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오웬은 턱을 괸 채 몇 분 전을 회상했다.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 들어간 그녀의 방은 예상과 같았다.
침대 하나. 협탁 하나. 옷장 하나. 책장 하나.
딱 필요한 가구들이 필요한 위치에.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다소 낡기도 했지만 관리를 워낙 잘해 고풍스러운 멋도 있었다.
이 집의 다른 가구들이 그렇듯이.
그러나 또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 연 옷장은 예상과 매우 달랐다.
아니, 예상 이상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본 옷장 중 가장 삭막했지.’
흰색. 검은색. 갈색. 그 외의 색은 없었다. 모양도 모두 비슷했다. 장식이라곤 하나 달리지 않은 밋밋함. 효율성에 중점을 둔 디자인.
‘헌터의 옷장은 이렇다!’라고 책에 실어도 될 구성이었다. 활동 시 쉽게 더러워지니 어두운색으로 사세요. 한마디 덧붙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희망은 있듯, 그 삭막한 곳에서도 하나 건질 만한 것은 있었다.
‘이제 내려올 때가 됐는데.’
그리 생각한 찰나, 마침 소리가 들렸다. 오웬은 들뜬 걸음으로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한 광경은…….
이번에도, 예상 이상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요.”
“응, 그래 보여.”
오웬이 눈을 접으며 웃자 세이나가 민망한지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자 사르락 소리를 내며 긴 치맛자락이 함께 움직였다.
저걸 찾아냈을 때 얼마나 다행이다 싶었는지.
옷장 깊숙한 곳에 있던 남색 드레스는 다른 가구들과 같이, 제법 관리가 잘되었다. 색도 바래지 않았고, 결도 새것처럼 깨끗하다.
무엇보다 세이나와 아주 잘 어울렸다.
안나와 함께 나갔다가 얼떨결에 샀다고 했던가. 잘은 모르지만 안목이 괜찮은 여자라고 오웬은 생각했다.
세이나는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꾸미면 무척 화려할 인상이었다. 특히 그녀의 금빛 눈은 마주치면 바로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
과한 장식은 괜히 깔끔한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단순한 디자인이면 언제 꺼내도 괜찮을 테다.
너무 밝지도, 너무 칙칙하지도 않은 푸른빛은 그녀의 흰 피부와도 잘 맞았다.
의상실에 가서 새로 맞춰야 하나 고민했는데, 입을 만한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같이 사러 갔으면…….
‘아, 그 방법이 제일 빨랐겠군.’
디온 프라벨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저를 찾아오는 것을 상상하며 오웬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와. 머리 만져 줄게.”
그러나 오웬이 소파로 돌아가 준비했던 빗을 든 후에도, 세이나는 거실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녀의 걸음이 너무 느렸다. 고작 옷을 바꿔 입은 것일 뿐인데.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작은 신발을 신기자 어색하게 걸어 다니던 강아지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오웬이 다시 웃음을 흘릴 즈음, 그녀가 기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정말 할 줄 알아요?”
“응.”
“……머리 묶을 줄 아는 남자는 처음 봐요.”
“그래? 영광이네.”
“그런데, 음, 있잖아요. 혹시 지금 오웬이 하려는 작전이 그…….”
“응. 맞아. 미인계.”
그녀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부끄러우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세상일 다 겪은 사람처럼 말하면서. 세이나 로힐은 정작 이런 부분에서는 많이 약한 듯했다. 그녀가 맑은 눈을 치켜뜨며 조심스레 물었다.
“……과연 통할까요?”
“해 봐야지.”
오웬이 다시 그녀에게 손짓했다. 세이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 줘야, 디온 프라벨이 감동하며 기어들어 올까.
‘나 너무 착한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디온 프라벨, 그 녀석과는 좋은 기억이 하나 없다.
그런 그를 기쁘게 해 주려 노력하고 있다니. 스승이 들었다면 혀를 찰 일이다.
그의 신랄한 비난을 떠올리며 오웬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세이나는 흠칫 몸을 떠는 것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곧 가늘고 긴 목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긴 머리카락은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러웠다. 너무 순순히 풀려서, 나름 빗어 내려가는 재미도 있었다.
‘아주 손해는 아닌가.’
물론 길게 늘어뜨린 지금도 좋았지만,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선 묶어 올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잘 꾸민 그녀를 상상하자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저번에도 의상실에서 대충 고른 옷이었는데, 꽤 잘 어울렸지.’
돌연 세이나가 그를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아, 애인 해 줬구나?”
오웬의 손길이 멈췄다. 그녀의 강렬한 금빛 눈동자를 보며 오웬은 허를 찔린 기분을 느꼈다.
“지금은 없어!”
“아, 네.”
세이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웬은 좀처럼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 애인에 관해 물어보면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그러나 세이나가 그걸 묻는 일은 없었다. 얌전히 있는 뒤통수를 보며 오웬은 다행스러움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 여자는 정말, 나한테 관심이라곤 한 점도 없구나.
