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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28화 (128/179)
  • @128

    좁은 방에는 창문조차 없었다.

    마치 거대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의 마정석마저 없었다면 이곳은 바로 어둠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세이나는 다시 느리게 눈을 굴렸다.

    ‘대체 뭐지?’

    모험가 협회를 떠난 지 벌써 몇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러나 아직도 오웬의 급박한 외침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 뭐 하는 겁니까?!

    - 황명입니다. 비키세요.

    그리고 기사의 무미건조한 답변도.

    오웬은 격분하여 기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옆에 데일 회장과 이자벨라가 섰다는 것 역시, 놀라울 만한 일이었다.

    이자벨라는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자신들의 동의 없이 협회원을 함부로 데려갈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시 답변이 들려왔다.

    - 황명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주변이 병사들로 둘러싸였다.

    헌터들의 당황스러워하는 시선들을 받으면서 세이나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채운 수갑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철창이 촘촘하게 박힌 수레에 오른 후에야 겨우 할 말이 떠올랐다.

    - 공작님께 연락해 줘요.

    상황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뭐지?’

    답답한 방에 갇힌 후에도 세이나는 좀처럼 제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목을 옥죄는 수갑이 너무 차가웠다. 낡은 의자는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고, 어둠은 무거웠다.

    ‘대체 뭐야?’

    다섯 번쯤 그 질문을 더 반복하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 마틴 홀든스는 조금 전보다는 간소한 복장이었다.

    그래도 허리춤의 검은 여전했기에 세이나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의자가 밀렸고.

    “세이나 로힐.”

    마틴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문은 뒤이어 2명의 병사가 더 들어온 후에야 닫혔다. 마틴이 들고 온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25세. 부모는 없고. 형제도 없군. 7년 전 헌터가 되었고, 기록된 의뢰는 53번. 정식으로 헌터가 된 건 18살인가. 허, 19살에 스칼로 토벌에 참여? 제정신인가.”

    인사치고는 지나치게 무례한 시작이었다.

    기사가 들고 온 것은 그녀가 협회원이 되고 난 이후의 이력이었다. 어쩐지 시간을 지나치게 끌더라니. 협회에서 저걸 가져오느라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매년 레이드에 참여했고, 승급도 평균보다 빨랐군. A급 의뢰도 5개나 되고. 목숨이 여러 개인가?”

    그러나 결국 넘어갔으니 회장에게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사내는 평온한 어조로 그녀의 이력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세이나의 눈빛이 점점 더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리처드 로힐과 올리비아 로힐을 찾아다니고 있고.”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리고 오늘.”

    드디어 짜증 나는 종이가 내려가고 마틴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종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주먹으로 꽉 눌렀다.

    “마물이 집 근처에 나타났지.”

    세이나는 억울해졌다.

    대체 왜 잡혀 왔나 열심히 고민했는데, 고작 저런 이유라니.

    마틴의 ‘근처’의 범위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세이나의 상식에선 옆집만 특정되지는 않았다.

    오늘 마물 근처에 있는 사람만 모은다면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협회 로비에서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던 헌터들만 해도 10명도 더 되지 않던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무슨 배짱으로 그랬지?”

    “뭘요?”

    “C급 마물이라도 레드 켈티르는 위험종이다. 한번 사람 맛을 본 놈들은 계속 마을 근처를 맴돈다지. 사람들도 이미 여럿 다쳤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기사랑 싸우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동안 잠자코 있었는데, 그는 들을수록 이상한 말만 늘어놓았다. 저 매부리코를 확 후려쳐 버리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목적이 뭐지? 혹시 마법사들이랑 협력 중인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레드 켈티르.”

    마틴은 커다란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밉살스럽게 큰 콧구멍을 한번 벌름대더니, 낮게 말했다.

    “네가 데려왔잖아?”

    “뭐!?”

    하마터면 진짜로 후려쳐 버릴 뻔했다.

    수갑에 쇠사슬이 달리지 않았다면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다리는 이미 반쯤 그랬다.

    테이블을 찧은 무릎에 통증을 참으며 세이나가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데려왔다니!”

    머리끝에서 찬물을 통째로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재주로 그 큰 마물을 들여요! 이거! 종이 보면 알잖아요! 난 그냥 평범한 헌터라니까!”

    “헌터니까 마물에 대해서 잘 알겠지.”

    “안다고 데려오면 협회원들 싹 다 용의자겠다!”

    “우겨도 소용없어. 네 공범이 전부 다 불었으니까.”

    “공범!?”

    세이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쿵! 테이블이 떨림을 멈추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아래로 내리쳤다. 쾅!

    “누가!?”

    “래이시 세르본.”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래이시 세르본. 단박에 떠오르진 않았다. 동료도, 친구도 아니었다. 래이시 세르본. 세 번쯤 되새겼을 때 그녀의 눈이 커졌다.

    ‘유령의 집 그 점술가?’

    “그 여자가 모든 것을 실토했다.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 사업을 제안했다며?”

    “뭐!?”

