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29화 (129/179)
  • @129

    감옥에 갇히는 것은 벌써 두 번째였다.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제법 호화로워졌다.

    방도 넓었고, 추울 때 덮을 짚 더미도 있다. 장소 앞에 ‘황성’이라는 호화로운 수식어도 붙었으며, 구석에 쭈그리고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성가신 감방 동기도 없었다.

    작은 창문 사이로 달빛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운치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이나는 제 발목에 달린 쇠사슬을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젠장.’

    그 외에도 온갖 상스러운 욕이 다 튀어나왔다. 아직도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돌로 된 바닥은 얼음장이었다. 등을 기대자 석벽이 품은 냉기가 그대로 뼈까지 스며들었다.

    - 네가 저지른 짓. 잊지 않았겠지?

    잊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만약 직후 엘렌의 일을 알았다면, 깔끔하게 기억을 날려 준 그 용한 마법사를 소개해 달라 했을 것이다.

    마틴의 말에 지적하고 싶은 점은 또 있었다. 엄연히 말해, 그건 그녀가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의 시점에선 그랬다.

    - 왜 항상 네 주변에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걸까.

    그것도 끼어들고 싶었다. 수도에서 곱게 자란 기사님은 모르시겠지만, 헌터들은 이상한 일에 자주 휘말립니다.

    - 네가 주모자라면 설명이 가능하지.

    기사는 계속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쳤다.

    추리에 추리를 이어 가는 것이 아닌, 시작부터 범인을 세이나로 지정해 두고 짜 맞추는 형국이었다.

    세이나는 지지 않고 기사에게 대들었다. 흥분해서 말은 좀 거칠었겠지만 의미를 알아듣기 힘든 설명은 아니었다고 지금도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 1년 전에 의문스러웠던 부분들이 오늘에서야 이해가 되더군. 너는 그때도 이렇게 빠져나왔던 거야. 그렇지?

    그냥 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그 말이 마틴의 목소리에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기사가 실실 웃으며 방을 떠날 땐 진짜 테이블을 엎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감옥에 들어오는 길.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이제 마음 편하게 잘 수 있겠군.

    비로소 왜 대화가 안 통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기사들은 이 일의 진상을 파헤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조사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족이 소환한 마물이니.

    그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래이시 세르본의 사건이 떠올랐다.

    30여 마리의 마물을 데려온 여자. 그중 몇 마리가 탈출하여 이 소동이 났다고 하면 얼추 앞뒤가 맞다.

    사람들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황성이 아닌, 범인에게로 향하고…….

    “빌어먹을.”

    문제는, 왜 거기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는지였다. 정말 래이시 세르본이 사업을 망친 원한을 자신에게 푼 걸까?

    하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잘 노린 타깃이다.

    몇 년 전 마탑에서 추방당해 수도를 떠난 여자다.

    세이나는 협회의 유명 인사였지만 헌터들 사이에서나 그랬지 거리에서 그녀를 알아봐 다가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헌터인 걸 몰랐을 것이다. 첫 만남에서 이름을 말했을 때도 딱히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설마.

    ‘누가 시킨 건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 래이시 세르본에게 혼자 죽기 싫으면 ‘세이나 로힐’을 부르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래, 그러면 설명할 수 있다. 마틴이라는 기사도 그녀를 범인으로 단정을 짓고 말하는 태도이지 않았던가.

    이건 수사도 청취도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고 있다.

    세이나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누가?’

    그때, 갑자기 빛이 보였다.

    “……공작님?”

    계단을 내려온 횃불이 철창 앞에 서자 비로소 그 주인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큰 키. 어두운 분위기. 라샤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우습게도 그 말부터 먼저 튀어나왔다.

    정작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은 자신인데, 그를 보자마자 걱정스러웠다. 일렁이는 불길이 그의 얼굴에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라샤드는 당장 울 것 같았다.

    유령이 있다며 겁을 줬을 때도 남아 있던 고고함이, 자존심이, 마음이, 전부 무너진 것 같았다. 깊은 패배감에 휩싸인 사내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어도 초라해 보였다.

    “밖은…… 어떻게 됐어요?”

    “내가…….”

    겨우 나온 목소리도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는 차마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세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살 틈으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토닥였다.

    “난 괜찮아요.”

    “…….”

    “처음도 아니니까. 버틸 만해요.”

    하지만 웃음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창살 너머로 손을 뻗으니 죄수가 된 것이 더 실감이 났다.

    아, 난 진짜 갇혔구나. 라샤드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더욱 표정이 나빠졌다.

    위로는 결국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래이시 세르본부터 조사해 봐요. 그 여자가…… 엘렌을 만났을지도 몰라요.”

    이곳에 자신을 넣으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당연히 마족이었다. 이곳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고, 무기가 없어 습격당했을 때 제대로 반항하기도 어렵다.

    래이시 세르본에게 세이나를 지목하도록 명령하기도 쉽다.

    결론을 내리니 아직도 안 찾아온 이유가 궁금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마족은 지금 어깨를 심하게 다친 상태.

    ‘내 피를 원하겠지.’

    아직 남은 봉인을 지워 내기 위해서든, 치유를 위해서든, 혹은 다른 남은 마족을 깨우기 위해서든.

    성녀의 피는 여러모로 마족에게 필요했다.

    하지만 제안에도 라샤드는 답이 없었다.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은 감옥은 그가 없을 때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만날 수 없었어.”

