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늦은 시간까지도 고민은 이어졌다.
‘대체 뭐였을까?’
세이나는 제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손을 배 위에 두고, 다리도 얌전히 모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친 방 안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그녀의 금색 눈이 다시 깜빡였다.
‘뭐였지?’
몇 시간 전, 디온과 눈이 마주쳤을 때.
세이나는 전에 없던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그와 시선을 맞춘 것은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았고, 손이 닿은 적도, 심지어는 그의 품에 안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복잡한 기분도. 불쾌감과 거부감. 흔들림이 심한 기구에 탄 듯 두통도 느껴졌다. 기묘한 짜증과 열.
이어 구토감까지.
찰나라고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를 밀어 냈다.
그때 디온은…….
‘혹시 마법을 쓴 건가?’
그것만은 이따금 겪는 증상이었다. 세이나는 마물의 마법도, 사람의 마법도 잘 통하지 않는 체질이었다.
헌터들은 대부분 부러워하지만, 단점 역시 있었다. 그녀는 마법사들과 협업할 수 없었다.
일행과 떨어졌을 때 필요한 위치 추적 마법이나, 간단한 치료 마법, 심지어는 마법약도 잘 통하지 않았다.
덕분에 꼭 세이나가 나서야 할 일이 있으면 마법사들은 울상부터 지었다.
단순한 강화 마법도 통하지 않으니, 그녀 주변 환경을 바꾸는 방법으로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마법을 쓰려고 했다면.
‘무슨 마법?’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럴듯한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하나, 결론은 있었다.
“나쁜 놈.”
그리 말하고 세이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잔뜩 미간을 구긴 채로,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나빴어.”
디온은 유클레스 후작의 사람이 맞았다.
후작의 명령대로 엘렌을 감시하기 위해 이 거리에 왔으며,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간곡히 말했는데, 라고는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무척 혼란스러웠고 말도 횡설수설했으니까.
그래도 돌아봐 주리라 생각했다.
디온이니까.
그는 늘 세이나를 배려해 주었다.
뭔가를 하기 전에 꼭 그녀의 의사를 묻고, 그녀가 결정을 내린 후에는 따라와 주었다. 제 고집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조금씩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그와 직접적으로 다툰 적도 없었다. 몇 번 삐쳤다고 느낀 적은 있으나 금방 풀려서 늘 먼저 다가왔다. 늘 먼저 자신을 찾아왔다.
항상.
먼저.
바쁘게 생활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항상 그가 옆에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라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문이 열렸다.
기다린 경험도 최근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오늘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당신은 위험해져도 괜찮아요?
“나쁜 놈.”
그래도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후작을 도와 엘렌을 찾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원작대로 두고 본다면 그가 서 있는 구도는 당연히 악역의 자리. 남주인공들을 놀리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수하.
그런데 왜.
‘울고 싶은 사람은 나라고.’
붉게 변해 있던 그의 눈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진짜 나쁜 놈처럼 ‘들켰으니 어쩔 수 없네요.’라고 뻔뻔하게 웃기라도 하지. 마음대로 미워하지도 못하게.
세이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쌀쌀한 공기를 마셔도 답답한 감정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옆집의 1층은 아직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분명, 엘렌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리라.
- 왜 그렇게까지 엘렌을 걱정하죠?
불현듯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상한가?’
착하고 귀여운 아이를 보면 당연히 지켜 주고 싶지 않나. 엘렌과 그녀는 이제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더군다나 ‘유클레스 후작’이라는 공통의 적도 있지 않은가.
‘아, 부모님 이야기를 못 물었네.’
세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헝클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제대로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디온이 후작의 사람으로 판명된 이상, 그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 없다. 세이나는 곰곰이 그가 그동안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윽, 너무 많은데.
‘의논해야겠지.’
고심 끝에 내려간 1층은 텅 비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집에 돌아올 때도 아무도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협회에 일이 있어서 다녀올게. 오늘은 못 돌아올 거야.
식탁 위에 있는 쪽지를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세이나는 오웬의 쪽지를 접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아직 제대로 말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계단을 느리게 내려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말하지. 어떻게 시작하지. 어렸을 땐 계단이 꽤 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1층에 두 발을 댄 이후에도 쉽게 첫 마디를 떠올리지 못했다.
세이나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소파 주변부터 치웠다. 책과 두꺼운 담요,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그러던 중 무심코 책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펼쳐진 페이지 위에는 작은 글자가 있었다.
