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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7화 (107/179)

#107

목적지는 그의 말대로 그리 멀지 않았다.

눈에 익은 건물들을 보며 세이나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저 멀리, 오른편에는 모험가 협회도 보인다. 디온의 가족들이 있는 바로 그곳 말이다.

‘그래서 가면을 벗지 않은 건가? 들키지 않으려고?’

그가 가족과 사이가 썩 나쁘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 왔을까.

“저기입니다.”

그가 가리킨 건물 입구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이 잘 차려입은 부자들, 혹은 귀족으로 보였다. 평범한 이들도 몇 섞여 있긴 한데…….

“갈까요?”

“아, 네.”

문을 넘어가자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 거대한 경기장이 보였다. 4각의 링과 면마다 걸려 있는 3줄의 로프.

‘투기장?’

관중석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다. 형태를 보아 예전에는 연극 무대로 쓰인 곳 같다.

세이나는 뒤섞인 사람들 속에서 몇몇 안면 있는 귀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론소에 5천 루펜!”

그들이 열을 내며 돈을 거는 것도.

“어디에 걸까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마터면 그의 목소리를 놓칠 뻔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건물 안의 공기는 밖보다 훨씬 뜨거웠다.

세이나는 돈을 받는 덥수룩한 콧수염의 사내와 테이블, 그리고 디온을 번갈아 보다 깨달았다.

‘아, 돈을 벌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데려온 건가?’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단순한 추측이었다. 결투장의 돈은 그저 흥밋거리밖에 되지 못한다. 고작 이런 것으로 벼락부자가 될 순 없다.

애초에 그는 돈도 많고.

세이나는 더 묻는 대신 군말 않고 그의 옆에 다가섰다. 어차피 시키는 것은 다 하기로 한 상황. 이제 와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누가 있는데요?”

“아, 누구냐면…….”

그때,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헥터 님!”

그 낯선 이름에 반응한 이는 뜻밖에도 디온이었다.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자 세이나의 시선도 저절로 뒤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앳된 얼굴의 귀족 영애였다. 그녀가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언제 오셨어요?!”

“해밀튼 양. 오랜만이네요.”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대답이었다.

세이나는 멍한 눈으로 자신에게서 돌아선 디온을 바라보았다. 해밀튼이라는 여자와 그는 퍽 다정해 보였다. 뒤이어 다가온 이는 남자였지만.

“크레이븐 남작님도 계셨군요.”

“헥터! 정말 오랜만이군!”

마찬가지로 세이나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치장한 인물이었다.

갑자기 훅 귀족 사회가 다가와 버렸다. 세이나는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다 뒤에 있는 테이블과 부딪혔다.

“조심해야지!”

“아, 죄송해요.”

테이블 너머, 돈을 거두던 콧수염 사내가 괜찮다는 듯 턱짓했다. 그가 물었다.

“헥터 바실이랑 아는 사이야?”

‘헥터 바실?’

그 뜬금없는 이름이 다시 들렸다. 세이나는 다시 디온을 확인했다.

디온은 그들 사이에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검은 가면은 벗지 않은 채였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정중한 어투, 나긋한 목소리. 몸에 밴 기품.

지나가던 귀족들도 그를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다. 저 의문의 남자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눈치다.

가려도 태가 난다는 건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어떤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 살짝 기대었다.

세이나는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잘, 몰라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쪽은요? 알아요?”

“졸부.”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보이는 것처럼, 아주 인기가 좋고.”

“하, 난 또 뭐라고…….”

“그러니 위험하지. 출신도 모르고, 얼굴도 가리고 있잖아? 돈이 많다고 유명하지만,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도 아무도 몰라.”

“유명…… 할 정도예요?”

“그래. 가망 없는 사업에 큰돈을 투자해 주기도 하고, 대가 없이 돈을 빌려주기도 하지. 가족 몰래 일을 벌였다가 헥터 바실에게 돈을 빌려 수습하는 귀족이 어디 한둘인가.”

“…….”

“그러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들도 있고.”

남작이 호탕하게 웃어 젖히자 처음 말을 건 영애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너도 조심해. 우연히 경호원으로 고용된 것 같은데……. 뒤가 구린 놈이랑 엮여서 좋은 것 없어.”

“구리다니.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럼 왜 얼굴을 가리고 다녀?”

“…….”

“쯧, 이름도 가명이겠지.”

슬쩍 돌아본 뒤에서는 아직 그들이 유쾌한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터라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친화력이 좋은 편이지만, 자신의 위치도 잘 알았다. 당장 사내도 말하지 않았는가.

경호원.

검은 가면을 처음 마주할 때도 없었던 거리감이 느껴졌다.

세이나는 그의 옆에 붙은 영애에게서 어렵게 시선을 돌렸다. 예쁘네.

잘 어울리고.

“못생겼지?”

사내가 다시 물어왔다.

“……네?”

“가면 말이야. 그러니 저리 철저하게 숨기지. 혹시 범죄자야? 조폭 보스? 밀수꾼?”

“무슨…….”

“아니면 간첩인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으나, 그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디온 프라벨. 루셀 도르에 이어 헥터 바실.

