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12화 (112/179)
  • #112

    아론은 문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읏, 더는 못 해요……!”

    지친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다. 뒤이어 여자는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아론은 문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몸을 숙이며 문에 귀를 가져갔다. 잠시 후,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안 되겠어?”

    그의 상관이자 이 저택의 주인, 라샤드는 매우 걱정스러운 어조였다. 짧은 침묵 후 여자가 다시 긴 한숨을 내뱉었다.

    “무리예요. 하, 너무 더워…….”

    “그럼 벗어야겠군.”

    아론은 눈을 번쩍 떴다.

    벗어? 뭘?

    온갖 상상이 그의 뇌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노크를 해야겠다는 계획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부드러운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한숨이 이어졌다.

    “……못 움직이겠어요.”

    “도와줄게. 이리 와.”

    아론은 다시 얼어붙었다. 방 안에 있는 이는 두 사람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오웬 라프만, 그 유명한 헌터의 목소리였다. 아론의 눈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셋이서 뭘? 뭘 도와주는데?

    “조금만…… 천천히, 아……!”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파욧!”

    쿵!

    큰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론은 이를 악물고 양 무릎을 매만졌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단단한 바닥과 부딪친 무릎이 미친 듯이 아팠다.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곧 그는 문 너머가 조용해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헉, 숨을 들이켜자마자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오, 잠깐만.’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확 가리며 외쳤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또 온갖 상상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닿은 양 볼이 무척 뜨거웠다.

    어떡하지? 그는 숨을 고르며 변명을 떠올렸다. 각하의 사생활을 지켜 드리지 못해 몹시 유감입니다. 취향은 존중해 드리…….

    “뭐 하나?”

    그때,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예?”

    “왔으면 노크를 해야지.”

    아론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바로 위, 라샤드가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늘 아침에 본 복장 그대로다. 어라?

    “아니. 아니 그게…….”

    “아, 왔어요?”

    그리고 방 안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론은 실례를 무릅쓰고 몸을 숙여 라샤드의 뒤를 확인했다.

    물론, 아직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아서 손은 내리지 못했다. 손 틈 사이로 보인 방 안에서는…….

    세이나 로힐이 의자에 앉아 만세하듯 양팔을 위로 뻗고 있었다. 두꺼운 천 갑옷이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에 걸려 있다.

    “천 갑옷?”

    “네. 갑옷.”

    “……뭐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러자 큰손이 그녀의 어깨 위로 불쑥 튀어나왔다.

    오웬이 힘껏 갑옷을 잡아당기자 세이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아프다니까!” “좀 참아!” 시끄러운 실랑이를 들으며, 아론은 갑옷 아래에 있는 또 다른 천 갑옷을 발견했다.

    2개. 2개다.

    “체격에 맞는 기사 정복을 못 찾아서. 그냥 입히기엔 어색해 보이고. 갑옷을 덧입혀서 풍채를 좋게 만들려고 했는데, 쉽지 않군.”

    “아…….”

    “비슷한 사이즈를 억지로 입히니 그렇죠! 그러게 내가……! 으아앗! 아파요! 그만!”

    “좀 더 참아 봐!”

    하필이면 왜 저런 걸 입었는지. 덧씌운 갑옷은 앞에 단추도 없었다. 오웬이 더 세게 갑옷을 잡아당겼다.

    세이나가 이를 악물고, 아론이 겨우 정신을 수습할 무렵.

    쾅! 오웬이 뒤로 쓰러졌다.

    “휴, 겨우 벗겼네.”

    “으으, 등 아파. 피부 벗겨진 건 아니겠죠?”

    “괜찮아. 사람은 아주 튼튼해.”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요…….”

    세이나는 투덜거리며 남은 천 갑옷을 벗었다. 그런데, 그 안의 옷도 만만치 않게 두껍다. 세이나가 투덜거렸다. “하, 더워.”

    “그, 그, 그런 거군요! 하하하! 난 또! 하하하!”

    “또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아론이 요란한 웃음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세이나는 그와 반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저래?’

    손은 착실히 단추를 풀어 가고 있었다. 한 꺼풀 더 옷이 흘러내리고 나서야 그녀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건장한 기사는 포기해야겠어요. 두 번 건장했다가는 쪄 죽겠어.”

    내일, 드디어 유클레스 후작과 만난다.

    정확히는 ‘만난다’가 아닌 ‘보다’에 가까웠다.

    일전처럼 납치도 고려해 봤지만, 황성에서 무력을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

    그 귀하신 얼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 한번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도서관에서 마주친 적은 있으나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으니.

    문제는 이쪽에서 그를 보면 그도 이쪽을 주시하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숨길 수 있으면 숨기는 편이 좋았다.

    최대한 꼼꼼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알도록.

    그리하여 결정한 것이 남장이었다.

    평소 그녀의 인상과 다른 아주 건장한 남자. 키는 높은 신발을 신으면 되고, 얼굴은 가리면 된다. 문제는 몸이었다.

    그녀는 엘렌보다는 체격이 좋은 편이었지만, 평균적인 남자보다는 확실히 왜소했다.

    그래서 두꺼운 갑옷을 껴입었는데, 어쩐지 어색해 보였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이것저것 입다가…….

