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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15화 (115/179)

#115

혹시 이러했을지도 모른다.

몇 시간을 기다린 그는 결국 화가 나서 자리를 떠났다.

식사하고, 차도 한 잔 마시며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따져 물어야겠다 싶어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으리라. 가정이 아닌 바람이다. 혹은 기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은 세이나가 무례를 무릅쓰고 그의 손을 확 붙잡자마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세이나?”

소름 끼치게 차가운 체온. 결코 따뜻한 곳에서 나온 자가 품을 온도가 아니었다. 다시 보니 오늘은 옷도 얇았다. 왜 장갑은 또 없는 건지.

왜 나를 책망하지 않지?

소리를 질러도 이해하리라 각오했다.

현관 앞에 남아 있는 편지를 봤을 때부터 이 장면을 예상하기도 했다. 바로 그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바로 그 현실이 그녀를 더 답답하게 했다.

왜 매번 내게만 관대한 걸까. 라샤드와 오웬은 작은 실수만 해도 빈정대면서. 왜 나는 전부 괜찮은 걸까. 항상 찾아오고, 기다리고, 걱정하고…….

“무슨 일입니까? 표정이 안 좋은데.”

다정한 건지.

그녀의 팔이 다시 움직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디온은 순순히 다른 손도 내주었다. 그의 양팔에 의지하며 세이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푹 숙인 고개는 그의 가슴팍에 닿을 듯 가까웠다. “세이나?”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세이나는 결론에 이르렀다.

‘설득해야 한다.’

라샤드의 대답은 그녀가 가장 원한 것이었다.

디온은 디온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유클레스 후작의 명을 받아서, 계획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해 집에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설득해야 해.’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해야 했다.

겨우 각오를 다잡은 순간 디온이 그답지 않게 빠르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편하게 말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돕…….”

“디온.”

세이나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바로 닿은 곳은 그의 목울대. 거칠게 꿈틀대는 그것 위로 턱이 뚝 떨어졌다.

“……네?”

“디온이잖아요.”

세이나는 가면 너머 그의 눈이 삽시간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고, 손은 그녀가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툭 추락했을 것이다.

디온은 상상 속에서보다 더욱 경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심각함을 잊고 웃음을 흘릴 뻔했다.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처음부터요.”

“어떻게?”

“몸짓.”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디온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제 몸을 살폈다.

“자세. 말투. 태도. 눈빛. 전부 다.”

“……세이나가 관찰력이 좋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모든 것을 체념한 말투. 뒤이어 그가 팔을 뒤로 빼내었다.

가면이 스르륵 내려오는 장면을 세이나는 숨을 멈춘 채 주시했다. 반듯한 이마, 높은 콧대,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 불만스레 구긴 입술에서 시선이 멈췄을 때.

그가 휙 고개를 돌렸다.

다소 쌀쌀맞은 태도였다.

또 뭐가 문제인지. 세이나는 미간을 좁혔다. 비록 며칠간 계속 만나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보는 것은 오랜만이지 않은가.

그는 그런 세이나의 짜증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아직 당황이 남아 있는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린 손으로 디온은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

그의 귀와 옆얼굴이 차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바로 뒤에 있는 노을처럼 선명한 붉은빛이었다. 혹시 그가 반쯤 투명해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갈 만큼이나.

디온은 민망해서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말들을 돌이켜 생각하는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어 얕은 한숨까지 나왔다.

“처음부터 알려 주시지.”

“…….”

“하, 다 말하고 밝히려고 했는데.”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덧붙였다. 견디기 힘든 것을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은 표정. 그 사이 목까지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가면을 벗자 목소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가 알고 있는.

디온.

세이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그를 빤히 지켜보았다.

그가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면서 우습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금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도망치지 않아 얼마나 고마운지. 염색한 검은 머리도 잘 어울렸다.

그리 말하면 또 어떤 얼굴이 될까. 수줍게 얼굴을 붉힐까. 아니면 당연하지 않냐고 웃으며…….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단단히 결심한 각오도, 혼란스러운 기억들도 점점 잠잠해졌다.

사고와 시간이 동시에 느리게 느껴지는 순간 속, 세이나의 눈은 오직 그에게만 박혀 있었다.

이제는 노을보다 더 새빨갛게 변한 뺨.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감아 버린 눈꺼풀. 나직한 숨소리와 마침내 자신을 향하는 눈빛까지.

전부 사랑스러워서…….

“디온.”

