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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27화 (12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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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들게 입을 열었건만.

    오웬은 벌써 그녀를 지나친 뒤였다. 그리고 떨어진 후에도 세이나가 뒤에 멈추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아주 무시하고 있거나. 그는 세이나가 멍해진 후에도 계속 앞서 나갔다.

    ‘나와 걷기 싫은 건가.’

    그래도 걸음이 그리 빠르지 않아서 그렇게 멀어지진 않았다. 세이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 그녀의 뒤에서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퍽!

    “죄송합니다!”

    어깨를 빠르게 치고 간 소년은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너무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세이나는 하마터면 밀려 넘어질 뻔했다. 일순 멍해졌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놀란 오웬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세이나는 뒤늦게 어깨를 매만졌다. 부끄러웠다. 기척도 못 느끼다니. 심장이 아프도록 쿵쿵 뛰는 것도 놀라움보단 그런 이유가 더 컸다.

    “다쳤어?!”

    “아, 어, 그게…….”

    바보처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오웬은 그녀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큰 손은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다.

    반사적으로 어깨 부근을 붙들고 확인하려다 예의 때문에 멈춘 것처럼 보였다.

    “괘, 괜찮아요.”

    “하.”

    “……그리고 미안해요.”

    가까스로 말한 후에도 그의 손은 계속 떠 있었다.

    곧 침묵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크게 떴던 회색 눈이 점차 작아지며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뭐가 미안한지 더 설명하고 싶은데, 다시 입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힘겹게 정리한 생각들을 소년에게 통째로 빼앗긴 기분이었다.

    사고가 멈췄고, 세이나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오웬의 손이 움직였다.

    바로 세이나의 머리 위로.

    “화 안 났어.”

    살짝 머리칼을 헝클이는 손길에 세이나는 다시 그를 보았다. 이상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읽어내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가볍게 웃고 있는 오웬은 그 어느 날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디온과 말싸움하는 그를 유치하다고 여러 번 생각해서일까. 벌써 수백 번도 마주쳤을 눈빛이, 목소리가 너무나도 새롭게 다가왔다.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내가 마족 앞에서 쓰러졌던 것, 기억하지?”

    세이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일족은 마족에게 종속되어 있어. 특정한 1명이 아닌, 모든 마족에게. 디온 프라벨도 다르지 않겠지.”

    그러고 오웬은 손을 거두었다.

    “그런데 녀석은 그렇게 안 다뤘단 말이야.”

    “……네?”

    “마법을 썼지. 내기에도 응했어. 아, 공작님이 일기장을 가져왔던 날 말하는 거야.”

    세이나가 협회에서 울면서 돌아온 바로 그날이었다.

    오웬은 결백을 주장하며 만약 자신이 틀렸다면 디온이 하인처럼 제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디온은 승낙했지. 내기에 지긴 했지만.’

    살벌한 눈빛을 쏘아 보내면서도 오웬이 시키는 대로 했었다. 그가 다시 차를 끓여 올 때는 세이나도 라샤드도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상하지. 내가 그렇게 싫었다면 그냥 눈을 보고 꺼지라고 하면 될 텐데. 세뇌나 최면을 쓸 필요도 없어. 나는 놈들이 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니까.”

    “음…… 그렇네요.”

    “진심으로 날 내쫓고 싶어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둘 중 하나지. 마족으로서 완전하지 않거나. 좀 우스운 말이지만, 녀석이 인간적인 마족이라서 날 강압적으로 다루는 것을 꺼렸거나.”

    “만약에 후자라면…….”

    세이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믿고 싶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 오웬의 앞에서는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후자를 먼저 언급해서 기분이 상했을까.

    “천천히 생각해 봐.”

    그러나 예상과 달리 답변은 부드러웠다.

    말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이자 오웬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말해 주면 고맙고.”

    “말할게요.”

    화가 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운함이 없진 않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세이나는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꼭. 말해 줄게요.”

    “그래.”

    다시 따뜻한 손길이 세이나의 정수리를 쓸었다. 그녀와 비슷한 웃음을 입가에 걸며 오웬이 말했다.

    “가자.”

    어느덧 협회가 코앞이었다.

    * * *

    협회에 들어선 이후에도 비슷한 대화가 들렸다.

    “그거 봤어?”

    “레드 켈티르? 너도?”

    “진짜 그거였어? 몇 마리나?”

    “어마어마하게 크던데? 3m도 넘었어!”

    ‘레드 켈티르’라면 엘렌의 옆에 있던 늑대를 일컫는 것이 맞았다.

    도망치는 이들 중 헌터는 없었던 것 같았는데. 제 눈으로 본 것처럼 묘사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내 이웃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3층 건물 정도 크기라며?”

    “그거 켈티르 맞아? 변종 아니야?”

    그리고 실시간으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집된 모양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많네요.”

    세이나와 오웬은 더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서성였다.

    로비는 헌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는 얼굴도 많았지만 그만큼 모르는 얼굴도 꽤 보인다.

    헌터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차마 발을 움직이기도 무서웠다. 저 안으로 들어갔다간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놀라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자 또 그 소리가 나왔다.

    “집채만 한 늑대였어! 확실해!”

    세이나는 오웬을 향해 살짝 몸을 기울였다.

    “켈티르 말고 다른 마물 언급은 없는 것 같은데요? 다른 곳에 피해는 없나 봐요.”

    하지만 답은 없었다.

