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마차가 빗물을 흩뿌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으으, 큰맘 먹고 입었는데.”
빠르게 지나치는 마차를 보며 세이나는 치마를 잡아당겼다.
아슬아슬하게 튀어 오른 빗방울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미 치맛단은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는 세이나와 디온이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들은 어떤 여관 앞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그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건물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거리를 뛰어다니는 이들 중 우산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느닷없이 쏟아진 비였다.
세이나는 치마를 정리하다 옆을 보았다. 그 순간, 디온의 고개도 휙 돌아갔다.
벌써 열 번은 더 이랬던 것 같다.
같이 걷는 내내 옆얼굴에 붙은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이 있나 따라 돌아보면, 이렇듯 바로 피해 버린다.
‘효과가 있나?’
미인계 작전은 성공인 듯했다.
보기 싫은 것을 계속 볼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이상해서 계속 보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공작님과 했던 요리 대결에서 알 수 있듯, 디온은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디온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평소에도 빤히 보는 시간이 길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집요하다. 말수도 적어졌다.
덕분에 세이나도 긴장해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읽던 연애 소설을 조금이라도 참고해 둘걸. 거기엔 이런 상황이 많이 있을 것 같았다.
디온은 자신을 좋아하니.
‘좋아하는…… 게 맞겠지?’
혹시 검은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다른 여자를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내가 지금 이상하게 넘겨짚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세이나는 그가 묘사한 이상형을 되짚어 보다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맞는 것 같다. 아마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사람에 대한 호감은 감정의 문제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 걸까 싶으면서도 무작정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징조나 계기도…….
전혀 모르겠다.
그는 처음부터 친절했으니까.
상상치도 못해서인지 아직도 세이나가 느끼는 감정은 감동보다는 놀라움에 더 가까웠다.
그의 마음에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지도. 심지어는 자신의 감정마저도.
‘모르겠어.’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디온의 입장이면 어떤 마음일까. 그런 상상도 해 봤지만, 썩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이미 알고 있는 이름조차도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신분과 사는 곳, 저 ‘정보상’에 관해서도 일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세이나는 곤혹스러움과 난처함을 느꼈다.
다음에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그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정보상씨.”
드디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세이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말했다.
“이제 디온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면 안 될까요?”
그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비에 젖은 머리칼 사이 살짝 보인 은빛을 세이나는 놓치지 않았다.
“제가 사과하고 싶어서요.”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후 침묵이 이어졌다.
저를 빤히 들여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그녀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그냥 하는 말처럼 들렸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세이나는 진심으로 디온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저 가면을 치우고 제대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상한 가짜 이름들도, 저 철벽같은 검은 외투도 지우고 단둘이.
그런 분위기에서, 편하게, 예전처럼 대화하고 싶었다. 그가 모든 것을 자신에게 털어놓아 줬으면 했다.
세이나는 무겁게 다시 입을 열었다.
비는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나기치곤 너무 길고 무거웠다. 마치 디온과 처음 만난 날처럼.
“어……. 디온은, 검은 머리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엘렌은 아닌 것…… 같아서요.”
“…….”
“그러니까, 당신은 모르는 이야기겠지만 제가 확실히 실수했어요.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요.”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요즘 그의 곁에 서면 종종 이랬다.
별것 아닌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내니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세게 치맛자락을 쥐었으나 그래도 떨림은 쉽게 멎지 않았다.
“계속 안 보이니 걱정도 되고…….”
“…….”
“사실 디온이 지내는 동안 책을 많이 사 왔어요.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도 모르겠고. 선물로 받은 잼도 많아서 처치 곤란이에요.”
“……별로 대단치 않은 이유네요.”
“충분히 대단한데요.”
“글쎄요. 크게 진심이 안 느껴져서요.”
세이나가 황당해서 그를 올려다보자 또, 홱 시선이 돌아가 버린다. 그의 갸름한 턱선을 보던 세이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의 목울대가 작게 꿈틀거렸을 때.
세이나가 그의 팔뚝을 확 붙들었다.
“보고 싶어서요.”
빗소리에 묻혀 못 들었을까 봐,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가면 아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세이나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강렬한 눈동자가 그를 꿰뚫듯 응시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오직 사나운 빗소리만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너무 노려봐서 눈이 따가운 것을 느끼면서도, 세이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또 피하면 확 잡아당겨야지.
먼저 팔을 잡길 잘했다. 내심 뿌듯해하던 그때, 그가 말했다.
“쉽게 알려 드릴 수는 없죠. 저번에도 제가 손해 보는 장사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정보를 제공했지만, 세이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으니.”