    잠시 후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막혀 있었지. 허락 없이는 만날 수 없다고 날 가로막더군.”

    “허락이요?”

    “유클레스 후작.”

    창살을 붙잡은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들을 때마다 이가 갈리는 이름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자가 황제 폐하의 알현실에 든 이후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고 대신이 전해 줬어. 내가 직접 폐하를 만나 간청했지만…….”

    그의 음성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몹시 지친 기색에선 그의 자책감이 물씬 느껴졌다. 세이나가 다시 손을 뻗은 그때, 라샤드가 고개를 들었다.

    “곧 재판이 있을 거야.”

    그는 허공에 멈춘 세이나의 손을 감쌌다. 불처럼 뜨거운 온도였다.

    “래이시 세르본과…… 아무튼 그 여자의 증인들도 올라올 예정이야. 우리 쪽은 오웬이 준비하고 있어. 저택에서도, 오늘도 함께 있었으니까.”

    S급 헌터면 전문가 중에서도 톱클래스였다. 직접 저택의 지하까지 확인했으니 그의 증언은 큰 도움이 되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데일 협회장도.”

    “회장이요?”

    의외의 이름에 세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라샤드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후작이…… 1년 전 사건을 계속 걸고넘어지고 있어. 그 일에 관한 증인이다.”

    진정하라는 듯이.

    “네게 직접 듣고 싶어서 왔어. 세이나.”

    그의 적안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다. 하지만 늘 있는 흉흉함은 온데간데없고, 어쩐지 애처로워 보이기만 했다.

    라샤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 * *

    헌터 승급은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결정된다.

    모든 헌터들은 F급으로 시작하며, 등록 후 2년이 지나면 고생했다고 의례적으로 E급으로 올려준다.

    거기서부터의 승급은 그동안 수행했던 의뢰의 결과와 기여도에 따라 판명된다.

    승급을 노리는 헌터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러다 목숨을 날리는 이들이 부지기수.

    판단 기준이 기여도인 만큼 고난도 의뢰에 끼어도 높게 평가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첫 승급 심사에서, 세이나는 E급에서 한 번에 C급으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의 이력은 화려했다. 그녀는 단연 ‘몸을 사리지 않는’ 경우였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세이나도 동의했다. 이대로 쭉쭉 올라가면 곧 또 승급하고, 부모님에 관한 정보도 쉽게 모을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일은 그녀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D급은 혼자 C급 마물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통한다. C급부터는 아래 등급 헌터들의 한 팀의 조장을 맡을 수 있다.

    덕분에 헌터가 된 지 3년 차부터 세이나는 조장을 맡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만 등급이 낮은 헌터들은 그녀를 얕잡아 보며 시비를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헌터 업계는 힘의 논리가 통하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세이나는 덤벼드는 이들을 모두 두들겨 팼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습관은 그때부터 더욱 심해졌다.

    속은 상쾌해졌지만, 트러블도 많아졌다.

    의뢰를 수행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녀가 과격하다는 소문이 돌자 팀을 모으기도 쉽지 않아졌고, 갈등을 다스리지 못해 이탈자도 종종 나왔다. C급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툼에서도 배울 점은 있었다. 리더십은, 통솔력은 내 능력이 뛰어나서 거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구나. 어떤 상황이든 대화에는 예의가 필요하구나.

    5년 차가 되니 그럭저럭 할 만해졌다.

    다툼도 줄었고, 시비를 재치 있게 맞받아칠 내공도 쌓였다. 제 수준에 맞는 의뢰를 고를 줄 알게 됐고, 제자도 받았다.

    6년 차.

    승급 심사에 필요한 요건들이 갖춰졌다.

    B급부터는 단독으로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 홀로 B급 마물 다수를 상대할 능력이 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금지된 곳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A급부터는 토벌단의 대장을 맡을 수 있으며, 의뢰비도 더 올라간다. S급은 바라지도 않았다. ‘가장 특별한 헌터’라니.

    세이나는 주제 파악이 빠른 편이었다. 토벌단 대장도 사절이다. 금지된 곳에 들어갈 수 있는 B급까지가, 헌터로서 쌓는 커리어의 최종 목표였다.

    1년 전 여름.

    그때 그녀는 승급을 위한 마지막 의뢰를 앞두고 있었다. 이것만 해결하면 곧 B급이 될 수 있다. 어려운 의뢰도 아니었다.

    동부 지역 식물계 마물 조사.

    말이 ‘동부 지역’이지 의뢰인이 지정한 공간은 어떤 산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큰 산도 아니었다. 등장하는 마물들도 대부분 C급. 대체로 온화한 성격에 식물계니 추격을 위해 뛰어다닐 일도 거의 없었다.

    근처에 위험하기로 소문난 늪이 있긴 하지만 발을 들이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팀이 꾸려졌다.

    D급 2명. E급 1명. 신참 F급 1명.

    F급의 어린 소년은 알고 지내던 마법사의 제자였다.

    마법사는 제자가 담력이 워낙 약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드니 좀 굴려야겠다며 강제로 협회에 등록시키고는 세이나에게 소년을 맡겼다.

    세이나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이번 일이 너무 쉬워서 헌터들을 얕보는 게 아닐까 모르겠네.”

    그리고 석 달 후, 그녀는 그 말을 후회했다.

    그 소년을 절대로 그곳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절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