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13화 (113/179)
  • #113

    상대는 그 대단한 공작님이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 후보에, 나라에서 손꼽히게 잘난 분이시다.

    여주인공의 운명인 엘렌이면 몰라도.

    ‘엑스트라가 무슨.’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그를 실컷 놀려 먹은 이력도 있다. 살금살금 지하실을 걷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세이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투구를 벗었다. 겹쳐 입은 옷도 벗으려던 와중, 문득 목을 만지게 되었다.

    그의 손끝이 스쳤던 자리였다. 아직도 그곳이 뜨거운 것 같다.

    ‘아닐 거야.’

    세이나는 다시 투구를 덮어썼다.

    “저 걷는 것 봐 주세요. 공작님.”

    그날 오후는 내내 공작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름 기사답게 의젓하게 걸어 보다가 의도치 않게 아론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라샤드는 차마 대놓고 웃진 못하고, 고개를 돌려 끅끅대었다.

    “갓 기사가 된 신입 같다.”라는 평가를 받았을 땐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세이나는 일단 잉크부터 꺼냈다. 가진 종이 중 가장 빳빳한 것들을 골라, 정성 들여 글을 썼다.

    미안해요. 정보상씨.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 만날 것 같아요.

    그 짧은 문장을 쓰는 데 꼬박 30분을 보냈다. 그러고도 세이나는 한참 고민한 후에 펜을 쥐었다.

    내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요.

    “만나서…….”

    만나서 이제는 확실히 해야겠다. 세이나는 그리 다짐했다. 도대체 본명이 무엇인지. 가면은 언제 벗을 건지. 내 부모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 귀족들과는 무슨 사이인지. 후작과는…….

    내일이 안 되면 집 앞에 편지를 남겨 줘요. 다음 약속 시간을 꼭 남겨 줬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언제 돌아올 것인지.

    안 남기면 잡으러 갈 거예요. 알겠죠? 저 엄청 끈질겨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음 날 이른 새벽. 세이나는 현관 문틈에 편지를 꽂아 둔 후 집을 나섰다.

    부디 그가 오래 기다리지 않기를 바라며.

    * * *

    “어때요? 이제 괜찮아?”

    “감쪽같아. 기사 그 자체야. 나는?”

    “너무 잘 어울리는데. 오웬. 혹시 우리 적성을 잘못 찾은 게 아닐까요? 하, 너무 용맹한걸.”

    “……둘 다 별로인데요.”

    냉정한 일침에 오웬과 세이나의 눈빛이 동시에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아론은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웬이 쓰고 있던 투구를 살짝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연기에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자기 암시. 알겠어?”

    “맞아요! 그리고 아론도 딱히 막! 응? 부관의 표본 같진 않거든요?”

    “무, 무슨 말입니까. 절 보세요! 이 안경! 이 눈빛! 누가 봐도 이성적이고 예의 바른 부관이 아닙니까. 그렇죠, 각하?”

    “……후자는 아닌 것 같은데.”

    “아, 벌써 의욕 떨어져. 걸리면 다 네 책임이야.”

    오웬이 투덜거렸고, 세이나가 끄덕였다. 특히 그녀는 지금 전에 없는 긴장 상태였다.

    내가 황궁에 들어가다니!

    소시민으로 살아온 지난 25년의 인생에 비하면 너무나 특별한 사건이었다.

    어제만 해도 괜찮았는데, 황궁을 눈앞에 두니 갑자기 몸이 뻣뻣해졌다. 후작을 만나는 것보다 황궁이 더 무섭다.

    내가 황궁에 가다니!

    그래도 오웬이 옆에서 위로해 줘서 조금은 풀렸는데, 아론 때문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웬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세이나. 저기 있는 저, 문 앞에 기사 보이지? 쟤 누군지 궁금해?”

    “음, 아뇨.”

    솔직히 있는지도 몰랐다. 오웬이 씩 웃으며 말했다.

    “봐, 그런 거야 아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라고.”

    엑스트라. 지난 몇 달간 수십 번도 더 곱씹은 단어였다. 엑스트라. 맞아, 나는 엑스트라다.

    ‘……그런데 이미 황성에 들어온 것부터 엑스트라는 아니지 않아?’

    거기다 정체도 숨기고 있다.

    세이나는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며 라샤드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오웬이 가리켰던 기사들을 스쳐, 커다란 문을 지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 괜찮나?’

    세이나는 열심히 좌우로 눈을 굴렸다.

    성 내부에는 꽤 사람이 많았다.

    줄지어 걸어가는 이들은 하녀들일 테고. 한쪽 구석에는 귀족 청년 셋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기사들도 곳곳에 보였다. 그중 1명과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성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높은 석벽과 제국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휘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관목과 정원수들. 잘 갖추어진 정원 곳곳 꽃도 피어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딱 황궁이네.’

    부족하거나 실망스럽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의 키 몇 배나 되는 거대한 기둥들과 새하얀 석벽, 정교한 조각상들은 분명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예상했던 대로였다.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압도되는 분위기. 누구나 한 번쯤 상상했을 멋진 성이었다.

    거대한 분수를 지날 무렵 세이나가 라샤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회의는 왜 하는 거예요?”

    “아, 그렇네. 그걸 안 물었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이없는 질문을 하기에 딱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수도 내에서 마물이 발견됐다더군.”

    “또 점술가는 아니죠?”

    라샤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마법사들이야. 실험을 위해서 작은 마물들을 들이다가 덜미를 잡혔지.”