“뭘요?”
“이상형.”
아, 또 그거냐.
그가 몸을 돌려 세이나를 바로 마주 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상황이 왔는데도 세이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좋아요. 이제 시원하게 말해 줄 테니 똑똑히 들어요.”
그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숙였다. 세이나는 웃고 있는 그의 입매를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솔직한 사람이 좋아요.”
다시는 이걸 언급하지 못하게 확실히 해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거짓말도 안 하고. 숨기고 있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줬으면 해요. 내가 불안해지기 전에.”
“…….”
“질질 끄는 것도 싫어요. 나는 보다시피 복잡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상대도, 내게 솔직하게 전부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서로 믿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수 있잖아요.”
“…….”
“그런 의미에서 정보상씨는 꽝이네요.”
그렇게 말하고 세이나는 그를 놓아주었다. 이 정도로 잘 말했으니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다.
‘빨리빨리 정체를 밝히고 돌아가자, 응?’
그와의 산책은 즐겁지만, 검은 가면은 더는 사양이다. 이상하게 돌려 말하는 대화도 별로. 외면은 더더욱 싫었다.
세이나는 지금 느껴지는 불안함부터 빨리 없애고 싶었다. 정보상으로서의 디온은 정말 별로다.
얼굴은 없고, 이름은 거짓이라니.
갑자기 사라질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이지 않은가.
“그거면.”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질 무렵,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거면 돼요?”
이상한 질문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이나는 디온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미처 그녀가 대답을 떠올리기도 전에 나온 단호한 한 마디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디온은 오늘은 이만 헤어지자고 했다. 세이나가 무슨 일 있냐고 묻자.
- 준비가 필요해서요.
‘무슨 준비?’
캐묻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그가 너무 단호했다. 세이나는 결국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녀왔…… 어? 공작님?”
현관문을 열자마자 넓은 등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렸고, 뒤이어 그에게 가려져 있던 인물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론도 왔네요?”
“오? 집주인 분! 오늘은 좀 다르네요?”
아론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의 시선이 치맛자락으로 향하자 세이나는 괜히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라샤드의 붉은 눈도 그녀를 진중하게 훑었다.
“……어디 다녀와?”
“아, 잠시 약속이요.”
“누구와?”
“어? 세이나? 일찍 왔네.”
대답하기 직전, 오웬이 식당 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세 사람을 보더니 곧 빠르게 걸어 세이나에게 다가왔다.
세이나는 엉겁결에 그에게 끌려 라샤드를 등지게 되었다. 오웬이 작게 속삭였다.
“반응은 어땠어?”
일단 세이나는 그에 맞춰 주기로 했다.
“곧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네. 아마도?”
일단 세이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는 긍정의 의미이지 않나. 준비는 집에 돌아올 준비일 수도 있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웃기도 했고. 당장 내일 다시 만날 약속도 잡았다.
아마 내일이, 아주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세이나는 직감했다.
“친구를 만나고 왔어. 그렇지?”
대화를 끝낸 오웬이 웃으며 라샤드를 돌아보았다. 오늘의 공작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의 압박감 때문에 세이나는 얼결에 끄덕였다.
“아, 네. 친구 만나고 왔어요.”
“…….”
“그나저나…… 바빴다면서요? 황제 폐하는 잘 만났나요?”
대답은 없었다.
아론이 까치발을 들어 라샤드를 살폈다. 오웬은 뭐가 즐거운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와중에 그의 두 눈이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있어 세이나는 더욱 불편함을 느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저렇듯 무섭게 노려보고 있으면 뒷걸음질 치고 싶어진다.
세이나는 당혹스러움과 의아함, 그리고 약간의 억울함을 느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그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돌렸다.
“아직. 그 전에 상의할 게 있어서.”
“상의?”
“내일, 유클레스 후작이 황성으로 올 거야.”
먼저 반응한 쪽은 오웬이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그래, 그동안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수도에 온 이후부터, 라샤드는 열심히 유클레스 후작의 행적을 좇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득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는 신전 도서관. 경매장에서도, 귀족들의 연회에서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후작을 만날 기회네요.”
“이번에 제대로 미행할 사람을 붙일 계획입니다. 사람도 제대로 선별해 뒀고. 만약의 일에 대비할 방책도 세워 뒀습니다.”
아론이 뒤에서 덧붙였다. 세이나가 알겠다고 끄덕이자 라샤드가 물었다.
“따라오겠어?”
“제가요? 황성에?”
“내 기사로 따라오면 돼.”
“하지만 내일은…….”
디온과 만나기로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