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6화 (106/179)
  • #106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찻잔 속 여자도 그런 듯했다. 느리게 두 번 눈을 깜빡깜빡. 바보 같은 표정에 바보 같은 눈이다. 누가 뒤통수를 후려치기라도 했나.

    멍하니 있는 와중에도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건 이래서 좋았고, 저건 저래서 좋았고.

    대단한 발표회를 하는 듯 일장 연설이었다. 어찌나 거침없는지 어디서 끊고 들어가야 할지도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운 탓도 있었다.

    ‘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얼굴과 귀, 심지어는 손등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놀라움으로 시작된 두근거림은 가라앉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급박해지고 있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거나. 참견 많은 점도 은근히 좋고.”

    혼미한 정신에도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그는 이제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고 있었다.

    새끼손가락이 접히자 다른 쪽 손가락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11개째.

    “또 뭐든 잘 배워요. 관심이 생기기 전까지는 대충이긴 하지만.”

    ‘뭐라는 거야.’

    “청소도 잘하고.”

    이상형이라고 시작한 건 벌써 잊었는지. 그의 항목들은 이제 확실히 특정 인물로 귀결되고 있었다.

    15개가 넘어갈 즈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웃을 때 예쁜 것도.”

    “자, 잠깐만요!”

    “그리고…….”

    세이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을 확 가렸다.

    비록 가면을 빼앗진 못하고 그 위에 손을 얹은 것이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가면은 예상대로 차가웠다. 그리고 제 손을 잡는 그의 손길도.

    예상처럼 차가웠다.

    “더 있는데.”

    그가 눈을 맞추고 투덜거리듯 말했지만 세이나는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들을 순 없었다. 이건 정말…….

    심장에, 너무 나빴다.

    * * *

    뜻밖에 고백을 받아 버렸다.

    ‘고백? 고백 맞지?’

    비록 당사자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디온은 세이나가 가야겠다고 한 순간까지도 가면을 벗지 않았다.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1층에서 다시 양 갈래를 한 소녀와 마주쳤다. 여전히 매서운 눈빛이었다.

    세이나는 너무 부끄러워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언제부터?’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와 겪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첫 만남은 일단 제치고, 식당들도 도서관도 넘겨 보았다. 제법 꼼꼼히 돌이켜 봤지만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늘 친절했으니까.

    이때였나? 이때? 이때? 아니면 그때?

    ‘너무 많잖아.’

    친밀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행동들은 되새겨 보니 묘한 부분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세이나는 그의 감정이 자신을 향하리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디온은 엘렌을 좋아하니까.

    최근에 아닌가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그 대상이 자신으로 바뀌었다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알레데이아의 진실 게임에서도 ‘좋아한다’는 거짓이지 않았는가. 그다음에는…….

    “아.”

    그래서 그때 화냈구나.

    한편, 아직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남아 있긴 했다. 세이나는 디온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내일 이곳으로 다시 오시면 됩니다.

    세이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떤 계획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를 더는 마주 보기 힘들어 나오는 대로 말하다 보니 그리되었다.

    그녀는 이제 일주일간 그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해야 했다.

    ……어마어마한 고백을 한 후에 할 부탁이라?

    “으으, 모르겠다!”

    세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계속 얼굴이 화끈거려서 이대로 가다간 터질 것 같다. 물을 들이켜고 창문을 열어도 좀처럼 열기가 식지 않았다.

    세이나는 쿵쿵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응? 너 얼굴이 왜 그래?”

    오웬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뿐히 스쳐 지나갔다. 두 번째 물을 해치우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손이 불쑥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뭐예요?!”

    이마를 스친 감촉에 세이나는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다시 마주친 오웬은 어느새 그녀의 바로 옆에서 제 이마를 짚고 있엇다.

    다른 한 손은 허공에. 조금 전 세이나의 이마가 있던 자리였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열 있잖아.”

    “괜찮아요. 약 먹었어요!”

    “……의사 만나고 왔어?”

    “네, 네! 그랬어요! 제가 말 안 했던가? 하하.”

    세이나는 급히 그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걸을 때마다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고작 이마를 짚은 것일 뿐인데, 너무 놀라 버렸다.

    ‘정말 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디온과 헤어진 후로 계속 이랬다.

