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처음부터.
그 만남부터 거짓이었다.
애절한 고백도, 눈물도, 따라온 후의 구구절절한 사연도 모두 거짓이다.
모든 것은 엘렌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감시하기 위함. 옆집은 좋은 은신처였을 것이다.
라샤드 칼만 공작과 같은 판단.
‘처음부터.’
그래서 그와 거리를 두라고 한 것이었다.
라샤드는 엘렌을 지킬 테니까. 어마어마한 금액을 걸어 그녀의 집을 지킨 이유도 라샤드를 밀어내기 위해서.
라샤드가 그녀의 집에 있으면 엘렌이 사라진 것을 눈치챌 테니.
‘처음부터.’
그래서 그 집주인을 도왔다.
위기에서 구해 주고, 간호해 주고, 음식도 만들어 주었다. 다음 날도 재차 방문하고 간밤에 별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몸은 괜찮은지. 열은 내렸는지.
공작은 찾아오지 않았는지.
‘처음.’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그의 친절은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이 와중에도 세이나는 이해했다.
애초에 그의 친절은 처음 본 사람에게는 과했다. 처음엔 그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목적을 위해 접근한 것까진 머리로 납득할 수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시작이 어찌 되었든 그들은 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엘렌을 데려가야겠다고 말하는 그가.
너무 낯설어서.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세이나는 불에 닿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며 그를 뿌리쳤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세이나가 옆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등을 막고 있던 나무가 사라진 후에도 그녀는 위기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디온이 맞는 걸까? 아니면 그 이후에, 모든 일들도 다 위장? 대체 정체가 뭐지? 디온은…….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가 다가왔다.
“세이나.”
“오지 마.”
디온은 세이나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이. 멈춰 선 구두 끝이 세이나를 또 묘한 감정으로 끌어들였다.
늘 그러했듯이. 그는 늘 그녀를 배려했다.
그 역시 모두 거짓이었던 걸까.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그 집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아, 엘렌을 감시하기 위해? 그럼 어제는?
그 고백은?
생각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은 것은 책임감 때문이었다. 엘렌은, 후작은, 비단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웬은 지금도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라샤드는 후작의 속셈을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여기서 디온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세이나는 다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왜 후작을 돕는 거죠?”
“진정해요. 전부 설명할게요.”
“어떻게 후작을 도울 수 있어요!”
그런데, 좀처럼 감정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떻게 엘렌을 그 인간에게……! 당신도 다 봤다면서요! 후작이 엘렌의 뺨을 때리고! 딸을 사랑해서가 아닌, 이용하기 위해서 찾는 것도, 모두 알잖아!”
“…….”
“엘렌이 죽지 못해 도망친 것도 알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디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닫혀 있는 그의 입술이, 차분한 눈이 그녀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치 그림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늘, 엘렌을 말할 때마다 이런 건조한 태도였다.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 설득해야지.
다시 그 말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래, 모든 것이……. 그간 함께한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을 테다. 세이나는 그 작은 가능성에 매달리기로 했다.
‘그래도, 어떻게?’
디온은 엘렌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보였다. 안타까움도 전혀.
엘렌을 걱정해서 그녀의 집에 남겠다는 말은 확실히 거짓말인 모양이었다. 세이나가 배신감에 이를 악물던 그때, 문득 다른 방향이 떠올랐다.
“마족이 부활해도 괜찮아요?”
마침 그가 입술을 달싹였던 순간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이 다시 다물어진 모양을 주시하며 세이나가 말했다.
“마족이 부활하면 돌이킬 수 없어요.”
그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세이나는 확신에 차서 단호하게 뱉었다.
“마족은 결코 후작의 명령을 듣지 않을 거예요. 사람을 죽이고, 마물을 만들어 이 땅을 더럽히겠죠.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거예요. 기쁘고, 즐거워하겠죠. 원래 그런 족속들이니.”
“…….”
“그들이 마물을 만들었어요. 디온. 내가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바로 그 마물을.”
거기까지 말하니 다시 감정이 끓어올랐다.