범인.
디온이 쓴 것이었다.
‘잠깐만. 이 사람 범인 아니잖아?’
그 책은 그녀가 아주 옛날에 읽었던 것이었다. 오웬이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여 거실에 두었는데, 그때 디온도 읽었던 모양이다.
오웬이 책에 장난질 좀 그만하라고 역정을 냈던 기억도 떠올랐다.
‘화낼 만하네.’
아마도 오웬은 이자가 범인인 줄 알고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충격을 받았겠지.
세이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책을 들었다.
삐뚤빼뚤한 필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범인. 즐거워하며 펜을 드는 디온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또 보기 어렵겠지.’
옆집에 숨어들어 ‘범인’이라고 쓰고 달아나는 악역은 없을 테니.
그녀는 그러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책을 닫았다. 그리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심코 올린 시선이 닿은 곳은 협탁이었다. 반짝이는 마정석과 포효하는 드래곤. 어렵게 시선을 돌린 곳에는 두꺼운 담요가 있었다.
어려진 그가 덮었던 것이었다.
“젠장.”
사방이 그의 흔적이었다.
세이나는 제 앞머리를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뜨거운 숨에 이어, 떨려 오는 입술을 그녀는 세게 깨물었다.
“하…….”
꽉 막힌 목으로는 숨소리를 뱉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힘에 겨워 세이나는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다시 눈을 뜨자 또, 램프가 보였다.
또, 또, 또.
안 되겠다.
그리 중얼거리고 세이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들고 있던 것은 대충 집어 던지고, 뛰쳐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볼을 쓸고,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멍하니 시선을 내리자 낡은 돌계단이 보였다.
이곳에도 그가 있었다.
떨리는 입술을 세게 짓이기던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나.”
어둠에 잠긴 거리 위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검은 옷에 검은 외투.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칼을 한 사내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혼자 나와 있어? 오웬은…….”
“미안해요.”
그러고 세이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다음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꽤 멀리 있었는데. 라샤드는 벌써 그녀의 앞에 이른 후였다.
그래서 세이나는 더 입을 떼기 힘들었다.
한마디밖에.
“설득…… 못 했어요.”
겨우 그 한마디밖에.
뒤늦게 고개를 든 자책감이 그녀를 조여 왔다.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다면. 조금만 더 잘 말했더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엘렌을 대하는 디온의 태도는 묘하게 이상했으니까.
그 기묘한 위화감을 미련하게 넘기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윽고 찾아온 마지막 기회마저.
결국, 제 손으로 차 버린 셈이었다.
- 앞으로 찾아오지 말아요.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땐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공원을 벗어난 후였으니 말이다.
감히 다시 그에게 돌아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대체 왜. 그는 그토록 내게 잘해 줬는데.
왜 나는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가장 황당한 것은 도망치느라 그의 마지막 표정도 제대로 못 봤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분명 실망했을 텐데.
“괜찮아.”
어깨를 감싸는 손이 느껴졌다. 라샤드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세이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같은 시각.
또 1명, 다른 사람이 세이나의 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세이나가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거리에 있었다. 손에는 낡은 빗자루를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가 끊긴 것은 세이나가 문을 열고 나온 직후.
세이나를 발견한 그녀는 반갑게 손을 들었으나, 그녀보다 먼저 세이나를 부른 이가 있었다.
엘렌은 굳은 채 라샤드가 세이나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거의 달려가듯 빠른 걸음이었다. 눈 깜짝할 새 세이나의 앞에 이른 그는, 조금 후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남녀는 그렇게 붙어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렌 역시.
‘날 못 봤구나.’
엘렌이 서성이던 곳은 바로 꽃집 앞이었다. 다시 말해, 라샤드의 정면. 그와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로 세이나에게 달려갔다. 엘렌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빗자루를 더욱더 세게 쥐었다.
‘역시, 공작님은…….’
저번에 꽃집을 방문할 때부터 느꼈다. 그리고 함께 마탑에 갔을 때도.
칼만 공작은 좀처럼 세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사라질 때도 정신없이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세이나를…….’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엘렌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손톱으로 철을 긁는 듯한 괴상한 소음, 그러나 그것은 분명 목소리였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하다고 해도 좋을 소리였다. 엘렌이 귀를 막자, ‘그것’이 킥킥거렸다.
「내가 죽이자고 했잖아. 엘렌.」
아주 소름 끼치는 비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