    연이어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래이시 세르본이라니.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 여자가 왜 나를 불러?

    “일단 점을 봐 준다고 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헬트레일의 향기와 마력이 담긴 음료를 줘서 중독시켰고.”

    “…….”

    “그 고객들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마도구를 시중에 팔 생각까지 했다지. 이미 황실 기사단에서 그녀의 저택을 모두 조사했다. 네가 고안한 그 팔찌도 확인을 마쳤어.”

    “…….”

    “헬트레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유혹하고 지배하는 온갖 마물들의 마력을 다 넣었더군. 그걸 차고 있기만 해도 이성을 끌어당기도록. 대가는 착용자의 생명력.”

    마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꺼운 손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숨기려 해도 소용없어, 세이나 로힐. 래이시 세르본도 모두 실토했다. 금지된 실험을 해도 된다고 해서 혹했다고 했지.”

    그녀를 노려보는 마틴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네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그, 그걸 다. 내가 시켰다고 했어요?”

    “이미 목격자도 있어. 래이시 세르본의 피해자들이 저택에서 긴 흑발의 여자를 봤다고 증언했다.”

    “허…….”

    “응? 무슨 배짱으로 그랬지? 협회가 숨겨 줄 거라는 기대라도 한 건가?”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여자일 줄은 알았지만, 여기서 자신을 끌어들일 줄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그녀의 사업을 망친 것에 대한 보복인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나?

    너무 황당해서 떨림이 멎지 않았다. 힘들게 뱉은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내, 내가 아니에요.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실험을 막으려고 했어요! 그 저택을 발견한 사람이 나예요!”

    “거짓말 마.”

    “공작, 칼만 공작님이 나랑 같이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물어봐요! 난 아니야! 신께 맹세코…….”

    “1년 전에도.”

    가라앉은 저음이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세이나는 일순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마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했지. 세이나 로힐.”

    맞물린 이 사이로 거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주먹을 더욱더 세게 말아 쥐었다.

    “네가 저지른 짓. 잊지 않았겠지?”

    * * *

    다행히 공작저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저기요! 잠깐만요!”

    오웬의 얼굴을 알아본 어린 문지기는 당황하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리 집주인의 지인이라지만 이렇게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옳지 않았다.

    오웬은 저택을 다 부술 기세였다.

    쾅!

    그리고 그가 마침내 공작의 집무실 문까지 발로 걷어차자 문지기는 끔찍한 표정이 되었다.

    집주인, 칼만 공작을 발견했을 때는 졸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안 됩니다!”

    거침없이 달려가는 오웬을 붙잡은 것은 순전히 본능이었다. 비록 허리를 끌어안은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어찌 되었든 최악은 면했다.

    붉은 머리 남자는 칼만 공작의 멱살을 틀어잡을 기세였다. 여기까지 내버려 두면 진짜 죽는다!

    그런 문지기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오웬은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공작의 옆에 있던 늙은 집사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 이 무슨 짓입니까!”

    “나가 있게.”

    소동은 꽤 길게 이어졌다. 급하게 오웬을 뒤따라오던 하녀들이 도착했고, 다른 병사들이 더 뛰어 들어왔다.

    집주인의 냉엄한 명령이 없었다면 오웬은 그답지 않게 다수를 상대로 싸움판을 벌였을 것이다.

    단둘만 남은 후에도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래이시 세르본이 세이나를 끌어들였어.”

    그렇게 말하고 라샤드는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으며 제 얼굴을 감쌌다.

    “폐하는……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다. 저녁 늦게라도 다시 찾아갈 생각이야. 전해 듣기로는 일단은 참고인 조사차…….”

    “하, 참고인에게 수갑을 채웁니까?”

    “뭐?”

    “황명이라더군요.”

    라샤드가 놀라 오웬을 바라보았다.

    오웬은 짓씹듯 말했다.

    “황제 폐하가 엘렌에게 세뇌당했을 겁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확신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라샤드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럴 리 없어.”

    “지금 그딴 소리가 나오…….”

    “칼만 공작가의 반지 외에 또 반지를 보유하지 않은 가문이 있지.”

    “네?”

    “아스타 백작.”

    먼 옛날 숲지기였던 가문의 이름이었다. 초대 칼만 공작을 도운 것을 계기로 그의 종자가 되어 마족을 몰아내는 것에도 일조했다.

    “20년 전. 백작이 가문의 반지를 황제 폐하께 진상했다.”

    이후로도 대대로 칼만 공작가와 우호적인 관계인 것을, 오웬은 기억하고 있었다.

    “가문의 반지는 그저 봉인석이 보관된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 아니야. 성녀의 힘을 받았기 때문에 소유자를 축복하지. 백작은 폐하의 병을 염려해서 반지를 바쳤다.”

    “왜 더 일찍 말하지 않았습니까?”

    “폐하의 병환은 극비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그제야 오웬은 라샤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반지는 소유주를 마족으로부터 보호한다.”

    성황이 자신에게 반지를 넘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니까.

    “폐하는 절대로 세뇌에 넘어가지 않는다. 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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