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26화 (126/179)
  • @126

    그도 마족이니까.

    오웬의 건조한 목소리를 곱씹으며 세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소름 끼친다고 입에 달고 다니던 바로 그 존재.

    디온은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들었다.

    ‘디온 프라벨은 마족이다.’

    세이나는 아직도 그가 후작을 돕고 있다고 말했을 때의 배신감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때 치밀어 오르던 감정을. 평소답지 않게 격분하여 말을 쏟아내던 자신을.

    하지만 세이나는 그에 대한 걱정 역시 멈출 수 없었다.

    내 말에 상처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워할 수도 없었다.

    오웬이 한번 더 그녀를 일깨운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서 그의 진심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두고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다시 찾아간 정보상의 은신처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험상궂은 덩치의 손님들도, 갈래머리 작은 소녀도 나타나지 않자 세이나는 결국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기억이 책이었다면 너무 많이 회상해서 닳아 너덜너덜해졌으리라.

    그러나 이전과 달리 이제 세이나는 왜 자신이 도망치듯 떠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성녀니까.’

    그리고 그는 마족이다.

    아주 먼 옛날, 그녀와 같은 피를 가진 여자가 그를 봉인했다.

    마력과 성력. 서로 반발하는 힘을 그때 자신은 느낀 것이다.

    비로소 왜 자신이 마물을 쉽게 찾아낸 것인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세이나는 그들의 어두운 마력에 극도로 예민했다.

    불길한 곳으로 발을 향하다 보면 어김없이 마물과 만났다. 그러니…….

    자신이 디온을 피한 것도 당연하다.

    ‘젠장.’

    다시 생각해도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었다.

    서로 반발하는 존재. 가까이 붙어 선 것만으로도 성녀인 그녀는 디온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다.

    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한번 자각한 이상 이전과 같기는 어려웠다. 성녀란 이름은 일종의 의무와도 같았다.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마족을 봉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전에 말했듯, 그녀는 꽤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헌터라는 직업의 영향도 있었다.

    마족은 마물의 부모 같은 존재. 그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더 많은 마물이, 더 많은 사상자가 나타날 것이다.

    세이나는 이미 머리로 자신이 마족을 봉인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성녀인 걸 알고 있을까.’

    그럼 과연, 디온은 어떻게 행동할까.

    “디온 프라벨도 후작이 깨운 마족일까요?”

    맬빈의 질문에 오웬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엘렌의 경우처럼 디온 프라벨의 몸에 마족의 혼을 넣었을 수도 있고.”

    “일단 엘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건, 그도 세뇌를 쓸 수 있다는 뜻이겠군요. 그가 황궁 마법사들을 유혹해서…….”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

    끼어든 이는 라샤드였다. 오웬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세르본 부인.”

    “예?”

    “그녀가 헬트레일의 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으지 않나.”

    아래로 처져 있던 세이나의 어깨가 바로 선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제기된 새로운 추측에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네요. 황실 마법사 중 그녀의 고객이 있었으면 묻는 대로 다 답했을 거예요.”

    “맞아.”

    “세르본 부인은 마력이 봉인되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 회복했다고 해도, 황실 마법사가 그녀에게 당할 리가 없습니다. 헬트레일의 마력을 썼다고 해도 고작 B급입니다.”

    오웬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다시 세이나는 우울해졌다.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라샤드가 그런 그녀를 보다가 가로 저었다.

    “……아무튼 디온의 짓이라고 단정 짓긴 어려워. 아직 봉인석이 하나 더 남았기도 하고. 다른 마족일 수도 있지.”

    “네, 네! 그렇죠!”

    “일단 구금된 세르본 부인을 만나야겠군. 황실 기사단을 찾아가야겠어.”

    저번 사건 이후 세르본 부인은 계속 황성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기사들이 강하게 그녀를 심문했으나 어떤 답변도 하지 않는다고 세이나도 며칠 전 라샤드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폐하도 알현하고 돌아오지.”

    라샤드가 옆에 있던 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오늘 일은 보고할 생각이야. 엘렌이 바뀌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 내가 증인이지. 이 정도면 후작을 잡아들일 명분도 있다고 생각해.”

    “마탑도 도울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여자 마족이 저를 봤으니, 더는 후작의 졸개 연기도 못 할 테니까요.”

    “그래. 그동안은…….”

    라샤드는 가죽 장갑을 끼다 말고, 그가 세이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망설이는 걸까.

    세이나가 고개를 갸웃할 무렵 그가 낮게 말했다.

    “세이나.”

    “네?”

    “……공작저에, 머무는 건 어때?”

    왜 뜸을 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라샤드는 세이나에게 이 집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장본인이었다.

    이제 누군가 쳐들어와서 집을 내놓으라고 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세이나가 이 공간에 갖는 애정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엘렌의 마족, 스키아는 그녀가 성녀임을 알아차렸다.

