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19화 (119/179)
  • #119

    라샤드 칼만 공작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친절하기도 하고, 설명도 알아듣기 쉬웠다. 마음이 들뜬 엘렌이 쉴 새 없이 질문해도 싫다는 내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잘 모르는 것에는 솔직하게 “미안하다.”라고 답했다. 그것이 또 몹시 재미있어, 엘렌은 활짝 웃었다.

    “알아내시면 꼭 말해 주세요.”

    “음. 그러지.”

    전날의 우울함이 확 사라진 느낌이었다.

    엘렌은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걸음이 계속 톡 톡 뛰어올라서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반면, 라샤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엘렌은 그에게서 작은 미소 하나라도 보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농담도 막 던지고, 눈을 마주 보며 활짝 웃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었다. 그는 과일을 고를 때조차 심각했다.

    “저택에는 요리사분들이 있지 않아요?”

    “그렇지.”

    “그런데 왜…….”

    엘렌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

    세이나에게 해 주려고 하는구나.

    어젯밤, 그들 사이에 감돌던 심각한 분위기가 떠올랐다.

    ‘세이나, 우는 것 같았는데…….’

    늘 씩씩하고 당당하던 그녀였다. 어른스럽고, 멋있어서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동경하게 되는 사람.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을 듯,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녀를 걱정하다 보니 점차 엘렌도 우울해졌다.

    궁금하기도 했으나 쉽게 묻기는 어려웠다. 지나친 참견이라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공작님도 알고 있는데.’

    저번 방문 때, 세이나는 칼만 공작이 이웃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엘렌 역시 세이나와 이웃이었다. 따지고 보면 칼만 공작보다 훨씬 먼저. 더 따지다 보면, 자신 역시 칼만 공작과 이웃이다.

    하지만 세이나와 칼만 공작은 보통의 ‘이웃’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내민 손길, 그리고 뿌리치지 않는 태도. 거기다 공작님은 지금, 세이나를 위한 요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 원래 공작이 관심 있던 사람은 너야. 저 여자가 빼앗은 거라고.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건지.

    엘렌을 미간을 구기며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저주다. 결코 진지하게 들어선 안 된다.

    그리 마음을 다잡은 순간이었다.

    “수도는 확실히 구경할 것이 많군.”

    다시 이상한 헛기침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라샤드와 눈이 마주쳤다.

    “수도에 잘 안 오셨나 봐요.”

    “공작령은 수도와 거리가 꽤 되니까. 사실 영지에 있을 때도 외출이 잦은 편은 아니었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금세 밤이 되었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시작된 걸까. 의문스러웠으나 처음 듣는 개인적인 이야기에 엘렌은 귀를 기울였다.

    “어른들이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하기도 했고.”

    그가 손에 잡힌 잘 익은 사과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차분한 눈빛. 칼만 공작은 옆모습도 참 잘생긴 사내였다.

    엘렌은 그에게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서류로만 만나던 것들을 실제로 봤을 때는……. 기분이 이상하더군. 내 영지인데도, 시찰하러 나갔다가 종종 길을 잃기도 했어.”

    “네? 공작님이요?”

    “우습지?”

    엘렌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안 우스워요. 그럴 수도 있죠.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뜻밖에도, 라샤드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재미있어할 줄 알았는데.”

    “네?”

    “세이나는 박장대소를 했거든.”

    엘렌은 그가 먼저 말문을 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셨구나.’

    어젯밤을 회상하며 잠시 침울해져 있었던 것일 뿐인데. 공작은 자신이 대답을 잘해 주지 않아서 엘렌이 풀이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으나.

    “내가 너무 말이 많았군. 사과하지.”

    “아, 아니에요.”

    썩, 먹히진 않았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공작은 곧 사과를 내려 두고 몸을 돌렸다. 따라가기 어려운 속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엘렌은 다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잠시 그가 신경 쓰는 대상이 된 것. 그 하나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바보처럼.

    “공작님은 처음이랑 느낌이 많이 달라지셨네요.”

    다시 옆에 서자 라샤드가 힐끗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엘렌은 드디어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눈.

    그마저도 멋있다고, 엘렌은 생각했다.

    * * *

    집 근처에 이르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둘이 같이 다녀와?”

    오웬의 머리칼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선명한 빛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엘렌!”

    “맬빈 님?”

    맬빈은 오늘도 저번처럼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가 빠르게 다가와 엘렌의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맬빈 님이 왜…….”

    “당연히 엘렌을 보러 왔지요.”

    맬빈은 그러고 눈웃음을 지웠다. 그가 뒤를 흘겨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무도한 자 때문에 여기에 막혀 있지만.”

    “네?”

    “이상하잖아!”

    “이건 마법약 부작용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습니까!”

    “응, 엘렌? 초록 머리도 싫지?”