절대로 엘렌을 후작에게 보낼 수 없다. 세이나가 다시금 다짐한 찰나.
“그토록 끔찍한 존재예요. 그런데 도대체 왜!”
“하.”
디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또 나왔네.”
세이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시선을 내리더니 한 번 더 날카롭게 실소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분명, 그의 동요를 읽었는데.
마족이 부활하면 세상이 황폐해진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양심일 줄 알았다. 하지만 디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마주친 눈빛은 사나웠다.
세이나는 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그가 세이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엘렌을 걱정하죠?”
“……네?”
“어차피 그냥 옆집 사람일 뿐이에요. 엘렌이 사라져도 세이나의 일상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웃? 뭐 그리 대단한 관계라고.”
차갑게 시작한 목소리는 점점 격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세이나는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그가 간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미 알게 됐으니 외면하기 어렵다. 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엘렌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럼 당신은?”
어깨를 누르고 있는 힘이 강해졌다. 디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위험해져도 괜찮아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고작 어깨를 잡혔을 뿐인데. 세이나는 달려온 직후와 같은 갑갑함을 겪어야 했다.
깊은 바다처럼 늘 침착했던 푸른 눈에 불안이 스며드는 것을 보자마자 그랬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대고 말했다.
“부탁입니다. 세이나. 엘렌 유클레스의 일 따위, 모두 잊어버려요. 이전처럼 지내는 겁니다. 그러고 싶어서 날 찾은 게 아니었어요?”
이어서 지친 한숨. 그의 손이 떨리는 것도 느껴졌다.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요.”
화를 내며 어깨를 잡은 그는 이제 애원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세이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작은 부탁이잖아요. 응? 나랑 있을 때 즐거웠잖아요. 돌아갈 수 있어요. 돌아갈게요. 그러니…….”
세이나는 여전히 숨을 제대로 뱉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서,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뭐지?’
마치 누군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 생각하자마자 돌연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열심히 달린 여파가 이제 온 걸까? 혹은 기절의 전조? 아니, 그렇다기엔 너무 속이 쓰렸다. 이건 마치…….
‘불쾌감?’
갑자기 스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세이나는 그제야 디온이 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본 그의 눈가는 어느덧 붉어져 있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잊어요.”
그리고 세이나는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전부 다.”
다음 순간.
그녀가 거칠게 디온을 밀어냈다.
눈 깜짝할 새 두 사람이 멀어졌다.
가쁜 숨을 뱉으면서도 세이나는 그를 계속 주시했다. 한 번 느낀 불쾌감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평생 겪은 바 없는 감각이었다.
디온도 꽤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아주 잠깐. 곧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세이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앞으로…….”
거기까지 뱉고 세이나는 다시 숨을 골랐다. 의식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앞으로 찾아오지 말아요.”
세이나는 들어올 때처럼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공원을 빠져나간 후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홀로 남은 디온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결국.’
그녀가 떠난 자리를 보던 시선이 그의 손으로 내려왔다.
맞은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저릿했다. 디온은 그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눈가를 스친 그의 손끝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서늘했다.
“하.”
“디온.”
씁쓸한 한숨을 뱉던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갈색 머리의 소녀는 평소와 달리 머리를 하나로 땋아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하고 미소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입을 열자마자 차가운 것이 뚝.
그의 눈에서 떨어졌다.
“눈물…….”
“응.”
디온은 손등으로 제 눈을 꾹 눌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맞아.”
“…….”
“그녀가 맞아.”
작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미움받는 일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은 물론, 모든 이에게, 하물며 신조차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바랐다. 누구에게도 올리지 못할 기도를 하루에도 속으로 수십 번씩 쌓고 또 쌓았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하지만 디온은 여느 때처럼, ‘그럼 그렇지.’라고 조소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묻고 싶었다.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냐고.
“어떻게 할 거야?”
긴 정적을 깬 사람은 이번에도 소녀였다. 디온은 마지막으로 젖은 눈가를 훔친 후 그녀를 돌아보았다.
“후작에게 돌아가자. 할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