    몸이 고장 난 듯 삐걱삐걱. 심장은 불규칙적으로 쿵쿵 울렸다. 뜨거운 열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소파에 앉으면서도 세이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이어 갔다. 오웬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놀랐으면 미안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아?”

    세이나는 결코 타인과의 접촉에 예민하지 않았다.

    헌터 일은 거칠었고, 남들과 부딪힐 일도 많았다. 야영은 기본이고, 전투 중이나 후나. 누군가를 부축하거나 업거나. 붕대를 대 주거나.

    이마를 짚는 것도 그런 흔한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마 정도야. 디온도 만지지 않았던가. 젠장, 또 디온이라니!

    제발 내 머릿속에서 나가!

    “고, 공작님은요?”

    “아, 또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 저녁엔 돌아온다고 했어.”

    “그렇……군요.”

    “협회에 갔는데 셀론도 이자벨라도, 회장도 없었어. 전부 허탕. 요즘 협회가 뒤숭숭하다는 소문이…… 세이나, 너 내 이야기 듣고 있어?”

    “……네! 그럼요!”

    “상태 많이 안 좋나 보네.”

    도무지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세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과민 반응하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그도…….

    ‘진짜 부끄러워하겠지.’

    디온은 그녀가 ‘정보상’의 정체를 꿰뚫어 본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니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겠지.

    무엇보다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대가 나를 모르리라 확신해야 가능하다.

    저번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좋아하는 마음을 눈치 좀 채라고 흘려 준 것 같은데. 그게 당사자의 앞에서 한 고백이 되어 버렸다. 어떡하지.

    ……점점 그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계속 모르는 척해야 하나?’

    세이나는 한번 그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정체를 숨기려고 이상한 가면을 쓰고 검은 코스튬도 준비해서……. 음, 시작부터 매우 부끄럽다.

    그는 어마어마한 용기의 소유자가 틀림없었다.

    “세이나?”

    “아…… 네?”

    “정보상은 찾았어?”

    그리고 아직, 오웬은 그녀를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세이나는 차마 그를 마주하기 어려워 시선을 돌렸다. 오웬에게 디온의 일을 의논할 순 없었다.

    그녀는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로 했다.

    “찾았긴…… 한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같이 가 줘?”

    “아뇨!”

    세이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잘 설득하면 될 것 같아요.”

    “무슨 일…….”

    “그럼 올라가 볼게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세이나는 빠르게 거실을 떠났다. 쿵. 쿵. 쿵. 쿵. 그녀의 심장 소리에 맞춰 계단이 크게 울렸다.

    오웬은 멍한 얼굴로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한숨이 나오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약속 장소는 아주 음침한 곳이었다.

    세이나는 오늘도 까맣게 물든 디온의 머리카락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복장은 전체적으로 어제와 비슷하나 위에 로브를 덮었다. 눈빛이 사나운 여자애는 없고.

    검은 가면도 조금, 달라지긴 했다.

    ‘알아봐 달라는 건가?’

    세이나는 가면 아래 나타난 그의 입매를 유심히 노려보며 말했다.

    “어딜 가는지 몰라도. 가면은 눈에 띄지 않을까요?”

    더 민망한 상황을 겪기 전에 빨리 벗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면을 벗는 대신 씩 웃기만 했다.

    “염려 마세요.”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전혀 없군.

    그냥 지금 먼저 말해 버릴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온이 묘하게 신나 보여서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괜히 즐거운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기에.’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차 앞에 서 있는 말들은 모두 그의 의상처럼 새카만 흑마였다.

    마부마저 검은 모자를 써서, 세이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디온을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아주 어두운 조직을 연상케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닌가.

    그래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세이나는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마차와 잘 차려입은 사내. 내민 손. 이 장면.

    라샤드와 디온의 꿈속에서 한 번 겪은 바 있는 상황이었다.

    귀족 영애들이라면 숱하게 겪을 만한 일이긴 했지만 세이나는 그때의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긴장감도 그때와 비슷했다.

    “멀리 가지 않을 거예요.”

    다만, 라샤드와 달리 디온은 여유로워 보이진 않았다. 꾹 닫힌 그의 입술 아래, 목울대가 한번 꿈틀거리더니 곧 긴장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이나.”

    봐, 저러는데 어떻게 못 알아봐.

    세이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제발, 춤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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