‘존경한다더니.’
이미 다 지난 이야기인 걸까.
‘아쉽게.’
거기까지 생각하자 오웬은 당혹스러워졌다.
그는 하늘에 맹세코 평판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가 저를 두고 어떻게 판단하든. 잘난 내가 이해해 줘야지.
이해. 그래, 이해해야 했다.
다짜고짜 총을 들고 쳐들어온 상대를 존경하긴 정말 어렵다.
그땐 정말 공작을 의심했고, 그녀가 입막음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짓으로 구조 요청을 주는 것. 꽤 흔하지 않은가.
그리고 오웬은 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 직감이,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세이나 로힐은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너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고.
왜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까. 생각해 보던 오웬은 문득 이 집이 편안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이나 로힐의 곁은 편했다. 집은 따뜻하고. 챙겨 주는 손길은 고마웠다.
그녀는 책에 빠져 넋을 놓고 소파에 기대면 어느새 담요를 챙겨 오는 사람이었다. 꽤 관대하기도 해서, 가끔 얄미운 짓을 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총만 들고 오지 않으면 말이다.
‘그놈의 총.’
오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웃을 일이 많았다.
외출할 때마다 선물이라고 이것저것 사다 주는 것도 좋았다. 저번에 사 왔던 해골 팔찌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만약 내가.
그렇게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역시 어렵죠?”
다시 세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웬이 의아해하자, 그녀가 덧붙였다.
“안 하고 있어서.”
“아.”
오웬은 그제야 아직 제 손이 굳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바보같이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또 변태라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기에, 그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먼저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여러 갈래로 나눠 땋아 내렸다. 하나씩 말아 올리자 금방 윤곽이 나왔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풀어 헤쳤다.
다섯 번쯤에서 더 풀기 아까운 모양이 나왔다. 오웬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남은 머리도 낮게 말아 올렸다.
“돌아 봐.”
세이나는 투덜거리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오웬의 큰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매만졌다.
다음에는 이마 옆, 귀 뒤. 마지막으로 손끝이 그녀의 목선에 살짝 스치자, 오웬은 긴장하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이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예쁘네.’
그 외에도 칭찬이 더 떠올랐으나 어느 것도 오웬은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녀를 더 민망하게 할 듯하니.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썩 보기 좋았지만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다 됐다고 하자 세이나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외투를 걸쳐 입었다.
“집 잘 보고 있어요.”
“그래야지.”
오웬은 현관문까지 세이나를 따라갔다.
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확 쏟아졌다. 그래서일지도. 오웬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것을 느끼며 세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제 손으로 꾸며서, 다른 놈에게나 보내고 있다니.
‘등신 새끼.’
자신에게 냉혹한 평가를 하며 막 문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갔으면서, 세이나는 한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의아하여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그녀가 몸을 돌려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최대한 저녁 전에는 돌아올게요.”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치 아이를 혼자 남겨 두고 일하러 떠나는 어머니처럼.
“정말?”
“네. 셋이서 같이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응, 빨리 와.”
“……같이 갈래요?”
오웬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디온 프라벨이 날 죽이려 들 텐데.’
그랬다간 세이나가 곤란해질 것이다.
“괜찮아. 다녀와.”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오웬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제야 안심했는지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찬연한 햇살 속, 반짝이는 세이나를 보며 오웬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요리나 배워 볼까.”
그러자 지나가던 고양이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착각인가?
* * *
오랜만에 입은 치마는 영 어색하고 불편했다.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도 영 다른 사람 같았다. 세이나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려다가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단단히 묶은 머리는 고개를 흔들어 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급하게 한 것치곤 꽤 괜찮은 솜씨였다.
‘돌아가면 배워 볼까.’
신기해서 계속 들여다보다가 가게 안의 점원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세이나는 머쓱함을 느끼며 급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약속 장소도 평소와 같았다.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대부분 불량배. 대낮부터 술에 취한 질 나쁜 놈들도 많았다.
‘뭘 봐.’
우아하게 차려입어도 본성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강렬하게 째려봐 주니 몇몇이 눈을 피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땐 다시 진득한 시선이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분명, 익숙한 것도 있었다.
세이나는 멀리 보이는 검은 가면을 보고 작게 투덜거렸다. 아, 오늘도 저거로군. 잠시 들떴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볼수록 참 삭막한 모양이었다.
가면 아래의 그를 알고 있으니 더욱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앞에 이르렀을 땐, 섭섭하기도 했다.
“……오늘 어디 가요?”
이 예쁜 머리를 보고도 그는 웃지 않았다. 멍하니 보다 기껏 한다는 말이 저거라니.
“갔잖아요?”
“어딜?”
“여기.”
그녀의 대답에 디온의 입술이 벌어졌다. 세이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제,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줄 타이밍이었다.
“오늘은 어디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