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엘렌은 다음 날 아침에도 옆집을 주시했다.
‘대체 뭐지?’
어제 식사는 무척 맛있었다.
라샤드 칼만 공작 각하께서는 예상보다 뛰어난 요리사였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지, 주방에 있는 모습이 집주인 같았다.
세이나는 옆에서 거의 거드는 식이었다.
재료를 손질하면서도 이것저것 공작에게 물었는데, 대부분 엘렌도 알 만한 아주 기본적인 상식들이었다.
라샤드는 모두 대답해 주었다. 엘렌과 달리 면박도 몇 번 주었다. 아옹다옹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상하게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저도 도울게요.
- 아니에요! 손님은 앉아 있어야죠!
세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엘렌은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그것’이 끼어들 타이밍이지 않은가?
‘널 따돌리려는 속셈이야.’
‘널 약 올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봐, 엘렌. 저 여자는 널 싫어한다고.’
……그리 말해야 했는데.
하지만 목소리는 이후 내내 엘렌을 찾지 않았다.
오웬을 따라서 거실을 다 구경하고, 책도 몇 권 추천받고, 맬빈과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내내 조용했다.
식사 시간에도, 집에 돌아와서도 고요하기만 했다.
오늘 아침까지.
맛있는 식사였다.
분위기도 좋았고, 대화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았을 뿐. 엘렌은 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또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왠지 어색했다.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느낌이었다. 아니, 원래도 혼자이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로웠다.
그래서일까.
‘뭘 숨기고 있는 걸까?’
「가서 물어봐.」
엘렌이 고개를 홱 들었다. 당연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느낌은 달랐다. ‘그것’이 돌아왔다.
엘렌은 묘한 반가움을 느끼며 말했다.
“너, 어제는 왜 조용했어?”
「잠들었어.」
“잠? 너, 잠도 자?”
「그럼, 잠도 자.」
“그렇게 갑자기?”
목소리는 조금 뜸을 들이다 답했다.
「요즘은 종종 그러네.」
처음 듣는 심각한 말투였다. 엘렌이 갸웃대자 그것이 가볍게 웃었다.
「난 괜찮아. 그보다 어제는 어땠어?」
엘렌은 천천히 어제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엔 그저 그랬지만, 회상하다 보니 점점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어제는 좋은 식사가 맞았다. 엘렌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도 함께 먹기로 했어. 날 따돌리려는 거면 그런 제안을 할 리가 없잖아. 내 말이 맞지?”
「흐음.」
“저기, 난 정말 세이나와 잘 지내고 싶어.”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괜히 허공을 보았다.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해 엘렌은 조곤조곤 설득을 시작했다.
“첫인상도 좋았고, 항상 내게 잘 대해 줬어. 넌 잘 모르겠지만, 이웃이란 정말 멋진 인연이야. 이 넓은 세상에서 제국, 이 거리, 거기다 바로 이웃집에 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멋진 인연? 저번에 네 친구는 옆집 여자랑 머리 뜯고 싸웠잖아.」
“그, 그건 가끔 있는 경우야!”
「아, 저번엔 건너편 아저씨 둘이 주먹다짐을 했던가.」
“너, 자꾸 내 말에 토 달 거야?”
「응.」
그러고 그것은 킥킥 웃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음성은 한없이 진지했다.
「널 아끼니까. 엘렌. 걱정돼.」
엘렌은 순간 조금 얼굴이 붉어진 것을 느꼈다. 방금의 말은, 진심이 확실했다.
실체도 없는 존재에게 ‘진심’을 운운하는 건 우스운 일일까.
내가 정말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엘렌은 괜히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익숙해져서 그런가. 없을 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내 말만 들어주는 비밀 친구라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엘렌은 머리를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꽃집 문을 여는 날이었다.
엘렌은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빗자루를 들고, 일단 가볍게 가게 앞을 쓸려고 했다.
그런데, 문 앞에 낯선 이가 있었다.
“저기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붉은 얼굴. 다행히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설마 이 추운 밤에 노숙?’
가까이 다가가니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아무래도 이 앞에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엘렌은 실례인 걸 알면서도, 그를 빗자루로 찔러 보았다.
“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사내가 움직였다. 크게 어깨를 떨더니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혹시 다친 걸까? 환자? 도와 달라는 건가?
엘렌의 몸이 점점 그를 향해 기울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코앞까지 귀를 기울인 찰나.
확!
돌연 사내가 엘렌의 멱살을 쥐고 소리쳤다.
“이 여편네가!”
“네, 네!?”
“남편이 집에 안 왔는데 문을 잠가?! 한번 해 보자는 거야?!”
그리 외치는 사내는 한쪽 눈을 거의 감고 있었다. 아직 술에 제대로 깨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너 이리 와! 오늘 네년 죽이고 내가! ……어? 누구세요?”
“일단 이것부터 놓으시고!”
“너, 너 뭔데 우리 집에서 나와……. 우리 집에서!”
“우리 집이라고요! 빨리 놔요!”
“도둑이냐?! 강도?!”
그때였다.
“그만하지.”
