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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5화 (105/179)
  • #105

    변장은 꽤 철저했다.

    소녀와 달리, 그의 가면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검은 정장에 검은 장갑. 피부가 보이는 부분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가면 아래 눈동자 색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검은 머리칼. 목소리도 변조한 듯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하지만 세이나는 확신했다.

    ‘디온이 맞는데.’

    먼저,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눈에 익었다. 기품 있고 우아한 귀족.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디온은 딱 저런 느낌이었다.

    근래에는 대부분 소파에 늘어져 있긴 했지만…….

    저것 보라. 자리를 권하는 손짓도 딱 디온이잖아.

    “의뢰는?”

    세이나는 의자에 앉는 동안에도 줄곧 디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른쪽을 보고, 왼쪽을 봐도 디온이 확실하다.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봐도 디온이 아닐까.

    그녀의 직감은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아는 척을 안 하는 걸까.

    처음 뵙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인사다. 저절로 눈살이 구겨졌다.

    “손님?”

    “……네.”

    “용건을.”

    하지만 계속 노려봐도 가면이 벗겨지는 일은 없었다. 툭툭 내뱉는 짧은 말에 낯선 의상. 한층 가까워진 시야 속 가면 아래의 눈동자도 푸른빛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디온이 확실했다.

    비록 목소리도 전혀 다르고, 그녀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고 있으며, 자세도 바르고, 테이블 위에 달콤한 것 하나 없는 게 좀 수상하긴 하지만.

    디온이다. 디온이 맞는데…….

    어째서.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는 거군.’

    아직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정보상은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라는 뜻?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당장 자신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빤히 보일 텐데도 내버려 두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조금만 덜 예리했다면 지금쯤 ‘아, 내가 착각했나 보다’로 결론을 내렸을 정도로 디온의 태도는 건조했다.

    ‘모르는 척해 주자.’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남이 되고 싶으시다는데.

    이미 결정을 내린 후에도 세이나는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이후로는 침범하면 안 된다. 선을 그어 놓은 것 같다. 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그를 더 화나게 할까 봐 못하겠다.

    세이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저는 부모님을 찾고 있어요. 10여 년 전에 있었던 세르벤스 숲 실종 사건. 혹시 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숲에서 아직 찾지 못한 두 사람…… 리처드 로힐과 올리비아 로힐이 제 부모님이세요. 두 분의 행방을 알 수 있을까요?”

    겨우 큰맘 먹고 말했건만, 디온은 세이나의 말이 끝난 후에도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변화는 등을 소파에 기대는 것밖에 없었다. 시선은 계속 그녀에게 박혀 있었다.

    그 눈빛이 다음에 할 말을 재촉하는 듯해서 세이나는 정말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가 할 말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그걸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말을 디온에게 할 줄이야.

    “……얼마를 드리면 되나요?”

    “꽤 비쌉니다.”

    그리고 저런 대답이 올 줄은.

    세이나는 오른손으로 이마 양쪽을 꾹 누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확 저 가면을 잡아당길 뻔했다.

    “벌써 오래된 일이니까요. 알아보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네요.”

    “……어떻게든 마련해 올게요.”

    “비쌀 텐데.”

    “상관없어요. 얼마예요?”

    “무리일 겁니다.”

    ‘어쩌란 거야?’

    생판 남을 대하는 말투였다.

    이건 거래다. 그는 그걸 강조하고 싶은 듯했고 세이나도 머리로는 알아들었다. 이건 거래다. 하지만 더해 가는 섭섭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말은 그녀의 성질까지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래, 회장님 아들에 비하면 난 거지겠지. 알려 줘서 고맙네.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순간 후회스럽기도 했다.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지금 무슨 부탁을 하고 있는 건지.

    “돈 대신 다른 것을 받겠습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려던 찰나에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세이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저를 보는 디온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것?”

    “그쪽.”

    “예?”

    “그쪽을 받아야겠습니다.”

    “뭐라고?”

    그러자 가면이 피식 웃었다.

    “그쪽이요. 벌써 세 번 말했습니다.”

    아니, 가면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순간 그렇게 착각한 것이다.

    알 수 없는 감정과 알 수 없는 제안 속에서 세이나는 다시 저 가면을 확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못할 것도 없었다. 디온만 아니었다면. 디온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랬을 것이다.

    “기간은 일주일로 하죠. 일주일간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무슨…….”

    “걱정하지 마세요. 목숨이 위태로운 일은 요청하지 않을 테니. 마찬가지로 그쪽이 다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디온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 디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세이나?

    오웬이 그렇게 물었던가. 이제 세이나는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단,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안 됩니다.”

    그가 상체를 숙이며 집요하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양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무미건조한 가면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

    가면은 표정이 없다.

    하지만 세이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온 프라벨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요?”

