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그와 남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머리칼과 눈동자 색도 똑같고, 이목구비의 생김새도 비슷했다. 비록 이쪽은 여성이고 그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였으나 그 외에 모든 게 흡사했다.
‘어떻게.’
놀라는 사이 다시 변화가 일었다.
“윽!”
세이나는 아슬아슬하게 엘렌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검은 줄기를 막아 냈다.
판갈레스의 줄기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부드럽게 휘어 검신을 휘감은 모양은 마치 채찍 같았다.
세이나는 이를 악물고 일단 버텼다.
힘에 있어 남자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건만. 점점 발이 끌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짧게 욕을 뱉은 순간, 새로운 줄기가 나타났다.
“피해!”
그녀는 검을 놓자마자 바로 맬빈을 잡아당기며 몸을 숙였다. 휘익! 줄기가 일으킨 강한 바람이 머리 위를 스쳤다.
“맬빈! 괜찮아요?!”
“어떻게, 이게…… 대체.”
맬빈은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눈은 오직 변해 버린 엘렌만 응시하고 있었다.
세이나도 엘렌을 돌아보았다. 긴 은색 머리칼이 흩날리며 검은 연기가 그녀 주변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에 익은 형체로 뒤바뀌었다. 네 다리. 잿빛 털.
도합 일곱의 사냥개가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락하운드.’
순식간에 마물이 나타났다. 세이나는 그제야 다른 마물들이 나타난 과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냥개들은 엘렌을 지키고 있었다.
아니.
‘엘렌이 아니야.’
그때, 사냥개 1마리가 달려들었다.
쉬익!
그리고 반으로 썰려 나갔다.
그녀의 몇 걸음 앞에 참혹하게 잘린 늑대의 시신이 떨어졌다. 돌바닥 위로 붉은 피가 번져 나갔다.
그 위에 있는 검신도 붉은색이었다. 세이나는 제 앞을 가로막은 검은 등을 올려다보았다.
라샤드는 차분히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오러를 닮은 붉은 눈이 매섭게 여자를 노려보았다.
“저건,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나?”
“네.”
뒤이어 답한 이는 오웬이었다.
라샤드의 곁에 다가온 그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마족입니다.”
“라프만?”
여자는 오웬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곧 큭큭,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남자의 사나운 기세는 그녀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인에게 칼을 겨누어서야 쓰나.”
“하, 주인은 무슨.”
“아직.”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오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어?” 누군가 놀라 뱉자 쿵!
오웬이 무릎을 꿇었다.
“목줄이 있는데 말이야.”
“큭, 젠장!”
순간 누군가 그를 아래로 잡아당긴 것만 같았다. 오웬은 정말 목줄이라도 채워진 듯 제 목을 붙잡고 있었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귀엽네.”
‘미쳤어.’
그것이 마족에 대한 세이나의 첫 소감이었다.
여자는 정말 사랑스러운 대상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웬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짚을 땐 황홀한 표정이 되었다.
마족의 노예. 지금 오웬의 모습에는 그 표현이 딱 정확했다. 여자는 오웬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우아하게 손짓하자 그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이끌려 갔다. 오웬이 눈을 치켜떴고.
맬빈은 캐스팅을 마쳤다.
화르륵!
돌연 나타난 5개의 불덩이가 허공에 붉은 선을 그었다.
쾅쾅쾅!
굉음 다음에 눈부신 섬광이 튀었다. 세이나는 여자의 머리 위에 나타난 빛의 화살들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콰르릉! 쾅! 쾅!
천지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일었다. 거센 바람까지 덮쳐지자 세이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몸을 숙였다.
‘미쳤어!’
이번에는 맬빈을 향한 것이었다.
‘저렇게 마법을 막 쏘아 댔다가 다른 사람이 휘말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맬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곧 그가 앞으로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고, 이어서 번개가 내리쳤다.
콰르르릉!
정적은 갑자기 찾아왔다.
세이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라샤드가 보였다.
맬빈은 오웬보다 더 앞에 있었다.
그의 남색 로브 너머로 새까맣게 변한 거리가 보였다. 사냥개들은 모두 널브러져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옅어지고 은색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맬빈이 탄식했다.
“말도 안 돼.”
여자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주변과 달리 깨끗한 그녀의 발치를 보며 맬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어떤 마법도 그녀에겐 통하지 않은 것이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지, 성녀.”
* * *
세이나의 호흡이 일순 멎었다.
‘뭐?’
“날 따라오면 일단 오늘은 물러나 주겠다. 이 라프만도.”
“윽!”
“괘씸하긴 하지만 살려 주지.”
오웬의 이마는 이제 바닥에 닿을 듯 가까웠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손짓하면 그의 머리가 피에 젖어 버릴 것을 알면서도 세이나는 쉽게 말문을 열 수 없었다.
‘내가 성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엘렌이 성녀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알겠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내가?
“절대!”
그녀를 일깨운 것은 오웬의 목소리였다.
“절대 안 돼, 도망쳐! 각하!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어서 세이나를……!”
“쯧, 버릇없긴.”
쿵! 다시 충격음이 들렸다.
