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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21화 (12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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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렌은 제 눈을 믿기 어려웠다.

    뒷문은 제대로 닫혀 있었다. 모든 창문도.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언제? 어떻게?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 여자가 다가왔다.

    「내가 죽여 줄까? 너무 간단한데.」

    달빛을 실로 뽑아 만든 듯한 은발. 작은 얼굴은 혈색 하나 없이 창백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색 눈이 한 번 깜빡이고 뒤이어 예쁜 눈웃음이 떠올랐다. 멍하니 그녀를 보던 엘렌의 얼굴이 확 붉어진 것도 그때였다.

    여자는 평생 엘렌이 보아 왔던 사람 중 가장 민망한 차림이었다.

    일단 가려져 있기는 했다. 목부터 이어진 검은빛이 그녀의 발끝까지 이어져 있다. 그러나 딱 달라붙어 그녀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엘렌은 마치 나신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얇은 베일 한 장 없이 그대로 드러난 어깨에는 정체불명의 문신도 있었다. 보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 시선을 내리자 그제야 그녀가 신고 있는 높은 굽의 부츠가 보였다.

    그러나 소리는 없었다. 여자는 구름 위를 걷듯 사뿐사뿐 다가와 무릎을 접었다.

    “너…….”

    아름다운 사람이다.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림에서 걸어 나온 듯…… 아니,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이었다. 엘렌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하게, 무섭지도 않았다.

    “누구야?”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보이며 여자가 손을 뻗었다. 분명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엘렌이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누구야?”

    「난 ‘너’야.」

    “나?”

    「그래, 네가 숨기고 있는 감정. 외면하고, 없애고, 버리고 싶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감정이지.」

    “그게 무슨…….”

    「아, 늦게 일어나고 싶다.」

    그러고 여자는 길게 하품을 했다. 기지개도 켜고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막 일어난 직후에 할 법한 행동에 엘렌의 의아함이 더해졌다.

    「저 물건은 훔쳐서라도 갖고 싶네. 저놈을 죽일 수 있다면 감방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아. 재수 없는 년들. 실컷 꾸며 봐. 나보다 예쁘지도 않으면서.」

    “그…… 그게 무슨…….”

    「날 보고 저렇게 웃어 주면 좋을 텐데.」

    불현듯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이렇게 만져 주면.」

    여자의 손은 이제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장난치듯 간지럽히더니 손끝을 세워 깍지를 끼웠다.

    「행복할 텐데.」

    얼음을 쥐고 있는 것처럼 손바닥이 차가웠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여자가 작게 속삭였다.

    「세이나 로힐만 없었다면.」

    엘렌은 고개를 휙 돌렸다.

    부정해야 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세이나를 이웃으로서 아끼며, 그딴 생각 따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그러나 어째서인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은 기이한 감각이었다.

    혹시 나의 깊은 내면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없는 걸까.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그 남자를 갖고 싶지?」

    속내를 파헤치는 말에 엘렌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급격한 감정의 변화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첫인상에 ‘잘생겼다’라고 감탄하긴 했어도 이후 세이나의 말을 듣고 다르게 생각했다.

    꽃집에 찾아와 설명할 때도 이러진 않았다. 마탑에 같이 가자고 제안한 건 이제 이웃이 되었으니 어색하지 않게 잘 지내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구경하는 중에도 그보다 오웬과 더 어울리지 않았던가.

    엘렌은 지금도 쿵쿵 뛰는 심장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렇게나 쉽게 반하는 사람이었던가. 분명히 그렇진 않았는데.

    어째서.

    「내가 네 것으로 만들어 줄게.」

    “……어떻게?”

    저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주 간단해.」

    여자는 그러고 몸을 일으켰다. 따라오라는 듯 턱짓했기에 엘렌도 엉겁결에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끈 곳은 옷장 앞이었다. 낡은 전신 거울 안, 하얗게 질린 소녀가 제 손을 모아 가슴께에 두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던가?’

    매일 아침 보는 자신의 얼굴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눈동자 색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거울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엘렌은 제 머리카락 끝이 서리가 내린 듯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울 속 그녀가 말했다.

    “예쁘지?”

    하지만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입이었다.

    방금, ‘그것’의 목소리가 제 목에서 흘러나왔다. 이상한 느낌에 엘렌은 제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한 번 더.

    “공작님도 좋아하실 거야.”

    엘렌의 시선이 다시 제 머리카락으로 내려갔다. 달빛이 스며든 듯 아름다웠다. 예쁜 색……이 맞았다. 공작님도 좋아할 것이다.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도 더 클 거야.”

    “키도?”

    “응. 공작님과 어울릴 수 있도록 몸이 성장할 거야.”

    “그건 너무…….”

    엘렌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부끄러워.”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 엘렌.”

    거울 속의 여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엘렌은 제 입꼬리도 따라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같은 표정. 같은 감정.

    같은 생각이다.

    “기분은 어때?”

    “나쁘지 않아. 아니, 좋네. 괜찮아.”

    “나랑 있어서 그런 거야. 기억나? 우리 예전에도 같이 있었잖아.”

    “예전?”

    “응,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오래전’이란 없었다. 엘렌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또 몸이 제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 속의 그녀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렌은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거울 속 여자는 항상 자신에게 모진 말을 퍼부었다. 그리고 꼭 덧붙였다. 널 위해 하는 말이야, 엘렌.

