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진짜 싫어. 왜 마족을 조각해요?”
저절로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것도 친절하게 물건을 제안해 준 이에게 보일 예의는 아니었으나 세이나는 쉽게 얼굴을 펴기 어려웠다.
“징그럽지도 않아요?”
“멋지잖아.”
“악취미.”
“해골은 어떻고?”
“……제 취향 아니에요. 선물용이지.”
상인이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세이나는 건네받은 팔찌를 다른 장신구들 사이에 두었다. 그러고도 계속 시선이 가서 다른 팔찌를 위에 겹쳐 아예 숨겨 버렸다.
“이것 말고…… 이거랑 이거. 아, 유령은 없어요?”
“유령? 독특한 아가씨네.”
“제 취향 아니라니까.”
상인이 웃으며 다른 물건을 가리켰다. 제법 많은 추천이 있었지만, 세이나는 좀처럼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기 어려웠다.
오웬은 몰라도 화려한 반지를 여러 개 낀 라샤드를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것저것 헤치다 보니 다시 마족이 고개를 내밀었다.
상인이 마족의 뾰족한 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귀여운데.”
“기분 나빠요.”
“뭐 어때. 실존하는 것도 아니고.”
‘실존하니까 기분 나쁜 거지.’
세이나는 작게 혀를 찬 뒤 고개를 저었다. 상인은 그제야 팔찌를 슥 감췄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린 듯하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물건들을 살폈지만, 썩 마음에 차는 것이 없었다. 용 조각상도 가까이서 보니 살짝 흠집이 나 있다.
세이나는 예의상 엘렌의 선물 몇 가지를 계산하고 몸을 돌렸다. 디온은 몇 발자국 뒤에 있었다.
“정보상씨?”
분명 시선은 자신에게 향해 있는데, 정신이 다른 곳에 있는 느낌이다. 손은 왜 저렇게 꽉 쥐고 있는 거지?
무슨 생각을 또 골똘히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 이렇게 물러난 거지?
팔찌를 고를 때는 분명 가까이 붙어 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또, 너무 디온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이렇게 멀어져 있다.
세이나는 의아하여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보상씨?”
“……네?”
“계속 이렇게 부르니까 이상하네. 이름이 뭐예요?”
그건 무심코 나온 물음이었다.
‘정보상씨’는 역시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또 어떤 가명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이름이……. 디온 프라벨이 나오면 제일 좋고.
하지만 반응은 쌀쌀맞았다.
“그냥. 그렇게 부르세요.”
“네?”
“다 끝났습니까?”
디온은 그렇게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세이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왜? 뭐야? 뭐지?
“화났어요?”
따라가며 물었으나 계속 답은 없었다.
그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치 도망가는 것 같다. 그러나 세이나는 그가 전속력으로 달려도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옆에 바짝 붙어 물었다.
“화났는데?”
“아니요.”
“왜……. 아, 그 동상에는 흠집이 있었어요. 더 좋은 거로 사려고 그랬지.”
“…….”
“아니면 너무 취향이었나? 그걸로 할까요? 아, 정보상씨 선물도 사 줄까요?”
픽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어처구니없어 나온 헛웃음이었다. 아니,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들여다보았으나 또, 가면이 장벽이었다.
확 벗겨 버릴까.
그렇게 다짐한 찰나 그가 멈춰 섰다. 세이나도 따라 멈췄으나 이미 그를 지나친 후였다.
부산스러운 상점가를 배경으로 선 남자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세이나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그의 가슴이 크게 한 번 오르내리며 깊게 숨을 뱉었다.
그다음에, 그가 다가왔다.
“그냥 좀, 다른 생각 하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 그리 묻기도 전에 그가 손을 뻗었다.
세이나는 디온이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당황한 그녀를 보며 디온이 피식 웃었다.
“배고프죠? 식사하러 갈까요?”
* * *
이후의 시간은 매끄럽게 흘러갔다.
함께 식사하고, 또 산책하고, 다시 극장에 돌아왔다.
카일 세비언은 데뷔 날 2승 1패라는 멋진 성적을 거두었으나 결국 그녀의 잔소리까지 피하진 못했다.
다음 날의 만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사하고, 산책하다가, 웬 극장에 들어갔다. ‘헥터 바실’을 알아본 이는 있었으나 대화는 짧았다. 저녁에 본 유랑 극단의 서커스는 제법 흥미진진했다.
“저건 쉬워 보이는데.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농담이죠?”
그의 만류 때문에 결국 불이 붙은 원 안으로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세이나는 꽤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광장에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세이나의 집 앞까지 오지 않았다.
“그럼 내일 봐요.”
‘오늘도 이게 끝?’
그게 정말 끝이었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세이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일주일간 부려 먹을 줄 알았는데, 한 것이라곤…….
‘그냥 놀았는데.’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엘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후로, 디온은 위로가 필요하다며 매일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그때와 분위기도 비슷했다. 차이점은 2개.
박살을 내 버리고 싶은 검은 가면과, 헤어지는 장소.