그저 손가락 하나 까딱했을 뿐인데. 오웬의 몸이 맥없이 추락하여 결국 이마가 바닥에 부딪혀 버렸다.
그의 턱선을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자 여자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할래?”
세이나는 아직도 같은 의문에 갇혀 있었다.
‘내가 성녀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는 그냥 엑스트라다. 성녀일 리가. 그런 역할은 여주인공에게나…….
대체.
‘그 원작’은 뭐지?
“행동만큼 생각이 빠르진 않구나? 뭐, 하긴. 다른 성녀들도 그러더군. 저번에 만난 성녀는 뭐라 했더라……. 아.”
여자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나긋하게 말을 이어 가던 그녀가 이윽고 뭔가를 떠올렸는지 밝게 웃었다.
“그쪽 세계에서는 마족이 없다고 했지.”
“뭐?”
“더 기다려 줘야 해? 아니면 제대로 머리통이 깨지는 걸 보고 싶은 건가?”
마지막 질문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걸 알아차렸기에 세이나는 더욱더 갑갑함을 느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자신이 성녀라면.
‘피를 원하고 있어.’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이나는 저 마족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으리라 추측했다.
완전히 자유롭다면 이런 제안을 하며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당장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모두를 죽였겠지. 나타난 마물들도 모두 C급.
‘그래도 마법은 통하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마족의 시선은 계속 세이나를 향해 있었다. 그녀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오웬을 이용할 것이 틀림없었다.
라샤드와 맬빈은 그녀의 앞. 안타깝게도 역시 마족의 시야가 닿는 거리였다.
아주 잠깐.
잠깐이라도 다른 이가 시선을 끌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뭐, 그것도 나쁘진 않…….”
그리 생각한 찰나.
“그만!”
여자의 입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튀어나왔다.
세이나는 물론, 다른 이들의 눈에도 의문이 피어올랐다. 기세등등하게 미소 짓던 여자가 갑자기 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을 친 것이다.
‘또 뭐지?’
“아직 방해를!”
다시금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을 때, 세이나는 바닥에 떨어진 오웬의 검을 쥐었다. 라샤드와 세이나, 맬빈의 시선이 교차 되었고.
다음 순간, 라샤드가 먼저 달려들었다.
여자는 아직 비틀거리고 있는 상황. 두 눈까지 질끈 감고 고통스러운지 머리를 흔들어 댔다. 라샤드의 검날이 정확히 목표물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챙강!
돌연 땅에서 솟아난 검은 형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비정상적으로 긴 목, 새하얀 머리칼. 사람과 유사한 몸이나 양쪽에 달린 팔은 모두 일곱이나 되었다.
라샤드는 제 검날을 튕겨 낸 검은 팔을 알아보았다.
“그때 그 마족!”
“물러서요!”
맬빈의 외침에 따라 라샤드는 바로 뒤로 물러났다. 직후 그가 있던 자리에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쾅쾅쾅!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소음과 불꽃.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흙먼지가 잦아들자 나타난 검은 형체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이야!”
세이나가 여자에게 뛰어든 것은 그때였다.
라샤드가 실패할 상황에 대비하여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맬빈의 마법이 낸 굉음이 발소리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연기와 먼지도.
그 결과, 여자는 세이나가 제 근처까지 다가간 후에야 기척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그것은 세이나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른 타이밍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여자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발을 뒤덮어 버린 얼음이 없었다면.
‘얼음?’
“이게 무…….”
분명, 피했을 것이다.
세이나의 검이 여자의 어깨를 꿰뚫었다.
콰직!
사람의 몸을 찌를 때와는 다른 격한 소리가 들렸다.
세이나는 검을 더욱 꽉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를 관통한 검이 한 뼘 더 깊어졌다.
“큭!”
상처에서는 피가 아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한 몸에 닿은 검 역시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어두운 기운이 손에 닿기 직전, 검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어깨에 박힌 검이 미끄러지듯 나오고, 이내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검은 괴물이 그녀의 등 뒤에 서서 그녀를 끌어안듯 감싸는 것도.
까드드드득. 까득.
“그래.”
괴물은 말도 이상하게 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의 의미를 이해하는지 여자는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맬빈이 외쳤다.
“엘렌을 돌려놔!”
“아, 엘렌.”
여자는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도 매혹적으로 웃었다.
“어쩌지, 방금 죽였는데.”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그들을 보호하듯 주변을 맴돌았다. 그 기운이 몹시 섬뜩했기에 두 남자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세이나는 그들과 다른 이유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꽉 쥐었다.
‘방금, 죽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분명 처음 검 끝이 겨눈 방향은 심장이었다.
그러나 찌르기 직전.
세이나는 결국 검을 틀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비틀거리기 직전 뱉은 비통한 외침이 아직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 그만!
엘렌의 목소리였다.
‘아직 있어.’
“또 봐. 성녀님.”
그녀의 싸늘한 조소를 시작으로 그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검은 연기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들이 이미 사라진 후였다.
피 한 방울조차 남지 않은 검게 그을린 바닥을 위로 세이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엘렌.’
끝내 지키지 못한 이름을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