    그 마지막 말이 무척이나 따뜻하여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그 넓은 저택 안에서.

    날 위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널 잊었구나.”

    “그래, 네가 날 잊었어.”

    “미안해.”

    “아니야, 엘렌은 잘못 없어. 다 나 때문이지.”

    엘렌은 더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곧 거울 속의 여자도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마음이 너무 아파 부서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이상한 희열도 느껴졌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엘렌은 그 감정을 반가움이라고 여기며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널 떠나지 않을게.”

    “다시는 날 버리지 않을 거야?”

    “너는 나니까.”

    “나는 너야?”

    “응. 너는 나야.”

    “그럼…….”

    거울 속 엘렌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았다.

    “나를, 불러 주겠어?”

    “엘렌.”

    잘하고 있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엘렌은 어느새 은발의 여인과 똑같이 변한 자신을 보고 말했다.

    “유클레스.”

    그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갑자기 세이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응?”

    막 겨울 이불을 꺼낸 참이었다. 집 앞을 서성이다 확 달라진 날씨를 체감해서 겨울옷도 꺼내 두었다.

    1층으로 내려가려던 세이나는 바로 발길을 돌려 다시 2층으로 올랐다. 직감이 이끄는 곳은 서재였다.

    방을 훑어보고 습관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검을 쥐었다. 무심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꺄아아악!”

    세이나는 바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좁은 골목 안. 주저앉아 파들파들 떨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 앞에는 늑대가 있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당장이라도 여자를 향해 달려들 듯 그르렁 소리를 냈다. 작은 마차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크기는…….

    ‘마물!’

    그것의 붉은 털을 보며 세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C급 레드 켈티르. 역시 서식지는 수도에서 먼 종류였다.

    ‘정신계가 아니야!’

    레드 켈티르는 보이는 그대로 늑대와 같은 습성이 있었다. 단단한 다리로 빠르게 목표물을 따라잡고 저 이빨로 상대를 도륙한다. 그것의 마력은 오직 신체를 강화하는 데만 쓰인다.

    이전과 다르다. 하지만 그에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순간, 늑대가 울부짖었고.

    세이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검을 아래로 향한 채.

    콰득!

    예리한 검이 두개골을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늑대의 머리가 땅 위로 쓰러졌다. 위에서 떨어진 무게와 오러를 실어 제대로 약점까지 찌른 매서운 공격이었다.

    늑대의 목에 빠르게 발을 감은 세이나는 한 손으로 검을 더 힘껏 붙잡았다. 다른 손은 이미 허리의 단검을 빼내고 있었다.

    다음은 목.

    콰드득!

    푸른빛을 품은 단검이 늑대의 목을 찔렀다. 그녀가 거침없이 팔을 움직이자 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때까지도 늑대는 정신을 잃지 않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마물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세이나는 바로 단검을 뽑았다.

    “꺄아아악!”

    다음은 심장.

    쿵!

    단검이 등에 꽂힌 이후에서야 늑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세이나는 가볍게 숨을 뱉으며 지면으로 내려왔다.

    여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꺄아악! 꺄악!”

    “후우, 괜찮아요?”

    “피, 피가……!”

    마침 2층에서 발견해서 다행이다.

    목과 심장을 찌른다고 해도 레드 켈티르는 머리를 찌르지 않으면 공략하기 힘든 종이었다.

    다시 한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세이나가 몸을 일으켰다. 좁은 골목은 완전히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으으, 이거 언제 치우냐.”

    그때였다.

    쨍그랑!

    갑자기 옆집의 유리창이 깨지더니 검은 그림자가 곧장 그녀에게 돌진했다.

    “윽!”

    이상함을 눈치채고 재빨리 뒷걸음질 친 세이나는 바로 눈앞을 스치는 가시 돋친 줄기를 볼 수 있었다. 식물. 마물. 가시. 이 기척.

    ‘판갈레스!’

    금이 간 벽면을 확인한 세이나는 재빨리 검을 고쳐 잡았다. 눈을 부릅뜨자 깨진 창문 너머로 붉은 잎을 흔드는 커다란 식물이 보였다.

    채찍처럼 움직여 그녀를 공격한 것은 바로 그 식물의 줄기였다.

    C급. 판갈레스. 밀림 지역에서 나타나는 마물이었다. 엘렌의 집 안 같은 곳이 아니라…….

    “엘렌!”

    “세이나!”

    날카로운 외침을 집어삼키며 다시 줄기가 매섭게 뻗어 나왔다.

    휙!

    세이나는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몸을 숙이면서도 아차 싶었다.

    직전, 그녀의 집 유리창 안에서도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곧바로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혹시 당했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던 찰나, 스르륵 줄기가 물러났다. 창처럼 날카로웠던 끝은 잘려 보라색 액체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다쳤어?”

    세이나는 그제야 라샤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뾰족한 유리 조각 사이로 몸을 빼내어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세는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상처는 없었다. 세이나가 안심하며 입을 열자.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와르르 벽면이 무너졌다.

    세이나는 놀란 눈으로 박살 난 엘렌의 집 벽을 바라보았다.

    벽돌이 무너지면서 나온 연기 속, 검은 형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쿵! 쿵!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잠시 후, 세이나는 꽃집 안을 가득 채운 5개의 거대 식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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