협회장 아들. A급 헌터. 졸부. 범죄자는…… 좀 과할지 몰라도. 조폭 보스는 썩 어울릴 것도 같았다. 담배를 꺼내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지.

밀수꾼도 모르겠다. 간첩도…… 아마 아니리라 짐작할 뿐. 그리고 그것들 외에 하나 더,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 이미 누군가 엘렌의 곁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럼, 1명밖에 없군요.

‘모르겠어.’

혼란스러운 마음이 더욱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기분도 영 별로였다. 이런 곳에 처음 발을 들인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짜증도 치밀었다.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다음에 집으로 초대…….”

“잘생겼거든요.”

돌연 세이나가 뱉은 말에 사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봤어?”

“……됐고. 설명이나 해 봐요. 누구랑 누가 붙는데?”

사내는 씩 웃더니 오늘의 선수들을 소개했다.

한 녀석은 젊어서 패기가 있고, 다른 녀석은 나이가 많지만 노련하다. 디온을 볼 때의 냉기 어린 눈빛이 확 사라지고, 신이 난 어린애가 나타났다.

하지만 사내의 말에도 공백은 있었고, 여자는 그보다 더 수다스러웠다. 그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우리 자리는 저쪽이에요! 같이…….”

“저는 일행이 있어서요.”

“네?”

“자! 어디 걸 거야?”

탁! 사내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세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망할. 또 뒤쪽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세이나는 작게 혀를 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첫 번째 선수의 이름은 모리슨. 두 번째는…….

“결정했어요?”

“카일?!”

그녀는 디온이 제 옆으로 돌아온 후에도 테이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이나?” 디온이 부른 후 쳐다본 곳 역시, 맞은편의 사내였다.

“카일?!”

“어, 어……. 카일인데……. 아, 저기 오네.”

세이나와 디온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사내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은 어떤 낡은 문이었다.

풍채 좋은 중년 남성과 담배를 문 노인. 그리고 헐거운 의상을 입은 청년이 뒤이어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를 확인하던 그의 다갈색 눈동자가 마침내 그녀에게로 향했다. 세이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카일 세비언!!”

그녀의 제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세이나 누나?!”

* * *

보통 헌터들이 그렇듯, 세이나가 첫 제자를 받은 것은 5년 차가 막 지난 시기였다.

신입 헌터는 항상 임무에 변수가 된다. 이 때문에 협회에서는 신입들이 낙오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을 맡은 헌터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한다.

돈이 궁한 그녀는 늘 신입을 받았고, 책임지고 수도로 귀환시켰다. 오는 이는 막지 말자는 것이 그녀의 신조였으나, 5년 차가 되어 제자를 둘 때는 아주 신중했다.

제자의 평판은 스승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심 끝에 고른 그 제자는…….

“너 여기서 뭐 해!?”

링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아, 이게, 그……. 어떻게…….”

“임무에 갔다고 들었는데, 대체 왜…….”

지인들에게는 완벽하게 숨기면서.

세이나는 안나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뭐? 좋은 의뢰를 맡았어? 큰돈을 벌게 돼?

“너……!”

“뭡니까?”

기가 차 쏘아붙이려던 그때, 담배를 문 노인이 찌푸리며 다가왔다.

“우리 선수에게 볼일이라도?”

선수!

세이나의 금안이 맹렬하게 이글거렸다.

카일이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경악은 배가 되었다. 저 녀석이!

물론, 가르쳐 준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는 그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나 세이나는 그의 거짓말까지 용납할 수 없었다.

안나가 전해 준 바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임무에 나섰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수!?

선수라고?

“뭔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해결하시오. 우리는 아주 바쁘거든.”

“잠깐만요! 더 할 이야기가……!”

“아아, 그러니까. 나중에. 나중…….”

“헥터!”

노인과 카일을 두고 실랑이를 이어 가는 도중, 돌연 또 그 이름이 들렸다. 노인과 함께 있던 중년 남성이 어느새 디온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수도를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시무스 자작님.”

“잘 왔네, 잘 왔어! 그런데 이쪽은……?”

세이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친구죠! 세이나 로힐입니다. 자작님.”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카일 세비언의 스승이죠.”

“스승? 아, 헌터로군!”

시무스 자작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와 악수했다.

“그럼 자네도 아끼는 제자에게 걸 테지? 마침 딱 좋은 때에 왔군! 루키의 데뷔는 배당금을 챙기기 좋지! 안 그런가, 헥터?”

“아, 그건…….”

“데뷔? 루키?”

세이나의 날카로운 눈길이 다시 카일에게 닿았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그는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작은 입술이 작게 중얼거렸다.

“병원비…….”

“병원비?! 어머님, 다치셨어?”

그럴 리가 없는데. 아픈 사람이 어떻게 사과잼을 만들겠는가.

카일의 인맥과 그녀의 인맥은 많은 부분이 겹쳤다. 최근에 병원에 입원한 사람. 누구지?

“……나!?”

“모두 착석해 주세요!!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나 준비해야 해!”

카일은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이 그 뒤를 따랐고, 시무스 자작은 디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늦기 전에 빨리 걸어!”라고 조언까지 해 준 뒤 자리를 떴다.

그리고 세이나도, 디온을 돌아보았다.

“설마. 알고 데리고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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