    세이나의 피를 노릴 것임이 충분히 예측되는 상황이기에 이후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냥 생각하기에도 공작저는 방어를 위한 좋은 공간이다.

    기사들도 있고, 마족의 발을 붙들기 위한 마법 함정들을 설치한다면 공작저 같은 넓은 공간이 변수를 만들기에도 더 쉽다.

    다른 저택들이 그렇듯 몰래 빠져나갈 비밀 통로도 있을 것이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던 세이나의 머릿속에 문득 디온의 말이 스쳤다.

    - 세이나. 엘렌과 엮이면 안 됩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눈물은 성녀 혹은 마족을 만났을 때 반응한다. 그는 후작의 사람이니 엘렌의 정체를 이미 마족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이나는 천천히 공원에서 그가 한 말을 돌이켜 보았다.

    그래서 왜 그렇게 걱정하냐고 말했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엘렌을 데려가겠다고 한 이유도.

    - 당신이 위험해져도 괜찮아요?

    ‘혹시 나를 위해서…….’

    그때였다.

    “저게 뭐지?”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방해했다.

    라샤드를 따라 시선을 돌린 창가에는 2개의 빛이 맴돌고 있었다. 마치 밤에 나타난 반딧불 같은 형체였다. 비록 지금은 낮이긴 했지만.

    그리고 열심히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툭, 투툭. 툭.

    소리가 연거푸 이어지자 라샤드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세이나는 재빨리 그를 저지했다.

    “잠깐만요. 아는 마법이에요.”

    “무슨…….”

    창문을 연 것도 그녀였다. 실내로 들어오자 빛의 모양이 더 확실해졌다. 허공을 가로지른 것은 바로 빛의 새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크게 한 번 원을 그리더니 곧 세이나의 손으로 떨어졌다. 뒤이어 들어온 새는 오웬의 몫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새들은 작은 종이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었다.

    흘려 쓴 글씨 아래 모험가 협회의 인장을 보던 세이나가 종이를 움켜쥐었다.

    “가 봐야겠어요.”

    혼란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 * *

    집을 나설 때쯤엔 거리에 사람들이 꽤 보였다.

    집 앞. 구석진 골목. 분수대 앞. 벤치 옆. 모인 이들은 모두 열띤 토론을 이어 가고 있었다. 대부분 “그거 봤어요?!”에서 시작해서 저마다 경악이 담긴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세이나와 오웬은 그런 혼잡한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품속에는 창문을 두들긴 빛의 마법이 남긴 종이가 있었다.

    @긴급 상황. 수도에 있는 헌터들은 협회에 집합 바람[email protected]

    ‘새’는 모험가 협회장, 데일 프라벨이 소유한 마도구였다.

    마법 폭발로 멸망해 버린 마법 도시가 남긴 유물. 듣기론 도시의 장로들이 저들끼리의 원거리 연락 수단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모래에 덮인 도시의 폐허 속에서 발견했다고 했던가.

    아직 그 원리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마법사들은 ‘새’를 전설로 여겼다. 그리고 투덜거렸다. 집에 그냥 전시해 둘 거면, 마탑에 기부할 것이지!

    그 말 그대로, 데일은 ‘새’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최초의 사용은 세이나의 부모님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작이 그래서인지 ‘새’는 헌터들 사이에서 불길함의 상징으로 통했다.

    아마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보 공유를 위해서일까?’

    오늘의 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이는 기사, 그다음으로 많이 받는 이는 아마 헌터일 것이다.

    어떤 마물인지부터 시작해서 왜 나타났는지, 마물 전문가로 알려진 그들에게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회장이 직접 토벌에 나설 셈?’

    초겨울 헌터들은 대부분 집, 혹은 협회 근처에 남아 있다.

    마물들도 날이 추워지면 동면을 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수도에 있는 헌터들을 다 모은다면 협회를 꽉 채울 것이다.

    오늘 뭔가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오웬의 의견은 어떨까?’

    그러나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함께 집을 나선 이후부터 계속 이랬다.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맬빈에게 같이 가자고 물었으나 그는 무너진 엘렌의 집을 조사하고 싶다고 하며 거절했다.

    ‘내게 화가 났겠지.’

    디온이 후작의 부하일 리 없다고 소리쳤다.

    엘렌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세이나는 그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할 정황이 너무나 많음에도 무작정 부정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아직도 디온이 모두를 속였다는 생각만 하면 심장이 죄는 기분이었다.

    나를 바보 같다고 여기겠지. 그래도 할 말은 없었다. 오웬은 누구보다도 마족을 잡고 싶어 했다.

    마족의 손짓 한 번에 바닥에 이마를 찧지 않았던가.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가. 의자에 묶이고도 꺼지지 않던 기세가 마족의 앞에서 맥없이 무릎 꿇리고 말았다.

    사과해야 한다.

    세이나는 긴 고민 끝에 걸음을 멈췄다.

    “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