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31화 (131/179)

@131

저녁이 찾아온 산은 조용했다.

탁! 탁! 불꽃이 일었고, 새로운 마정석이 빛을 품었다.

다 쓴 마정석을 제 발치에 던지고 세이나는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은은한 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어간다면 저 야광초 꽃밭도 더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화살표는 점점 더 깊은 숲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습관적으로 확인한 회중시계는 조용했다. 이어 세이나는 다른 것도 꺼내 들었다.

마찬가지로 둥근 형태. 내부의 숫자들은 시계와 달리 직선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총 6개의 보석. 현재 붉게 변한 것은 가장 좌측에 있는 것밖에 없었다.

레벨 1.

주변의 마기를 측정해 주는 마도구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세이나가 혀를 찼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마물에 한하여 세이나의 직감은 놀라운 적중률을 발휘했다.

신입 시절부터 빠르게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번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니 높은 등급의 헌터들도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고작 입문급 오러’는 딱히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그때 첫 별명이 붙었다. 마물 탐지기.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바로 그 직감이 조금 전부터 계속 그녀의 신경 줄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이토록 애매한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나침반도 회중시계도 정상. 몇 달간 제집처럼 드나들던 산은 맥스가 불만스러워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분 탓이겠지.’

그럼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데.

세이나는 갸웃하며 계속 전진했다.

이 상황에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딱히 피곤하지도 않고 컨디션도 괜찮다. 일이 질질 끌려서? 마지막 날인데 뭐 어떤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걸음은 ‘혹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는 맥스를 좋아하게 된 건가?’ 하는 이상한 추리가 나타날 즈음 멈추었다.

무릎을 접어 마정석을 가져가자 부서진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그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던 세이나는 곧 붉은 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피.’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세이나가 밤눈이 좋지 않았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제 밤하늘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고, 더군다나 핏방울 위엔 나뭇잎들까지 겹쳐져 있었다.

그리고 파헤쳐진 땅.

부드러운 흙을 만지던 세이나가 다시 주변을 살폈다.

땅 밑에서 무언가 폭발한 듯한 형세였다. 아니, 솟아올랐다. 그 때문에 스치는 상처가 생겨 피가 튀었고 직후 나뭇잎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위에서 떨어진 것이다.

습격.

그걸 알아차리자마자 세이나는 튀어 나가듯 앞으로 달렸다.

와중에도 손은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곧 신호탄이 하늘 위로 쏘아 올려졌고,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바로 그때, 나무를 스친 칼자국이 보였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이었다.

도망가는 와중에도 동료들은 표식을 남겼다. 누군가 이걸 발견하기를, 따라와 주기를.

도와주기를 바라며.

“젠장!”

왜 하필 저쪽으로 도망친 걸까. 이쪽은 쭉 내리막. 더 가면 출입 금지 지역인 늪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늪에는 이곳과 달리 다양한 마물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조급해진 마음을 따라 다리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허억……. 헉…….”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공기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세이나는 금세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 아래에 있는 맥스는 흙투성이였다.

무언가에 당했는지 옷 여기저기가 찢겨 있고 이마에서는 피도 흐르고 있다. 검을 놓치진 않았다.

그의 바로 뒤에는 아나히가 누워 있었다. 마찬가지로 흙투성이지만 맥스와 달리 의식을 잃은 듯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푸른색 악어들.

‘블루 카이만?’

늪에서 주로 서식하는 C급 마물이었다. 크기를 보아 성체들은 아니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 수가 10마리를 넘었다.

“맥스!”

외침과 동시에 맥스가 고개를 돌렸다. 악어들도 그녀를 발견했다. 맥스가 그녀를 발견한 직후.

“세이…….”

세이나는 예열한 마정석을 던졌다.

쾅!

폭발음과 함께 일어난 연기가 순식간에 일대를 집어삼켰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세이나는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가 검을 휘둘렀다. 퍽! 소리도 들렸다. 맥스가 가까이 있는 악어를 발로 차는 소리였다.

맥스는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세이나의 전투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눈짓 한 번 교환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카이만들도 뒤늦게 그들에 대응했으나.

콰드득!

연기와 폭발음을 듣고 당황한 순간이 꽤 길었다. 뿌옇게 변한 시야 속 검은 그림자가 섬광처럼 스치고.

콰득!

이윽고 검이 거침없이 악어의 머리를 꿰뚫었다.

연기가 잦아들었을 즈음엔 이미 모든 카이만들이 정리된 후였다.

피에 젖은 검을 뽑으며 맥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다행이다. 와 줘서 고맙…….”

세이나는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그를 지나쳐 뒤로 향했다.

아나히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시체처럼 창백한 뺨, 말라붙은 입술, 생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가, 갑자기 땅에서 스펙터가 튀어나왔어.”

아나히의 팔에는 스친 상처가 있었다. 스펙터의 줄기에서 나온 독이 그녀의 몸에 퍼진 것 같았다.

“땅이라도 판 거야? 새벽에 활동하는 녀석들이 왜?”

