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24화 (124/179)
  • @124

    수도 한가운데서 나타난 마물은 수도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가장 바빠진 이들은 당연히 병사들이었다.

    소집될 수 있는 모든 인원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은 제집의 문을 걸어 잠근 채, 거리를 누비는 갑옷 입은 자들을 훔쳐보았다. 혹 비명이 나올까 봐 촉각을 곤두세웠다.

    늘 활기가 넘치던 수도에 유례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장은 안전을 위해 문을 걸어 잠갔을 뿐. 해답을 찾지 못한 의문은 닫힌 방 안에서 계속 들끓고만 있었다.

    왜 수도에 마물이 나타났는가.

    기사들은 아직 마물이 돌아다닐지도 모르니 안내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겁을 먹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대체 뭘 하고 있었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어떤 집에는 도망치다 넘어진 환자만 넷이었다.

    하지만 끝에 던져지는 건 결국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왜.

    세이나 로힐은 창문가에서 떨어지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다.

    불안하여 두리번거리는 이웃들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꽤 차분했다. 팔짱을 끼고 버티듯 똑바로 서서, 단 한 지점만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옆집.

    “앞으로 더 바빠지겠군.”

    라샤드는 지친 안색으로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으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힘겨워 보였다.

    “젠장, 생에 이런 굴욕은 처음입니다.”

    맬빈은 완전히 지쳐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족이니까.”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앉은 오웬은 반쯤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는 표정으로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마력은 마족의 것.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그럼 뭐가 통합니까?”

    “성력.”

    그러고 오웬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성녀.”

    세이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계속 커튼 밖만 쏘아보고 있었다. 대답 없는 옆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동안의 정적 후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커다란 책과 함께 거실로 돌아왔다.

    언젠가 세이나에게 보여 줬던 페이지가 열렸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오웬이 가리킨 곳으로 쏠렸다.

    단 한 사람. 세이나를 빼고.

    “폴리시아어로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손끝이 페이지 한구석 삽화 아래 글을 가리켰다.

    삽화 속에는 작은 악마. 얼굴을 가린 손을 타고 뭔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군요.”

    “마족의 마력은 다양하게 발현됩니다. 마물을 만들기도 하고, 인간처럼 마법을 쓸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렇게.”

    삽화 바로 위에는 또 다른 삽화가 있었다.

    작은 악마의 손짓에 따라 건장한 청년이 개처럼 네다리로 걷는 장면이었다.

    “세뇌도 가능합니다.”

    “암시 같은 건가?”

    “맞습니다. 그리고 세뇌가 실패했을 때…… 눈물을 흘립니다.”

    다시 침묵이 그들을 짓눌렀다.

    고작 몇 분 전, 여기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엘렌은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엘렌이 세이나에게 세뇌를 건 겁니다. 그리고 실패해서 눈물을 흘린 거죠. 세뇌가 실패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같은 마족이거나, 혹은.”

    세 남자가 동시에 세이나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라샤드가 한숨처럼 말했다.

    “……결국 엘렌이 마족이었군.”

    “정정해 주세요. 엘렌의 안에 마족이 있는 겁니다.”

    맬빈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렌에서 마족으로 변하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몸은 엘렌입니다. 마족의 혼이 그녀의 안에 들어간 거고요. 일기에 써진 연구를 엘렌에게 행한 겁니다.”

    “기억을 지우기 전, 엘렌이 뭐라고 했었지?”

    “모든 걸 잊고 싶다고 했죠.”

    그러고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제 이마를 매만졌다.

    “살고 싶다고.”

    “엘렌을 빼돌린 것도 너인가?”

    “네. 후작이 못 찾도록 영지에서 아주 멀리 보냈습니다. 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게 했죠. 혹여 저를 찾아왔다가 후작과 마주쳐서는 안 되니까요.”

    짜증이 물러난 맬빈의 얼굴 위로 슬픔이 번졌다.

    “수도에 온 것을 알았을 땐 어찌나 놀랐는지. 몇 번 겁을 줬는데도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네가 도둑을 보냈군.”

    “엘렌이 수도 밖으로 가길 바랐습니다.”

    맬빈은 거칠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엘렌 안에 마족이 있는 건 저도 몰랐습니다.”

    “후작의 짓일까?”

    “……장담할 순 없지만, 그럴 겁니다. 엘렌이 사라졌을 땐 반쯤 미치더군요. 하, 그때 저는 그놈이 그제야 딸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여기고 있었어요. 바보 같았군요.”

    세이나의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디온도 그랬어요.”