그는 결단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이왕 놀 거면, 다 같이 가도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은 다음 날까지도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정오. 외출 준비를 하고 현관으로 내려가던 세이나는 뜻밖의 인물과 1층에서 만났다.
“정말 오늘도 나가네요.”
“봐, 내 말이 맞지?”
공작의 부관, 아론과 오웬이 나란히 서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꼭 흥미로운 사건을 마주한 탐정과 탐정 보조 같다.
대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건지. 오웬의 친화력에 놀라워하며 세이나가 물었다.
“공작님은요?”
“바쁘십니다. 오늘도 못 오실 것 같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흠?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네. 곧 황제 폐하를 만나셔야 해서요.”
황제라. 만날 수 있는 사람이긴 하구나.
그의 신분을 다시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른 평민이 그러하듯이.
“사실 지금까지가 비정상적이었죠. 공작은 꽤 바쁜 자리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퍽 자부심에 찬 얼굴이었다. 우리 공작님 멋있지? 하는 것처럼 들려 세이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응? 왜요?”
“급한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진 않으셨지만……. 와 보니 대충 알 것도 같네요.”
“……무슨 말이에요?”
“디온 프라벨.”
계단 난간을 붙잡고 있던 세이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론이 슥 주변을 둘러보더니 가볍게 말했다.
“안 보이네요. 가출이라도 했습니까?”
“그래, 그 급한 문제를 두고 놀러 다니는 거야. 정말 너무하지 않아?”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오웬이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그가 갑자기 제 가슴께를 붙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덕분에 나는 혼자 방치되고 있다고. 얼마나 처량한지.”
“네. 라프만 씨께서 집 지키는 멍멍이 신세가 되었다고 각하께 제대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너 은근히 모진 성격이구나.”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잘 해결되기를 바랄게요.”
아론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탁, 문이 닫히고 집 안에는 이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법 긴 고민 후 세이나가 한숨처럼 말했다.
“따라와요.”
소파에 앉은 뒤에도 오웬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긴, 어제도 늦게 들어왔으니 내내 혼자 집에 있었을 것이다.
엘렌을 지켜봐야 하니 떠날 수도 없고. 그가 겪었을 어제 하루를 상상하다 보니 세이나는 미안해졌다. 이윽고 그녀는 큰 결심을 내렸다.
“사실 어제 디온을 만나고 왔어요.”
“……정보상은?”
“정보상이 디온이었어요.”
오웬의 회색 눈이 커졌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흥미롭네.”
“또 이상한 의심 하려거든 그냥 혼자 생각해요. 말하지 말고.”
시킨 대로 오웬은 바로 입을 꾹 닫았다. 와중에도 계속 웃고는 있어서 세이나는 그가 얄밉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말을 돌이킬 수도 없고.
그녀는 천천히 그와 겪었던 일을 풀어 나갔다. 이상한 가면과 이상한 조건. 그리고 언젠가와 비슷한 일상.
고백 아닌 고백은 쏙 빼 두었다. 세이나는 연애는 영 몰랐지만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난 알겠는데.”
그러나 그 부분이 없어도, 오웬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괴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다. 세이나는 기대감을 품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안 말해 줄래.”
“집 잘 지키고 있어요. 오늘도 늦게 올게.”
“잠깐, 잠깐만!”
조금만 늦었어도 오웬은 그녀의 외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세이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소파 위에 앉았다.
“어쨌든, 넌 디온을 빨리 집에 데려오고 싶다는 거잖아. 그렇지?”
“네. 맞아요. 이 문제가 해결되면 오웬도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둘 모두에게 좋지 않겠어요?”
“나는 안 와도 상관없는데?”
“……이제 진짜 갈게요. 저녁 먼저 먹어요.”
“잠깐마안!”
다급한 손이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세이나는 찌푸리며 돌아봤다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집 지키는 멍멍이…….’
그 표현이 썩 적절한 얼굴이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길에 결국 세이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오웬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어떡해요? 내가 안 놀아 주면 영영 안 돌아올 분위기란 말이에요. 그리고 부모님 정보도 얻어야 하고.”
“디온을 잘 구슬릴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지?”
“화해하고 싶은 거예요.”
“어쨌든.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두 가지나 있어요?”
세이나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어떻게?”
“전체 이용가랑 15세 미만 관람 불가가 있는데. 어느 쪽으로 할래?”
“……갑자기 듣기 싫어지는데.”
“그럼 다른 수는 있고?”
그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체로……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러고 오웬은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벗고, 소매 단추를 풀고 밀어 올렸다. 단단하게 잡힌 그의 팔 근육을 보며 세이나는 당황을 느꼈다.
쟤가 또 뭘 하려는 거야?
“그쪽은 썩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네, 네? 뭘요?”
“세이나.”
이윽고 왼팔의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그가 몸을 돌렸다. 큰 손이 다음에 향한 곳은 소파의 등받이였다.
오웬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방에 들어가도 돼?”
세이나는 궁금해졌다.
……그거, 전체 이용가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