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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믿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거기까진 적혀 있지 않아.”
“그 여자는요?”
맬빈이 매서운 눈빛으로 오웬을 돌아보았다.
“엘렌 안에 들어 있는 마족 말입니다.”
“……사라진 마족은 셋. 그중 여성형은 단 1명이야.”
또 페이지가 넘어갔다. 역시 이전에 본 적 있는 그림이었다. 원 안에 갇힌 검은 괴수. 33개의 보석.
그러나 저번과 달리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은 심장이 아닌 눈이었다. 세이나는 거기에 쓰인 작은 글을 읽어냈다.
“스키아.”
“그 뒤에 있던 괴물은? 이름이 뭐지?”
“……그게, 애매합니다.”
라샤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그 둘은 한눈에 봐도 너무 다르지 않았습니까. 둘 다 마족이라기엔…….”
“뒤에 놈은 마족이 아닐 겁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맬빈에게 모였다. 그는 책을 여기저기 뒤적이고 있었다.
“여기에는 내용이 없군요.”
“뭐?”
“방금 말한 세뇌 말입니다. 저도 일전에 스승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라미아라는 마물을 설명할 때였죠.”
아는 이름의 등장에 세이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원하는 걸 찾아내지 못한 맬빈이 결국 책을 덮으며 말했다.
“라미아는 사람을 유혹하고 지배하는 마물입니다. 제 추종자들을 만들고 거느리는 걸 즐기죠. 마족들을 흉내 내는 거라더군요.”
그러고 그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아이는 부모를 모방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요?”
“라미아는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그를 노예로 만들 수 있죠. 시킬 수 있는 행동에도 제한이 있다더군요. 하지만 마족은…….”
그와 세이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맬빈은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그저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더군요.”
끼어든 이는 라샤드였다.
“첫눈에?”
“잘 풀리면요. 엘렌…… 아니, 스키아를 보면 아시겠지만 보통 마족들은 미형입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사람을 현혹하죠.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외모라고 합니다.”
“잘…… 풀린다는 건?”
“사람은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짝이 있는 경우엔 양심 때문에 아예 외면하기도 하죠. 그럴 땐 먼저 다가간다고 들었습니다.”
맬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름다운 이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데, 누구든 한 번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세이나는 계속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에게 더 물어볼 것이 있어서도, 그가 이상하게 보여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의식은 다시 그날, 집 앞 거리를 서성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 앞으로 다가오자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엘렌을 향해 말했다.
- 좋아합니다.
제일 처음부터.
세이나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이미 눈치챘으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버겁기만 했다.
“유혹으로도 어려우면 불쌍한 척해서 동정심을 산다고도 하더군요. 마음을 흔들고 그 틈에 세뇌를 거는 겁니다.”
그제야 엘렌의 이상한 행동도 파악이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고 했던가.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일 줄은.
“재산, 명예, 가족,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조차 모두 그에게 바치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말려들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죠. 말하자면 뭐, 얼굴이 설득력이라는 의미죠.”
기억 속 디온이 환하게 웃었다.
파란 눈의 미남. 그는 제 고모의 약혼자까지 유혹해 버린 전적이 있었다. 안나는 너무 대단하다고 연신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했기에.
세이나는 굳이 그 사실을 그에게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 그 남자는 한없이 다정했으니.
나에게만 잘하면 됐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분명 했었다. 그들의 약혼을 깬 이야기도 또 다른 이면이 숨겨져 있으리라. 어쩌면 오해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들을 세뇌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조심성이 없었다.
함께 탐지 부서의 방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전혀 주변을 살피지 않고 나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언제든 빠져나갈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니야.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을 거야.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이면에서는 의심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그 고백도, 장황한 설명도, 안쓰러운 얼굴도 모두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그 이후도, 모두 거짓말이었을까.
‘진심이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있긴…… 했을까.
그녀가 혼란에 빠진 사이 맬빈이 말을 이었다.
“엘렌의 뒤에 있던 그것 역시…… 첫눈에 반한다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첫눈에 꺼림칙한 건 알겠더군. 그래서 보자마자 쫓았었지.”
“혹시 엘렌처럼 마족의 혼을 넣은 케이스일까요? 마족은 서로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엘렌은 외적으로 마족과 거리가 머니까 세뇌로 확인했던 거겠죠.”
“글쎄, 그렇다기보단…….”
