럼 고여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하…….”

    다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세이나의 몸이 이내 무너졌다. 시선은 계속 앞에 박혀 있었다. 형형한 빛이 담긴 생기 없는 눈. 창백한 얼굴.

    피.

    얼마 지나지 않아 비통한 울음소리가 숲의 적막을 가로질렀다.

    * * *

    “검에 의한 자상이었어요.”

    세이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 쓰러진 사람은 아마 라울이었을 거예요. 뒤에서 찌르고 당황한 틈에 바로 목을 베었겠죠.”

    벌써 수백 번을 곱씹었던 장면이 오늘도 세이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경악에 가득 차 부릅뜨고 있는 라울의 갈색 눈이 아직도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겠지.

    “놀란 맥스가 아나히를 떨어트렸고 그 바람에 허리춤의 야광초가 쏟아졌을 거예요. 맥스는 저항했지만…….”

    그리고 벌써 수백 번도 그러했듯, 끝까지 침착하기는 어려웠다.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잠기더니 곧 침묵이 찾아왔다. 창살을 쥔 손은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이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

    “맥스는 가장 잔인하게 난도 당한 시신이었어요.”

    습격자는 라울과 달리 맥스를 한 번에 끝내지 않았다. 아마 첫 공격은 피했을 것이다. 그는 반사 신경이 좋은 편이었고 그중 가장 멀쩡했으니.

    아마 그래서 가지고 논 것일 테다.

    맥스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어깨와 배, 옆구리, 팔과 다리. 모든 곳에 상처가 있었다.

    사방에 피를 흩뿌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맞섰을 맥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습격자가 제 검을 부쉈을 때 당황했을 얼굴도.

    실력 차이가 명확한 상황에서도 맥스는 끝까지 맞섰다. 세이나가 발견했을 때도 그의 손은 라울의 대검을 쥐고 있었다.

    비록 잘려 나가 몸과는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아나히의 목숨까지 제대로 끊었더군요. 의식도 없었는데…….”

    맥스는 아나히의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다.

    손이 잘리고도, 한쪽 다리를 잃고도, 배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그는 아나히에게 기어갔다. 하나 남은 손을 뻗으며 그녀를 지키려고 했다. 아마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아나히.

    미안해.

    죽은 동료들 앞에서 세이나는 목이 쉬도록 울음을 쏟았다.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미안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오늘은 마을에서 쉬었다면. 아니, 애초에 그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죄스러워 견디기 어려웠다. 눈물이, 흐느낌이, 심장을 조여 오는 감각이 오직 자신만이 살았다는 사실을 계속 일깨우고 있었다.

    너무 짓씹어 부어오른 입술이 계속 달싹였지만 목이 메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오한이 든 것처럼 덜덜 떨렸다.

    대체 누가.

    뒤늦게 떠오른 의문이 그녀의 머리를 울렸다.

    검을 휘두른 것을 보니 마물은 아니었다. 사람. 그것도 실력자.

    왜.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일행들은 작은 트러블 한번 없었다. 산을 조사하는 내내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그럼 대체 누가. 왜.

    의문을 채 거두기도 전에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뒤 수풀을 헤치고 나온 이들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악했고, 루카스는 그대로 혼절했다. 마을로 돌아온 후에 던져진 질문도 이전과 같았다.

    누구지?

    “……그 마을은 도시에서도 꽤 떨어져 있었죠. 방문자들은 상인들, 그리고 늪의 마물에 도전하러 헌터들이 왔지만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

    “몇 달 동안 왔던 외지인들은 단 5명.”

    세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샤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가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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