그래서 세이나는 더는 그 질문을 미룰 수 없었다.

“유클레스 후작이랑 무슨 사이예요?”

* * *

충동적으로 뱉어 버린 말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조금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당황과 민망함 때문에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돌연 멈추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위화감이 느껴졌다. 디온에게서, 가면에 가려진 후에도 볼 수 있었던 부드러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이상한 오한도 찾아왔다. 세이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클레스 후작과…… 무슨 사이긴 해요? 맞아요?”

불안감이 그녀를 계속 두들겼다. 한 번 더.

“아니죠?”

그녀가 물러났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먼저 대답해요.”

불편한 침묵. 세이나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동시에 스스로를 멍청하게 여겼다.

설득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인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자 바보처럼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의 찌푸린 얼굴은 난처함보다는 짜증이 가득했다.

잠시 후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죠.”

“……정말이죠?”

“제가 그 늙은이랑 무슨……. 이상한 착각한 건 아니죠? 그건 좀 슬픈데.”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미처 입을 떼기 전에 성큼 그가 거리를 좁혔다. 디온이 세이나의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혹시 울었어요?”

‘내가 오버한 건가?’

피부에 닿은 서늘한 체온에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됐다. 디온은 그것마저도 좋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돌아왔다.

다시 살핀 디온은 그녀가 알고 지내던 바로 그 남자였다.

다정한 눈길. 그 안에 있는 애정도 이제 세이나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저 착각일 뿐이었던 걸까.

그는 조금도 비밀을 들킨 이 같지 않았다. 그가 정말 후작의 사람이라면, 첩자라면 이렇게나 여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이어진 대답에는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세이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오해구나.’

터너라는 이름은 정말 흔하다.

비록 그 외에 같은 이름의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세이나는 확신했다.

비록 골목길에서의 그와 덩치도 비슷하고, 걸음걸이도 묘하게 눈에 익었으나 당장 그녀에게 중요하진 않았다.

역시 동명이인이다. 물어보길 잘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멍청하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려던 그때였다.

“후작과는 목표가 같아 잠시 함께 움직였을 뿐입니다.”

제 머리를 쓸어 넘기던 세이나의 손길이 뚝 멎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겨우 가라앉았던 그녀의 정신을 헤집어 놓았다. 세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디온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세이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아, 숨기고 있었던 건 미안해요. 저도 그땐 화가 나서.”

“뭘요?”

“가면이요.”

그의 구두가 가면을 살짝 건드렸다. 어딜 가든 꼭 챙기던 그것은 지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지금은 다 풀렸지만.”

그가 더 가까워졌다. 그에 따라 세이나도 물러서려 했으나 등 뒤에는 어느새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막혔다.

“세이나.”

디온은 그녀를 끌어안기 직전이었다.

아니, 입을 맞출지도 모르겠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연애에 무지한 그녀도 알아차릴 수 있는 묘한 분위기였다.

긴 손가락이 턱을 지나 그녀의 입매를 스치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고작 두 뼘 사이.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세이나는 조금의 설렘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서 세이나는 다른 것을 읽어내고 있었다. 이해관계.

디온과 유클레스 후작의 공통점.

“엘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디온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세이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엘렌을 데려가려고, 온 게 맞아요?”

“…….”

“대답해요! 엘렌을 데려가려고, 찾아왔던 거예요?”

“……네.”

“그럼, 그럼 엘렌을, 데려갈 건가요?”

“네.”

“안 돼요!”

세이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안 돼요, 디온. 엘렌은 후작에게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알잖아요! 그가! 그가 마족을 부활시킬 거예요. 마족이 부활하면 세계는 멸망하고!”

그때, 느닷없이 디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세이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심각한데, 웃어? 웃는다고? 이 상황에서?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네?”

“세이나. 엘렌과 엮이면 안 됩니다.”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는 입술로 그가 말했다.

“잘 생각해 봐요. 엘렌이 이사 오기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죠? 공작도, 마물도, 오웬도 모두 엘렌과 관련되어 있죠.”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마주친 눈빛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그건 반대로, 엘렌이 없으면 세이나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죠. 굳이 위험하게 엘렌을 도울 필요가 있나요?”

“엘렌을 좋아했다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한 번도 그랬던 적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이 비수처럼 그녀에게 꽂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야.

“아.”

디온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노을이 맺힌 금색 눈동자가 불길처럼 일렁이며 그를 쏘아보았다.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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