    그 말에 오웬이 옆에서 혀를 찼다. 세이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급히 잡아들이긴 했지만, 이제 곧 소문이 퍼질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도 운이 좋았지.”

    “그럼 결계가 약해졌다고 공표하는 건가요?”

    “아마도.”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세이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당장 앞으로 펼쳐질 일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무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도를 지켜 온 결계였다.

    전쟁 중이 아니니 당장 위협은 없겠지만, 결계가 상징하는 바가 너무 컸다.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질 것이고, 이익에 눈이 먼 이들이 수도에 마물을 들여오면…….

    ‘한동안 공작님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겠어.’

    그는 결계의 상태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1명이었다. 황제와 돈독한 사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니 앞으로 수습을 돕지 않을까.

    “그런데, 후작은 왜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겁니까?”

    앞서 걸어가던 라샤드가 멈췄다. 그들은 어느덧 본성의 입구에 이르러 있었다.

    “내가 의문스러운 점이 그거다.”

    그가 세이나와 오웬을 돌아보았다.

    “후작은 마법사도 아니고, 심지어 수도의 일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 그런데 참석자 명단에 있더군. 대신들도 왜 오는지 모른다고 했어.”

    “전에는 없었던 일인가요?”

    “없었어.”

    세이나는 그를 따라 미간을 좁혔다.

    “……불길하네요.”

    “두 분 모두 지금부터는 조심해 주세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알겠어요. 오웬, 들었죠? 이제 수다 떨면 안 돼요.”

    “하, 너무 어려운데.”

    일행은 마지막 점검을 한 후 다시 걸어갔다.

    본성 역시 예상대로였다.

    수많은 기둥과 커다란 창문들. 무심코 시선을 올리니 화려한 천장화가 보였다. 흰 대리석과 황금빛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었다.

    세이나는 열심히 자기 암시를 시작했다.

    나는 기사다. 나는 기사다. 다채로운 빛이 쏟아지는 복도를 지나, 조각이 있는 아치를 몇 개를 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거대한 문 앞이었다. 들어가기 전 라샤드가 낮게 일렀다.

    “꽤 걸릴 거야. 너무 늦으면 먼저 돌아가.”

    세이나는 고개를 까딱하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아, 인사해야 하는데, 깨달았을 즈음엔 이미 라샤드가 몸을 돌리고 있었다.

    입가에 걸린 가벼운 미소가 있었다. 세이나는 깨달았다.

    아, 인사해야 하는 것 맞네.

    ‘기사 따위. 안 하길 잘했지.’

    예의와 규범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이런 황송한 공간도, 무거운 옷도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하루쯤은 버틸 수 있다. 세이나는 오웬을 따라 벽에 등을 붙였다.

    문은 이후로도 여러 번 열렸다.

    젊은 귀족과 늙은 귀족. 그리고 또 늙은 귀족이 들어갔다.

    짧은 인사가 들리고, 문이 닫힌 후 침묵.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 목소리 중에는 라샤드도 있어,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저럴 땐 다른 사람 같다니까.’

    문득 그가 소설을 읽는 모습이 떠올라 미소 짓자 돌연 오웬이 그녀의 팔을 툭 건드렸다.

    세이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온다.”

    복도 끝에, 그가 나타났다.

    * * *

    투구는 시야를 꽤 가리는 물건이다.

    물론, 시야가 확보되는 투구도 있겠지만 세이나는 지금 쓰고 있는 것에 큰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의 머리가 작다는 이유도 있었고, 익숙하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그 와중에도 똑똑히 보였다.

    살짝 처진 눈과 눈가에 있는 주름들. 그 바로 위에는 시원하게 뻗은 회색 눈썹과 마찬가지로 주름이 남은 이마가 있었다.

    꾹 닫힌 얇은 입가에는 회색 수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도 회색이었다. 그는 꽤 나이가 많은 사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도 안 닮았어.’

    엘렌과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을 마지막으로 훑으며 세이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딱. 딱. 단단한 바닥을 때리는 지팡이 소리가 요란하다. 이어 들리는 발소리는 저번과 같았다.

    ‘유클레스 후작.’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을 찰나에 그가 세이나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폐하께서는?”

    마찬가지로 들어 본 바 있는 목소리였다.

    도서관에서 먼발치에 있던 그가 드디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고개를 틀어 그를 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와 그 사이에는 장벽이 있었다. 유클레스 후작도 라샤드처럼, 수하들을 거느리고 온 것이다.

    라샤드보다 수도 더 많았다.

    습관적으로 그들을 훑어보던 세이나의 시선이 어떤 사내에게서 멈추었다.

    제법 덩치가 큰 자였다.

    자칭 지적인 이미지인 아론과는 정 반대. 학자보다는 전사에 가까운 체형이다.

    갖춰 입은 비싼 옷이 신기할 정도로 안 어울리는 작자였다. 턱 주변의 수염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지저분하다.

    다른 기사와 달리 삐딱하게 서 있는 자세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어? 잠깐만. 저자…….’

    그때, 유클레스 후작이 뒤를 돌아봤다. 세이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쿵쿵쿵. 심장이 갑자기 바삐 뛰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유클레스 후작 외에도 그녀가 이전에 본 사람이 있었다.

    설마.

    그녀가 작게 중얼거린 순간, 유클레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먼저 돌아가 있게.”

    세이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유클레스 후작은 아직도 그 남자를 보고 있었다. 건장한 체형. 두툼한 손.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설마.

    “터너.”

    그 무거운 음성이 세이나의 가슴에 쐐기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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