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14화 (114/179)
  • #114

    14. 각성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잊어버릴까. 어두운 골목길. 때리는 소리. 넘어지는 소리. 쏟아지는 소리. 다급하게 옮기는 발걸음.

    모퉁이를 돌자 나타난 은발 사내는 짜증스레 장갑을 벗고 있었다.

    쿵쿵 울리는 심장. 꽉 깨문 입술. 겨우 숨을 내쉬었을 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인물.

    터너.

    세이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의 행동을 제한한 것은 이번에도 무거운 투구였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자 돌연 쿵! 머리가 울렸다.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웬이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그리고 그 순간.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머릿속이 윙윙 울리는 와중에도 세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복도 저편에서 보라색 머리의 남자가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다.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맬빈은 전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큼성큼 그녀를 지나쳐 후작에게 인사했다.

    “터너 씨도 오랜만입니다. 그간 어디 가셨어요? 안 보이시던데.”

    “오랜만입니다. 맬빈 님.”

    “자네도 왔군.”

    맬빈과 후작, 그리고 그 사내는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근황부터 오늘 회의에 이르기까지. 맬빈은 조금 들뜬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처음엔 퍽 친밀한 사람들을 만나서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너무 오래가니 어색함을 이기기 위한 몸부림 같았다.

    맬빈이 이상한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런 사고들 때문에 수습에 꽤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이번 불꽃이 호평이라 아주 뿌듯하답니다. 투자자들이 어찌나 몰리는지. 몸이 10개라도 부족하다니까요! 하하! 터너 씨도 보셨나요?”

    “아, 저도 멀리서 보긴 했…….”

    “이만 들어가지.”

    후작이 냉정하게 끊자 맬빈이 입을 닫았다. 긴 수다에 지친 얼굴이었던 문지기들이 눈을 번쩍 떴다.

    문을 열리고, 뒤이어 다시 갖가지 음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이나는 문을 보는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칼만 공작.”

    문이 닫히자 그 남자가 빙그르 몸을 돌렸다.

    “우리는 돌아갈까?”

    그의 뒤를 따르던 무리가 갈라졌다.

    그가 부하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고 여유롭게.

    키만큼 긴 양팔을 앞뒤로 흔들면서, 가다가 하품. 살짝 눈도 감긴다. 잔뜩 졸린 표정.

    터너.

    ‘아닐 거야.’

    세이나는 잔뜩 긴장하여 그가 제 앞을 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두꺼운 장갑 안이 땀으로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등줄기에서는 한기가 달리고 있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소름에 그녀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금색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사내의 뒷모습을 좇았다.

    터너.

    ‘흔한 이름이야.’

    발음하기도 쉽고, 쓰기도 쉽다.

    그러나 세이나는 당장 자신이 아는 다른 ‘터너’를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음에도.

    ‘아닐 거야.’

    사고는 그녀의 마음과 다르게 움직였다. 머릿속에 그날의 골목길이 다시 펼쳐졌다.

    디온이 쓰러진 남자를 짓밟자 사내가 말했다.

    - 그, 그보다 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헌터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오랫동안 들어 습관이 되다시피 한 그 말이 그녀를 계속 일깨웠다.

    위가 만약, 유클레스 후작이라면.

    - 뭐라고?

    - 일단 요즘 늦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열심히 알아보고 계신다고.

    알아본다. 유클레스 후작의 명령에 따라 알아볼 일이란 뭘까. 그 의문에 해답을 제시한 이는 맬빈이었다.

    - 이미 누군가 곁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웬의 질문이 떠올랐다.

    - 디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세이나?

    세이나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힘껏 깨문 입술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오직 그 아픔으로, 겨우 일어서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다시 과거가 밀려왔다.

    처음 만난 날. 도서관. 탐지 부서의 연구실 다음. 세이나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왜 자꾸 오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너무 자주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엘렌을 포기한다고 했는데. 엘렌을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세이나는 그가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긴 짝사랑은 미련이 남기 마련이니. 마음을 접고 싶어도 걱정이 되겠지.

    엘렌과 만나지 않는 것은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그러다 점점 그녀의 옆집 사람들과 가까워져서…….

    만약 유클레스 후작의 명으로 이 집을 찾아오고 있던 것이었다면.

    모든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까지의 일, 행동들, 그의 목적과 정체. 엘렌과의 관계.

    만약 디온이…….

    그동안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라면.

    “조용하네.”

    돌연 현실의 오웬이 말했다.

    세이나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몸은 아직 벼락이라도 맞은 듯 계속 굳어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 속, 그녀는 급작스럽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말도 안 돼.

    “우리도 이만 갈까? 아론도 같이 따라 들어갔고.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말도 안 돼.