그녀의 옷을 틀어쥔 사내의 손목 위. 또 다른 두꺼운 손이 나타났다. 엘렌이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기도 전에.
사내의 손목이 꺾였다.
“악!”
“놓으라잖아.”
“아파! 알았어! 놓을게! 놓으면 되잖아!”
엘렌은 그제야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헉헉, 거친 숨소리를 쏟는 그녀의 시선이 어느새 나타난 검은 옷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라샤드가 사내를 팽개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나?”
쿵쿵쿵. 엘렌의 심장이 요란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집에 돌아와서도 엘렌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분은 공작님이야.’
술에 취한 사내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의 목소리. 그의 손. 마주친 눈빛. 잘생긴 얼굴. 엘렌은 제 볼을 감싼 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닐걸.」
‘나랑 신분이 다른 사람이라고! 이어질 수 없어!’
「넌 언제든 저 남자를 가질 수 있어. 엘렌.」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쇠를 긁는 듯한 잡음은 이제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더,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엘렌은 무섭지 않았다. 제대로 ‘사람’같이 들려서인지. 오히려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그러고 엘렌은 확 제 입을 틀어막았다. 친근감이라니. 그리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저 목소리는 ‘저주’였다. 사제님의 성력으로 억누를 수 있는, 나쁜 마음을 부추기는 악의 싹이었다.
죄악감에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엘렌은 질끈 눈을 감으며 양쪽 귀를 막았다.
무시해야 해. 그리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버지께 돌아가야지.」
그러나 그 단어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아버지?”
엘렌의 눈꺼풀이 번쩍 열리고,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의문에 잠겼다.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아버지?”
그때 두통이 찾아왔다.
“윽……!”
머리를 쪼개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렌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쿠당탕!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으…… 아……!”
눈앞이 흐려지고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그녀는 둥글게 몸을 말았다. 와중에 숨을 쉴 수 있는 것이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직 그것만 의식하며, 그녀는 가쁜 숨을 이어갔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러다 문득.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쳇.」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는데.
엘렌은 느리게 몸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손에 닿은 바닥의 촉감이 서늘했다. 다리. 잘 움직인다. 팔도. 시야도 또렷하다.
그런데 왜.
“나, 언제 쓰러졌지?”
* * *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다.
가게를 정리하며 엘렌은 생각했다.
하루 종일 생각해 봤지만 쓰러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공작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집에 들어왔을 텐데…….
‘다시 몽유병이 시작된 건가?’
그러나 잠든 기억도 없었다. 안 좋은 병이라도 걸린 걸까.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직 돈도 다 못 갚았는데.’
신전에 빌린 돈을 모두 돌려주는 것은 그녀의 첫 번째 인생 목표였다.
그게 너무 중요해서, 다음은 정해 두지도 않았다. 사제님들은 괜찮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 열심히 일해야지!’
겨울은 꽃을 구하기 어렵지만. 저번에 만든 치료약을 팔아 다른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사업 계획을 세우다 보니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엘렌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저녁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어제 얻어먹었으니, 보답할 만한 선물을 사러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세이나가 보였다.
그녀는 제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가움에 엘렌이 손을 들었던 바로 그때였다.
“세이…….”
현관문이 열리고 키 큰 사내가 나타났다.
세이나도 그를 돌아보았다. 주변이 원체 조용한 탓에 라샤드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이 들렸다.
“왜 또 나와 있어?”
엘렌은 굳은 듯 멈춰 버렸다. 저번처럼, 두 사람은 그녀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이나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요.”
“…….”
“날이 점점 추워지네요. 들어가죠.”
“세이나.”
세이나가 계단에 막 발을 올린 순간, 라샤드가 낮게 그녀를 불렀다.
그는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다. 살짝 몸을 기울여 세이나를 내려다보며, 깊은 저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할 말이 있는데.”
엘렌은 거기까지 보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쾅! 문을 닫고, 거기에 등을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역시 맞았어.’
어느 샌가부터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눈이 마주친 다음 순간이, 그녀의 머릿속에 제멋대로 펼쳐졌다.
묘한 분위기. 조심스레 다가가는 공작. 지금, 그는 틀림없이…….
엘렌은 입술을 꽉 깨물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미래를 축하해 줘야 한다.
그래야 착한 아이니까.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서 엘렌은 그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을 볼 때마다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칼만 공작, 라샤드의 눈빛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요동쳤다.
‘부러워.’
슬프거나 눈물이 날 것 같진 않았다. 잦아들지 않는 심장 고동을 느끼며 엘렌은 몸을 더욱더 웅크렸다.
유난히도 목덜미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무거운 적막은 계속 이어졌다. 아마,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계속 이럴 것이다.
엘렌은 죽을 때까지 혼자일 테니.
‘외로워.’
이렇게 밤새도록 있어도 누구 하나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엘렌은 가슴이 먹먹했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그냥 처음에 공작님이 권유한 대로 정원사가 될 걸 그랬나. 그랬다면 지금쯤.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그러게 죽이자고 내가 말했잖아.」
엘렌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은발의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엘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