    오웬은 양쪽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멀리 있는 작은 소리도 들릴 만큼 예민한 청각이니 사람이 많은 곳은 고통스러운 듯했다.

    세이나는 바로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안나가 종종 땡땡이치는 커다란 안내판 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말의 파도가 웅웅거림으로 바뀐 후에야 오웬은 겨우 손을 떼어 낼 수 있었다.

    “하, 살았다.”

    “안색이 안 좋은데, 나갈까요?”

    “이 정도면 괜찮아. 견딜 만해. 뭐라고 했었어?”

    “아, 다른 곳에는 마물이 안 나타난 것 같아요. 레드 켈티르 말밖에 없어요.”

    “아직 힘을 다 되찾진 못했겠지.”

    “전에 말했던 맬빈과 봤던 옛날 마탑주의 일기에 따르면…… 후작은 마족의 혼을 분리해서 엘렌의 몸에 정착시킨 거겠죠?”

    “그래. 피는 아직 못 얻었을 테고…….”

    오웬은 짓궂게 웃었다.

    “앞으로도 못 얻을걸? 우리 성녀님은 불사신이셔서.”

    “그거 하지 말라고 했죠!”

    “왜? 멋진데?”

    툭 팔뚝을 때려도 그는 계속 히죽거렸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건지. 세이나는 약이 올랐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편해진 듯해서 더 투덜거리지는 못했다.

    오웬은 팔짱을 끼고 안내판에 기대었다. 내려다보는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또 있어?”

    “뭘요?”

    “별명.”

    “절대 안 알려 줄 거예요.”

    “아, 뭐가 또 있긴 하구나?”

    세이나도 그를 보며 팔짱을 끼었다. 절대로 안 알려 주겠다는 거부감의 표현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웃음을 유발하고 말았다.

    그가 나른하게 눈을 접으며 하나씩 별명을 읊었다.

    달리기가 빠르니까 금빛 눈의 늑대. 튼튼하니까 무적의 철벽……. 온갖 유치한 이름들이 다 쏟아졌다. 그러나 잠자코 듣던 세이나도 ‘검은 사신’에서는 참지 못했다.

    “윽, 그렇게 불리면 헌터 때려치워야지.”

    “그렇게 별로야? 그럼 승리의 여신은?”

    “흐음, 창의력을 좀 더 발휘…….”

    그 순간, 갑자기 옆이 조용해졌다.

    줄곧 오웬만 응시하던 세이나의 시선이 안내판 너머로 향했다. 몸을 더 기울이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오후의 창백한 햇살 속 서 있는 남자도.

    상처가 많은 험상궂은 얼굴. 갈색 머리칼.

    거구의 남자는 박힌 듯 입구에 멈춰 있었다. 등장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존재감.

    ‘데일 프라벨.’

    모험가 협회장의 등장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곧 그의 옆에 마찬가지로 키가 큰 여자가 나타났다.

    회장의 여동생, 이자벨라 프라벨은 오늘도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미간이 확 좁아졌고, 회장의 한쪽 눈썹도 치켜 올라갔다.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왜 다 모여 있지?”

    정적.

    오직 그것만이 협회 로비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두리번거렸지만, 감히 입을 열진 못했다.

    너무 의외의 발언이라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그녀도 그랬으니까.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참지 못해 나선 이는 오웬이었다.

    “‘새’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뭐?”

    그의 설명에도 데일 프라벨은 영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협회장의 얼빠진 얼굴은 흔치 않았지만, 지금은 그걸 즐길 여유가 없었다.

    회장이 재차 물었다.

    “내가?”

    “그럼 회장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새’를 보냈다고?”

    “인장도 있었습니다!”

    우렁찬 외침은 군중 속에서 나왔다.

    저도 받았습니다! 저도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목소리들이 오가더니 곧 작은 종이들이 흔들렸다.

    세이나도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 필체. 인장.

    회장이 틀림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데일 프라벨도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달랐는데, 그녀는 곧 뭔가를 깨달은 듯 데일을 돌아보았다.

    “오빠, 설마 디온이…….”

    그때였다.

    “아아, 실례합니다.”

    돌연 회장의 뒤에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회장과 엇비슷, 아니 그보다 조금 큰 사내가 로비를 둘러보다 중얼거렸다.

    “오, 진짜 다 모여 계시네?”

    “뭔가?”

    “아, 처음 뵙겠습니다. 데일 협회장.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 마틴 홀든스라고 합니다.”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은빛 갑주. 어깨에 두른 붉은 망토가 그 증거였다.

    인사를 마친 그는 회장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협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기사가 왜…….”

    “여기 세이나 로힐 씨 계십니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웬도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세이나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에 그녀를 찾아낸 것은 비단 오웬뿐만이 아니었다.

    헌터들의 동시에 시선이 안내판으로 모였다. 기사가 씩 웃었다.

    “아, 저분인가 보군요.”

    그렇게 되자 바로 모습을 감추기도 어려웠다. 짐작이 가는 바도 있었다.

    ‘혹시 공작님이 보냈나?’

    세르본 부인을 만나러 황실 기사단을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야기가 끝났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기사가 그녀의 앞에 이르렀다. 뒤에는 갑옷 입은 병사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었다.

    그중 1명이 앞으로 나섰고.

    “흠흠, 세이나 로힐. 당신을…….”

    철컥.

    무거운 수갑이 그녀의 손목에 채워졌다.

    “황명에 따라 체포합니다.”

    세이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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