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8화 (108/179)

#108

당연하게도, 가면은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세이나는 어쩐지 그 아래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짜증 나면 저렇듯 일단 입을 꾹 닫는 습관이 있었다.

추측이 틀린 걸까?

“정보상이니까……. 내가 카일이랑 친한 것도 알고 있었고,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서, 음…….”

그런데 왜 그걸로 짜증을 내지?

“……전혀 아닙니다.”

“그럼 여긴 왜 왔어요?”

“세이나가…….”

환호성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쿵! 덩치가 큰 사내가 링 위에 올랐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사나운 눈매. 몸 여기저기 난 상처가 딱 봐도 베테랑이다.

모리슨! 모리슨!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뒤이어 카일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나름대로 비장한 얼굴이었다.

“경기장에 경기를 보러 오지. 뭘 하러 왔겠어요.”

먼저 물어봤으면서, 세이나는 하마터면 그의 대답을 놓칠 뻔했다. 카일이 링에 오르기 직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탓이다.

세이나의 손가락이 제 눈앞을 한 번, 그리고 카일을 한 번 가리켰다.

지켜보고 있다.

그런 의미였다.

다음 목소리는 훨씬 더 또렷하게 들렸다.

“당신은 어딜 가도 아는 사람이 있네요.”

아, 방금은 확실히 디온이었다.

세이나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바짝 다가온 그를 보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정보상’의 탈을 쓰고 그가 이토록 가까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투덜거리는 말투도 몹시 귀에 익었다. 뭐지? 알아 달라는 건가?

‘왜 갑자기 삐친 느낌이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세이나는 일단 한번 대답해 보았다.

“……헌터니까?”

“…….”

정답은 아닌 모양이다.

그가 홱 몸을 돌려 관중석으로 향했다. 마침 카일이 막 링 위에 올랐고, 세이나도 걸음을 옮겼다.

디온이 향한 자리는 관중석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몇 개 남겼을 때 디온이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맞잡으려고 손을 뻗자 그의 뒤로 귀족들이 보였다. 남작과 자작. 디온에게 말을 건 영애도 옆에 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세이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쪽도 아는 사람들이랑 따로 인사했잖아요. 나만 빼고, 아주 즐거워 보이던데?”

그리 물으면서도 손은 어느새 그를 향하고 있었다. 디온이 그녀를 끌어 주며 말했다.

“빼다니. 내가 소개해 주기도 전에 먼저……. 설마, 그 사람이랑도 아는 사이예요?”

“그 사람은 또 누군데요?”

“돈 받던 남자.”

세이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사람한테 질투하네.’

디온은 뭐라고 더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타이밍이 별로였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곧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세이나는 디온을 따라 관중들 앞을 걸었다.

맞잡은 손은 그대로. 아니, 디온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간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보다 보니 두근두근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쩐지 가슴께가 간지럽다고 생각하며 세이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사람은 완전 초면인……. 앗!”

“해치워 버려! 모리슨!”

그런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돌연 어깨가 강하게 밀쳐졌다.

그녀의 몸이 확 앞으로 쏠려 버렸다. 디온이 급히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뻔했다.

“하, 깜짝이야!”

“괜찮아요?”

그리고 다음 순간, 종이 울렸다.

댕댕댕. 요란한 종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카일이 모리슨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1방 더!” 어떤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삽시간에 관중석이 시끄러워졌다.

“괜찮아요.”

뒤늦게 뱉은 나직한 목소리는 관중들의 함성에 바로 묻혀 버렸다. 세이나는 디온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겨우 등 뒤의 남자에게 향했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세이나는 이번에도 가면 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가서 앉죠.”

“하지만.”

“저기죠? 딱 저기가 비었네!”

끌고 가다시피 해서 겨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좌석에 앉은 후에도 세이나는 카일을 살필 수 없었다. 디온이 계속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발목 봐요.”

“안 다쳤어요.”

“그래도.”

그냥 조금 밀렸을 뿐인데. 과한 걱정에 낯이 뜨거웠다. 세이나는 보란 듯이 발을 앞으로 뻗었다.

“자, 괜찮죠?”

그러나 좀처럼 디온은 떨어지지 않았다. 더 걱정하는 것 같다. 세이나는 자신이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짜 민망하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한 계단 낮은 좌석에서 귀족 영애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하늘색 드레스. 디온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던 그녀였다.

눈이 크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웃을 때 훨씬 더 예뻤건만. 지금 그녀는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녀가 꽉 쥐고 있는 하늘색 드레스처럼.

‘나도 좀 신경 쓰고 나올 걸 그랬나.’

처음으로 제 복장이 의식되었다.

그녀 옆의 여자도, 그 앞의 여자도 모두 잘 차려입었다. 그리고 그 여자도, 저 여자도 꽤 예뻤다. 과연, 귀족 아가씨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디온은 대체 왜.

“지금 나갈까? 걸을 수 있겠어요?”

왜 날 좋아하는 걸까?

* * *

경기의 승자는 카일이었다.

세이나는 큰 뿌듯함을 느꼈다. 부모님께도 숨기고 여기에 있는 것은 괘씸하지만. 어찌 됐든 이기지 않았던가.

칭찬해 줄 마음도 아예 없진 않았다. 그러나 경기 후 찾아간 대기실에서…….