    그녀가 커튼을 내리며 몸을 돌렸다.

    세 남자의 시선을 받는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커튼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디온도 예전에 눈물을 흘렸어요.”

    짧은 침묵을 깬 사람은 라샤드였다.

    “언제?”

    “제일 처음…….”

    세이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제일 처음.

    “엘렌을 보고 눈물을 흘렸었죠.”

    “왜 엘렌을 세뇌하려 한 거죠?”

    “정체를 확인하려 했겠지.”

    “그리고 디온은 후작의 부하와도 아는 사이였어요.”

    가장 놀란 이는 오웬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세이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오웬이 디온을 의심할 때 만류했던 그녀였다. 오웬이 배신감을 느껴도 할 말이 없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그건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그를 믿었다.

    믿고 싶었다.

    “엘렌이 가출한 후에 후작이 디온에게 엘렌의 수색을 명령한 것 같군.”

    라샤드는 턱을 짚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수도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세뇌를 걸었다가.”

    “……날 만난 거군요.”

    세이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엘렌의 집 앞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텅 빈 풍경 속, 처음, 그때 보았던 금발의 작은 소녀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쓸쓸히 등을 돌리는 은발의 청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 찾아서 다행이다? 역시 맞았네. 확인했으니 돌아가면 될 것을.

    ‘왜 내 집 앞으로 온 걸까.’

    세이나는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것만은, 도저히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냥 우연이었을까? 그럼 왜 날 따라 들어왔지?

    왜 다음 날도 찾아왔어? 왜 걱정하고, 따라오고, 찾아왔어? 내가, 내가 그렇게나…….

    - 마족은 가장 잔혹하고 무서운 마물이라고 봐야 해요.

    - 성녀의 피를 마신다고.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 혐오스럽지 않아요?

    - 끔찍해.

    그런 말을 들었으면서도 왜.

    “세이나.”

    “네.”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팔을 쓸어내리면서 세이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세 사람의 표정은 제각각 조금씩 달랐다.

    맬빈은 지쳐 있었고, 라샤드는 불안해 보였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오웬은 엄격해 보였다.

    그 단호한 눈빛을 보며 세이나는 더는 피하기 어려운 사실을 직면했다.

    “아무래도 제가 그 성녀인가 보네요.”

    * * *

    말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성녀라니.’

    혹시 소설의 후반부에는 ‘세이나 로힐’이라는 존재도 있었던 걸까.

    그 작가라는 인간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세이나는 책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더 풀어 봐요. 내가 뭘 하면 되죠?”

    울고 있는 악마 삽화는 다시 봐도 묘하게 거슬렸다.

    가까이서 보니 다른 글자도 눈에 들어왔다.

    의심. 악마. 기만. 동정심.

    더 보기 싫어졌기에 시선을 돌리자 소파에 반쯤 기대 있는 맬빈이 보였다. 세이나는 애써 조금 웃으며 말했다.

    “엘렌을 구해야죠.”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맬빈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책으로 꽂히자 오웬이 페이지를 넘겼다.

    “성녀의 능력은 네 가지야. 치유, 정화, 마족 봉인.”

    언젠가 보았던 그 커다란 그림이 나타났다.

    책 속 여인은 복도에서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실히 ‘성녀’라는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성스럽고 고귀한 여인이다.

    발아래로는 악마가 짓밟혀 있고, 한 손에는 꺾인 꽃을 쥐고 있다. 지금은 흑백이지만, 오웬의 저택 복도에서 봤을 때 그녀의 등 뒤는 다채로운 빛깔의 꽃이 만발해 있었다.

    정화. 꺾인 꽃은 아마 ‘치유’를 뜻하는 것이리라. 짓밟힌 마족은 봉인을, 그녀의 어깨에 내렸던 찬란한 빛은 신의 축복을 뜻한다.

    “그리고 미래 예지.”

    “……전부 잘 모르겠네요.”

    세이나는 그 여인과 자신 사이에서 도무지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남을 치유해 본 적도 없고, 마기를 정화하는 방법도 모르겠다. 마족 봉인? 마족이 있다는 걸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미래 예지라니.

    ‘미래를 알았다면 그런 일들은 없었겠지.’

    모든 이들이 그렇듯 그녀에게도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최선을 다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은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글쎄. 항상 썩 좋은 평가는 못 받았던 듯하다.

    당장 1년 전에만 하더라도…….

    세이나는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라샤드가 그녀를 살피다 다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세이나가 성녀의 능력을 먼저 각성해야겠군요. 특히 미래 예지는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각성이라. 세이나가 작게 중얼거린 뒤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