“모르겠어. 직후엔 갑자기 나무 위에서 핑거티거들이 쏟아져서…….”

“뭐?”

핑거티거는 원숭이를 닮은 마물로, 이 숲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 종이었다.

마물이긴 했지만, 대체로 온화한 종들이었고 숲을 조사하면서 일행들도 하루에 몇 번씩도 마주치곤 했다.

공격받은 적도 없었다. 그들은 저보다 큰 인간들을 무서워하며 피하는 습성이 있다. 호전적으로 변했다면 경우는 단 하나.

‘설마.’

다시 꺼낸 마도구는 놀랍게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다. 레벨 1을 표시한 보석을 지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도 검은빛에 먹혔다.

레벨 4.

마경의 초입부에서나 확인될 수치에 맥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금지 구역이라 불리는 늪도 레벨 3에서 머무르지 않던가.

“이게 왜…….”

“맥스, 아나히 챙겨. 업을 수 있지?”

맥스가 아나히를 조심스레 등에 업는 동안, 세이나는 카이만들의 시신을 이곳저곳으로 옮기고 각각의 위에 나뭇잎을 덮었다.

이제 곧 피 냄새를 맡고 마물들이 모여들 것이다. 마물들은 서로의 살도 먹고 취하기에 이 신선한 먹잇감을 놓칠 리 없다.

비록 시간이 없어 조악한 수준으로 숨겼으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가자.”

다시 두 사람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는 맥스. 세이나는 후방을 지키며 주변을 주시했다.

숲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음산하게 바뀌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별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사방이 온통 어둠에 잠겼다.

이어서, 소리.

나무를 오르는 소리. 땅을 박차는 소리. 나뭇잎에 스치고 다음 나무로 건너가 얕은 숨을 한 번. 그리고 다시 다음으로.

‘주시하고 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끼며 세이나는 검의 손잡이를 더욱 꽉 쥐었다.

맥스의 충격은 그대로 아나히에게도 전해진다.

만약 습격이 있다면, 혼자 모두 처리해야 했다. 당장 떠오르는 마물은 역시 핑거티거. 하지만 늪에서 또 어떤 마물이 건너왔을지는 모를 일이다.

마기는 마물을 흉포하게 만든다.

헌터들의 상식을 되새기는 두 사람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오가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지쳤다고는 하나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했다.

마기는 마물을 끌어들인다.

등급이 높은 마물일수록 마기가 짙은 곳을 선호한다.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더 많은 마력을 응축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레벨 3 늪 지역의 마물들이 이 마기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지금도 분명 움직이고 있으리라.

마기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하지만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헌터들은 마물의 서식지에 발을 들이기 전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고 시작한다. 신전의 축복을 받은 그것은 땅의 기운을 흡수하며 빠르게 성장한다.

마기가 짙은 곳에 심어진 씨앗은 마물이 된다.

세이나 일행이 심은 씨앗은 몇 달이 지난 지금 작은 열매가 맺혀 있다. 사람이 먹어도 될 만큼 깨끗하다.

다시 말해, 이 현상은 전조조차 없었다.

“3시!”

세이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측 나무에서 검은 그림자가 휙 스쳤다. 맥스가 숙이지 않았다면 바로 그의 얼굴에 달라붙었을 것이다.

땅에 구른 후에도 작은 원숭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달려들려는 핑거티거를 발로 걷어차며 세이나가 외쳤다.

“계속 달려!”

아나히가 남긴 화살표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방향을 반대로 거스르며 두 사람은 달음박질로 산을 넘어갔다.

한참 달리다 보니 이윽고 흐릿한 빛무리가 보였다. 다시 도착한 야광초 꽃밭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그대로였다.

사람을 빼고.

“큭! 젠장!”

“라울!”

라울은 줄기들에 묶여 바닥을 버둥대고 있었다.

그의 대검은 먼발치로 치워진 지 오래. 붉은 개미들까지 그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장면은 소인들에게 공격당하는 동화 속 거인을 연상하게 했다.

세이나는 급히 검을 움직여 그의 목을 옥죄고 있는 줄기를 끊어 냈다. 그사이, 아나히를 내려 둔 맥스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손에는 라울의 대검. 향하는 곳은 다른 곳보다 조금 볼록 튀어나온 땅이었다.

키에에엑!

검이 바닥에 꽂히자마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맥스는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검을 꽉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 아래의 흙이 움직였으나.

두더지처럼 긴 코를 가진 마물은 땅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스펙터. 맥스와 아나히를 습격한 것과 같은 종이었다.

마물이 죽자 라울을 묶었던 줄기들이 모두 힘을 잃었다. 세이나는 그제야 주변에 있는 다른 스펙터 시체들도 볼 수 있었다.

붉은 개미 마물은 그 피 냄새를 맡고 온 것일 테다.

“루카스는?!”

하지만 작은 소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던 라울이 나지막이 말했다.

“……끌려갔어.”

최악의 전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