“왜요?!”

“아 글쎄, 안 만난다고 했다니까.”

“아 글쎄, 왜?!”

그녀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컨디션에 방해된다잖아. 스승이라면 응? 제자도 존중할 줄 알아야지!”

“방해는 무슨! 안 끌고 가요! 그냥 잠깐 얼굴만…….”

“아무튼 안 돼! 다 끝나고 찾아와!”

쾅, 문이 닫혔다. 세이나는 급히 손잡이를 잡았으나 이미 잠긴 뒤였다. 쾅! 다시 문이 진동했다.

그녀가 문을 걷어찬 소리였다.

“알아서 잘할 겁니다. 내버려 두죠.”

“카일은 내 제자란 말이에요. 당연히 신경 써야죠! 거기다 병원비라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카일이 그날 일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세이나가 머리를 부딪쳐 버린 그 사건은 카일을 감싸다가 당한 것이니.

그 결과 세이나는 병원 신세를 졌고, 잊고 있던 전생을 떠올렸다.

시작은 카일이 맞지만, 남은 반은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상태창을 찾으려 부단히 애를 썼으니 말이다.

‘어우, 갑자기 흑역사가 확 올라오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모범적인 빙의자가 아니었다. 의사를 붙잡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카일이 그런 구체적인 사정까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입원 기간이 일주일 더 연장된 것만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이나 로힐이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것도.

‘안나가 말해 줬겠지.’

그래, 거기에 죄책감을 가진 것까진 이해하겠다. 요즘 임무가 없으니까. 여기서 주먹질하는 것도.

그래도 부모님께는 말해야지!

“저녁에 다시 돌아와야겠어요.”

카일은 아직 두 경기가 남아 있었다. 부디 거기서는 얻어터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세이나는 문에서 멀어졌다.

몸을 돌리자 디온이 보였다. 세이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 고마워요.”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가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흐음.”

“의도야 어떻든…… 덕분에 카일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네. 그런 거로 하죠.”

이상한 대답. 그래도 즐거워 보여 세이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디온이 몸을 반쯤 돌리며 말했다.

“나갈까요?”

다음 행선지는 세이나도 자주 가는 곳이었다.

협회 근처 상점가는 늘 그렇듯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정석. 마도구. 무기. 방어구. 마법약. 약초 등등.

눈이 닿는 곳마다 헌터들이 주로 찾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아는 얼굴도 몇 보였다.

‘괜찮은 것 맞아?’

협회에는 회장이 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이런 거리에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다.

생판 남인 그녀도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던가. 그럼 그의 가족들도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왜 여기에 왔을까.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까?”

“네?”

세이나는 눈을 깜빡이다 반색했다.

“사 줄 거예요?”

“글쎄요.”

라고 말하긴 했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있었다.

‘진짜 순수하게 놀러 온 건가?’

문득 그가 엘렌에게 차인 직후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듯 함께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주로 식사 위주긴 했으나 산책도 종종 했다.

어마어마한 부탁도 이게 다인 걸까? 같이 놀기?

‘그럼 그냥 말해도 될 텐데.’

그러다 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작은 장신구 가게였다.

가판 위에 팔찌와 목걸이, 반지들이 펼쳐져 있다. 특이한 문양에 색도 다채롭다. 미신적인 의미가 가득 담긴 물건들 같았다.

그중 세이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가판 외곽에 있는 작은 물건이었다. 날카로운 이빨. 푸른빛을 띤 비늘 등. 뱀 같은 눈.

세이나는 드래곤 동상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지만 무게는 제법 묵직했다. 특이한 장식품이었다.

“살 건가요?”

“네.”

그녀는 씩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디온에게 선물할 거예요.”

“…….”

“정보상씨는 디온이 왜 드래곤을 좋아하는지 아세요?”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는 모릅니다.”

“아, 예.”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는 제일 잘 아실 것 같은데요.

세이나는 다른 물건들도 살폈다. 해골이 주렁주렁 달린 팔찌. 엘렌을 위한 꽃 빗도 골랐다. 유령을 상징할 만한 것은 딱히 안 보였다.

“선물 줄 사람이 많나 보네요.”

“네, 1명만 챙겨 주면 섭섭하잖아요. 특히 오웬이 참…….”

세이나가 말끝을 흐렸다. 아차. 디온에게 말하듯이 말해 버렸네.

“그,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하하.”

“……친한가 봐요.”

“네, 익숙해져서요. 이젠 없으면 이상하다니까요.”

“…….”

“그래서 지금, 너무 이상해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디온도 빨리 돌아오면 좋을 텐데.”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세이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물건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생각만 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입 밖으로 뱉으니 부끄러워졌다.

조금 두렵기도 했다.

지금은 검은 가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을 보면…… 슬플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 뜻 같아서.

“이건 어때?”

다른 팔찌를 내려놓는데, 앞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진한 화장을 한 상인이 그녀에게 팔찌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해골들이 달린 디자인이었다. 하나 차이점은, 다른 해골보다 큰 머리가 하나 있는 것이다. 괴기스러운 표정. 염소의 뿔.

“마족인가?”

“오, 알아보네?”

“그럼 안 사요.”

세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끔찍해.”

그때, 세이나의 어깨로 향하던 디온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