    어느새 맬빈의 뒤에 도달한 오웬을 보며, 엘렌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다니.

    저번에 생각한 대로, 그는 참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마웠다.

    ‘첫인상은 수상했는데.’

    오웬은 어린아이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엘렌은 쉽게 그가 원하는 대답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 괜찮지 않을까요?”

    “뭐?”

    예상대로 그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엘렌은 웃음이 보일까 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말했다.

    “맬빈 님은 괜찮아요. 예쁜 색이네요.”

    “하, 봤죠? 수상하긴 무슨!”

    “왜!?”

    그리고 라샤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왜?!”

    “들어가지.”

    “잠깐만! 쟤는 왜!”

    라샤드에게 끌려가면서도 오웬은 재차 소리쳤다. “왜!?” 그 목소리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 있어, 엘렌은 계속 웃었다.

    세이나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엘렌? 그리고 맬빈도?”

    “세이나!”

    엘렌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맬빈과도 아는 사이였어?’

    금세 그녀의 앞이 한산해졌다. 라샤드에 오웬, 그리고 맬빈까지 세이나의 집 현관 앞에 모여 버렸다.

    엘렌은 어안이 벙벙해져 가만히 서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맬빈과 세이나가 인사를 주고받았다. 형식적이거나 정중하지 않은, 친근한 사이에서 할 법한 가벼운 손짓이었다.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 오웬이라는 자가 저를 두고 막……!”

    거리가 멀어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맬빈의 목소리도 묘하게 들떠 있었다.

    자신과 있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맬빈의 분위기에 엘렌은 다시 멍해졌다.

    세이나는 그런 그에게 벌써 익숙한 듯했다. 그녀가 대충 대꾸하며 안쪽으로 손짓했다.

    ‘들어가?’

    들어가고 있었다.

    맬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세이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한쪽 손에 짐을 들고 있는 라샤드가, 투덜거리는 오웬이 그 뒤를 따랐다.

    세이나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엘렌도 들어와요. 점심 식사는 아직이죠?”

    엘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같이 식사해요.”

    그때였다.

    「저 표정 좀 봐.」

    귓가를 스치는 울림에 엘렌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세이나가 재차 손짓하는 것이 보였으나, 엘렌은 좀처럼 발을 뗄 수 없었다.

    「정말 들어올까 봐 불안해하고 있네.」

    ‘아니야.’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일 뿐이야. 저 여자는 널 싫어한다고.」

    ‘세이나는 내게 항상 친절했어.’

    「개소리.」

    날카로운 비웃음이 들렸다. 그게 섬뜩하여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갑자기 어깨를 스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엘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깨의 압박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 뭔가가 목을 스쳤다. 부드러운 것, 마치 머리카락 같은…….

    ‘그것’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여자는 널 따돌릴 생각인 거야. 네 것을 야금야금 빼앗는 중이라고.」

    ‘그렇……지 않아.’

    「너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던 거잖아? 라샤드에 이어 맬빈까지. 둘 다 원래 너에게 올 사람들이었어. 저 여자의 집이 아니라!」

    ‘그럴 리 없어.’

    「어제도 우는 척한 거겠지. 저 남자의 동정을 사려고 수작 부린…….」

    “엘렌?”

    “짐만 두고 바로 갈게요!”

    엘렌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거의 달리듯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속삭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따돌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왜 맬빈과 만났다고 네게 전해 주지 않았겠어?」

    ‘……시끄러워.’

    물건을 집 안에 집어 던지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바람을 쐬자 뒷덜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것도 아마, 바람이었을 것이다. 엘렌은 거듭 되뇌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세이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큼 계단을 오르자, 그녀가 손을 뻗어 엘렌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따뜻한 온기. 하지만 어쩐지 엘렌은 거북함을 느꼈다. 그녀가 세이나의 팔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음, 힘들면 말해요. 의사를 불러 줄게요.”

    “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눈에 익은 거실 안에서 맬빈이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호? 이 드래곤은? 아주 정교하군요.”

    오웬과 라샤드는 이미 주방으로 간 듯했다. 세이나의 어깨 너머 풍경을 보던 엘렌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디온 님이 안 보이네요?”

    세이나가 눈을 크게 뜨고 엘렌을 돌아보았다.

    “디온을 만났어요?”

    “네? 아뇨?”

    “아.”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엘렌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미안해요.”

    “디온 님께…… 무슨 일이 생겼나요?”

    세이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요.”

    ‘왜 지금 말해 주지 않는 거지?’

    「알려 주고 싶지 않으니까.」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남자 이야기가 나오니 눈빛 달라지는 것 봤지?」

    세이나는 이미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엘렌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남자 밝히는 속물이야.」

    오늘따라, 그 목소리가 너무 잘 들린다고 생각하며.

    「큭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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