    * * *

    세이나가 이해한 제안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지금 날 일주일간 부려 먹겠다는 뜻이지?’

    그리 판단한 이유는 저번 일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한 번 오웬을 하인처럼 부렸던 전례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걸까? 집안일? 아니면 내가 헌터니까 다른 일을 시키려나?’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장난이라면 그녀의 부모님을 언급한 이 시점에서는 썩 적절하지 않았다. 중요한 부탁이라면 조건은 걸지 않고 그냥 말해 줘도 도와줬을 것이다.

    평소에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속내를 보이던 사내는 아니었지만, 오늘의 그는 더 어려웠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저 가면 뒤가 너무 궁금했다. 세이나의 미간이 그녀의 복잡한 심경처럼 마구 구겨졌다.

    좋아. 한번 찔러 볼까?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 더 묻고 싶은데. 또 원하는 정보가 있어서요.”

    “뭐죠?”

    “디온 프라벨.”

    가면 쓴 사내는 그 이름을 들은 후에도 미동도 없었다. 세이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정말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 친구인데 요 며칠 안 보이네요. 행방을 찾아 줬으면 해요.”

    “그것도 비싼 정보입니다.”

    “아, 그것까지 다 해서 몸으로 때우면 되나?”

    그땐 그의 손이 작게 꿈틀거렸다. 그가 물러나 의자에 다시 등을 기댔다.

    “정보상에게 가장 값진 것은 정보겠죠.”

    “아, 그럼 처음 것도 정보로…….”

    “제가 원하는 정보가 있으니 그것과 교환하죠. 두 번째 것만.”

    가장 값진 건 정보라더니. 어지간히도 하인으로 부려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이나도 몸을 뒤로 물렸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나름 거만한 표정도 지었다.

    “……좋아요. 무슨 정보를 원해요?”

    “손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요?”

    “예?”

    그러나 얼마 가진 못했다. 세이나는 제 귀를 의심하며 이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형?”

    그런데, 더 대꾸하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은 모양이다. 그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상형. 이상형이라니.

    ‘그런 거 없는데.’

    전생에서 몇 번 연애한 바는 있었지만, 세계도 상황도 자신의 이름조차 다르니 그걸 가져올 수도 없고.

    현생에서도 기회가 아예 없진 않았으나 성사된 적이 없었다.

    연애애라는 팔자 좋은 놀이에 빠지기엔 세이나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지금 간단하게 돌이켜 봐도 퍽 삭막한 인생이었다.

    “그게…… 참 까다로워서요. 간단하게 말하기 어렵네요.”

    “두 번째 정보는 못 드리겠네요.”

    “아니, 잠깐만. 다짜고짜 이상형이라니.”

    대충 얼버무리려는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그냥 확 지금 가면을 벗겨 버릴까. 하지만…… 역시 그러면 화를 낼 것 같다. 집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처럼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이나는 여전히 어디서 ‘디온 프라벨’을 찾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지금 찾아낸 것도 순전히 우연이지 않은가.

    이대로 다시 사라지면 영영 못 찾을 수도 있다.

    제길, 까다로운 녀석. 세이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그럼 그쪽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

    “봐요. 바로 대답 못 하겠죠? 갑자기 물으면 그렇다고요. 이상형이란 건 말이죠……. 꽤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예요. 과거도 생각해 보고, 음, 미래도 고민해 보고…….”

    지금 힘들게 떠올려 보려 했지만 그 미래라는 것에서, 턱 막혀 버렸다. 그녀의 미래는 과거에 모두 저당 잡혀 있었다. 나아가지 못해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이상형은 왜 물어보는 걸까 그의 의도를 추측해 보려는데, 다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제 것은 말하기 어려워도 다른 사람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세이나의 고개가 기울었다.

    “누구?”

    “디온 프라벨.”

    아, 지금 제 앞에 계시는 분이요?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하고도 남자는 태연하기만 했다. 성인이 하기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일 텐데.

    그리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그는 세이나가 이미 정체를 알고 있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이제 다 눈치챘으니 그런 짓은 그만하라고 말해 줘야겠다.

    막 그렇게 다짐한 순간, 그가 말했다.

    “눈동자는 금색을 좋아해요.”

    세이나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검은 쪽을 좋아하고.”

    가면은 계속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사실, 자리에 앉은 이후로 그의 시선은 세이나로부터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이나는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디온이 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니까.

    “키는…… 큰 쪽을 더 선호하는 것 같네요. 솔직한 성격에, 함께 있으면 편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직업은 활동적인 쪽. 헌터도 괜찮겠네요.”

    하지만 세이나는 더는 그 가면을 보기 어려워 고개를 내렸다. 상아색 탁자 위. 고급스러운 찻잔이 보였다. 무심코 숨을 들이마시자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지 알겠어요?”

    찻잔 속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일렁이는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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