    “그냥 평범하게 가도 될 텐데요.”

    한껏 웃어젖히던 아론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세이나는 장갑까지 벗었다. 손안에 땀이 흠뻑이다.

    “투구까지 쓸 예정이라. 머리는 큰데 몸은 작으면 이상하잖아요.”

    “설마 그렇게 눈썰미가 좋을까요.”

    “혹시 모르죠.”

    ‘악당 보스니 말이야.’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유클레스 후작은 악당 포지션이 확실하다고 세이나는 추측했다.

    예전 마탑주와 친한 것도 그렇고, 마족의 부활. 거기다 행적을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것도 꽤 비범하다.

    ‘문제는 목적이 뭐냐는 거지.’

    마족의 부활을 꾀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 마족을 부활시켜, 대체 무엇을 하려는 속셈일까?

    예전 마탑주는 마물이 없는 세상을 원했다.

    유클레스 후작도 과연 그럴까?

    “무슨 일로 왔지?”

    “아, 라프만 님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샤드의 물음에 아론이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건지, 그는 일어서면서도 조금 비틀거렸다.

    “집사라고 하던데요.”

    “아, 드디어 왔군.”

    “뭔가요?”

    “주문한 물건이 있어서. 머리 다시 묶어 줄까?”

    “아, 제가 할게요.”

    세이나는 옷을 벗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풀었다. 머리끈을 입에 물고, 머리를 다듬다가 오웬과 눈이 마주쳤다.

    ‘왜 실망하는 표정이지?’

    “……난 이제 가 볼게. 저녁 전에는 집에 돌아갈 거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아서요.”

    두 사람이 떠난 방 안에는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세이나는 괜히 묶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라샤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몇 시간 전, 현관 앞에서 마주쳤던 순간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처음 시선이 닿았을 땐 괜찮았는데, 그다음부터…….

    “다시 입어 보겠어?”

    꼬인 머리카락이 검지를 빽빽하게 덮었을 즈음 라샤드가 말했다. 세이나는 끄덕이며 떨어진 옷 중 가장 두툼한 것을 입었다.

    그런데, 땀 때문에 손이 미끄러워 단추가 잘 채워지지 않았다. 단추가 너무 작고 단춧고리가 빡빡한 탓도 있었다.

    첫 번째에서 다섯 번쯤 미끄러지자 라샤드가 다가왔다.

    그가 세 번째 단추를 채웠을 때, 세이나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낮에 디온을 만나고 왔어요.”

    그의 손이 멈추었다.

    코앞에서 마주한 그는 낮과 달리 차분했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세이나는 긴장감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고.

    “그래.”

    그의 시선이 다시 내려갔다. 네 번째 단추는 지금까지와 달리 쉽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단추가 아슬아슬하게 걸렸다가 떨어지는 과정을 세이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내가 하겠다고 할까? 하지만 그의 손이 끊임없이 움직여서 끼어들기도 어려웠다.

    ‘대단한 인내심이네.’

    짜증도 내지 않았다.

    침착한 눈으로, 단추만 계속 쏘아보고 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단추가 제자리에 끼워진 후.

    “어땠어?”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냥…….”

    세이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습니다.’에 담긴 속뜻은 대체 뭘까.

    처음엔 긍정으로 알아들었으나 되새길수록 혼란스러웠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우울하게 답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만약, 디온이 후작의 사람이라면…….”

    “설득해야지.”

    그 무렵 이미 단추는 모두 채워진 뒤였다. 라샤드가 살짝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우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렇지?”

    낮은 목소리. 그리고 이어진 부드러운 미소에 세이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네. 설득해야죠.”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세이나는 그를 따라 웃어 보인 후, 다음 옷을 걸쳐 입었다.

    “그런데 이런 걸 진짜 하고 다녀요?”

    다음 순서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큰옷과 큰옷, 큰 장갑과 큰 부츠도 신었다.

    최종 단계는 큰 투구였다.

    무거운 것을 머리에 쓰자 시야가 반쯤 가려졌다. 반쪽짜리 세상에서 라샤드는 그녀의 팔 매듭을 정리하고 있었다.

    “답답해요.”

    “얼굴이 알려지는 것보단 나아.”

    정성스러운 손길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공작님은 인내심도 많고 꼼꼼하구나. 모범생 같다. 세이나는 생각했다.

    그 손이 옷깃을 스쳤을 땐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었다. 동시에 라샤드의 손이 떨어졌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이나, 혹시…….”

    숨결이 느껴질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 그의 손이 살짝 목에 닿은 것을 세이나는 느낄 수 있었다.

    몹시 뜨거운 체온이었다. 그의 눈빛만큼이나.

    “네?”

    “……아니야.”

    라샤드가 휙 멀어졌다. 돌아선 그의 등을 보며 세이나는 한번 겪었던 예감을 느꼈다.

    혹시 공작님이……?

    ‘정신 차려, 세이나 로힐.’

    그러나 아주 잠깐. 그녀는 곧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 보냈다.

    ‘자신감 과잉도 정도껏 해야지.’

    전부 디온 때문이다.

    혹시 같이 먹을 때 음식에 이상한 것을 섞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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