라샤드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족이 만든 생명일지도 몰라.”
“마족이 만들어요?”
“그것이 남긴 일기가 있었지. 엘렌이 피를 줬다고 적혀 있었어. 어린 엘렌의 몸에 마족을 심어 두고, 그 마력과 피로 마물을 만들었겠지.”
그는 그러고 오웬을 보았다.
“‘라프만’처럼.”
오웬은 세이나처럼 어느 순간 말이 없어졌다. 대화에 따라오는 듯 반응은 했지만 계속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깊은 생각을 하는 눈이었다.
“아무튼, 하, 진짜 거지 같은 타이밍이네요.”
맬빈이 완전히 지친 얼굴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긴 한숨에 세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가요?”
“이틀 전에 황성에서 열린 회의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계속 집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그동안 말 못 했네요.”
그러고 맬빈은 라샤드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이 작게 끄덕이자, 마탑주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클레스 후작이 수도의 결계를 살릴 수 있다고 하더군요.”
* * *
세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후작이 마법사였어요?”
“아닙니다.”
맬빈은 단호하게 말하곤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마법을 쓰더군요. 잘. 저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중앙 결계를 손볼 수 있도록 황실 마법사 자격을 달라고 했지.”
“미친 소리죠. 중앙 결계는 마탑주인 저도 손댈 수 없습니다.”
세이나는 구겨진 맬빈의 얼굴에서 경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여과 없이 후작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번 같은 예외 상황이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못 봤을 겁니다. 그런데, 평생을 비마법사로 살아온 후작이 결계를 살릴 수 있다니요.”
그리고 묘한 굴욕감도.
평생 비마법사로 살아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마탑주인 자신은 할 수 없다. 자존심이 팍팍 상하는 모양이다.
세이나가 그를 안쓰럽게 보다 말했다.
“마족의 영향이겠네요.”
“너는 어떻지?”
가볍게 물은 이는 라샤드였다. 맬빈이 미간을 좁히며 가로저었다.
“못 살립니다.”
“왜?”
“저도 원인을 모르니까요.”
세이나가 갸웃했다.
“단서조차 없나요?”
“제가 크흠,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저는 아티팩트와 마도구에서는 꽤 인정받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아닌, 장인으로 마탑에 들어와서 마탑주가 된 최초의 사례라던가?”
“오, 그래요?”
“황실 마법사들이 절 직접 찾아와서 중앙 결계를 구성하는 마도구들을 봐 달라더군요. 제 눈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 참고로 저도 거짓말 아닙니다. 진짜예요!”
“황실 마법사들은?”
“그들의 마법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남은 건 마정석이군.”
“수도에 있는 모든 최고급 마정석들을 동원해도 소용없었습니다. 황실 마법사들은 최선을 다했어요. 얄미운 작자들이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인정합니다.”
황실 마법사들은 세이나도 전해 들어 조금 알고 있었다.
하나같이 건방지고 오만하다던가. 우연히 그들과 함께 토벌에 나섰던 헌터가 툴툴거렸던 기억이 났다.
“게다가 중앙 결계 마법 진의 구조는 대마법사의 후손들에게만 전해집니다. 오직 그들만이 결계를 해석하고, 또 다룰 수 있죠.”
“그래서 후작이 나선 게 말도 안 되는 거군요.”
세이나가 다시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셨어요?”
“거절하셨지.”
“수도의 결계는 지력이 높은 마물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입하는 경우를 방비해 만들어진 겁니다. 지금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죠. 폐하께서는 결계의 소실을 인정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실로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후작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진 것에서 세이나는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껏 미소 짓지 못했다. 그녀가 우울하게 말했다.
“……그 결정도 오늘 바뀔 수 있겠네요. 수도에 마물이 나타났으니.”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지.”
“우리가 모르는 인명 피해도 있었을 거예요.”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겪는 것과 모르는 상태에서 겪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한동안 여론이 좋지 않겠어.”
세이나가 조심스레 맬빈에게 물었다.
“혹시 결계에 관한 정보가 유출된 걸까요?”
“황실 마법사들은 그럴 리 없다고 격분했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세이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엘렌 안의 마족이 황실 마법사를 세뇌했을까요?”
“글쎄요. 이제 막 깨어났으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디온이.”
세이나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오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디온 프라벨이 했을지도 모르지.”
차갑게 식어 있는 회색 눈으로.
“그도 마족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