    “세이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회색 눈이 그녀의 바로 앞에 있었다.

    오웬 라프만.

    성국의 명을 받고, 엘렌을 지켜야 하는 사람. 그는 이미 디온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 말을 전해 주면, 그는 바로…….

    나는 어떡하지?

    “피곤하지?”

    다정한 목소리. 세이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오웬이 픽 웃더니 그녀의 투구를 벗겨 주었다.

    “어!”

    “괜찮아. 아무도 없어.”

    밝아진 시야 속에는 정말 그 외에 아무도 없었다.

    문 쪽에 병사 둘이 지키고 있었지만,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느라 이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세이나는 멍해져 오웬을 빤히 보았다.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눈을 맞추고 세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에 가자.”

    세이나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시선은 계속 아래. 위를 누르는 것도 사라졌건만 머리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봐줬구나.’

    오웬은 눈치가 아주 빠른 사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꿰뚫어 보진 못했겠지만,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바로 파악했을 테다.

    하지만 캐묻지 않았다.

    언젠가는 말해 주리라는 신뢰가 있어 가능한 행동이었다. 세이나의 마음이 더욱더 무거워졌다.

    그 후로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잘 모르겠다.

    세이나는 그저 계속, 계속 걷기만 했다.

    화려한 황궁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도 어느 순간부터 새하얗게 변했다.

    오웬이 멈춰 선 것은 황궁을 벗어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

    무의식중에 그를 따르던 세이나의 걸음도 멈췄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강. 꽃집과 그 옆집. 현관에는 편지가 있었다.

    오웬은 바로 그 편지를 들고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눈에 익은 글씨체가 그녀의 앞에서 팔랑거렸다.

    “아직 있어.”

    그걸 본 세이나의 눈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녀가 입을 틀어막는 사이, 오웬이 편지를 뜯었다. 어젯밤 그녀가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금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게 아직 있다는 건…….”

    세이나는 빠르게 그의 앞을 지나갔다.

    오웬이 미처 그녀를 부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다시 그녀가 나타났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빠른 환복에 오웬이 놀라는 와중, 세이나가 편지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저 다녀올게요!”

    “어딜?”

    그가 그리 물었을 때 세이나는 이미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붉게 물든 거리를 달리는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이 바보가!’

    단언하건대, 생에 가장 빠른 속도였다.

    * * *

    미친 듯한 질주는 공원에 진입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황한 여자, 놀란 아이, 화난 남자가 그녀의 옆을 지나갈 때도 세이나는 속력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라지기만 했다. 지나친 이 중에는 그녀의 뒤로 시선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쫓아오는 이 하나 없이도 세이나는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 내일은 세이프러스 공원에서 만나죠. 정오, 괜찮죠?

    황궁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정오가 넘은 후였다. 공작저에서 식사를 하고, 옷을 갖춰 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 공원 어디요?

    세이프러스 공원은 꽤 넓은 곳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보고 디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가장 높은 곳.

    회상이 끝났을 땐 벌써 세이프러스 공원을 가로지른 후였다.

    세이나는 숨을 헐떡이며 제 무릎을 짚었다. 바로 앞에는 반듯한 돌로 만들어진 길이 펼쳐졌다.

    그녀의 시선이 길을 따라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평소보다 유달리 붉은 노을. 커다란 나무와 벤치도 보였다.

    “하아……. 하…….”

    그리고 거기에 앉아 있는 남자.

    “말도 안 돼.”

    사내의 그림자를 보던 세이나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급히 숨을 몰아쉬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먼 거리.

    그러나 세이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차라리 아니길 바랐다. 이미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뛰어오는 내내 수없이 기도했다.

    그런데, 아직 있었다.

    정오부터 기다린 걸까?

    아니면 그 전부터? 3시간? 4시간? 어마어마한 또라이. 그 표현이 정확하다.

    몇 시간이나 지나도 안 오면 집으로 찾아왔어야지!

    왜.

    “왜…….”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거친 숨을 쏟고도 진정이 안 되어 세이나는 계속 허리를 숙여 심호흡을 이어 갔다.

    다시 눈꺼풀을 치켜올리자 남자가 언덕을 다 내려온 것이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 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다리도 떨리고, 몸에 힘도 없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잊지 않았다.

    “왜 아직 기다리고 있어요! 바보예요!?”

    “늦었네요.”

    “……안 오면 집에, 하, 집에 찾아왔어야죠!”

    “생각 좀 하느라.”

    검은 가면은 오늘도 그의 얼굴을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밉살스러운 모양. 그 아래의 입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저도 늦게 왔어요.”

    기가 막힌 대답에 세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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