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13. 언제나 만일의 고백에 대비해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세이나는 빗자루질을 멈추고 바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쿵쿵!
“세이나! 안에 있어요?!”
낭랑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아닌 여자의 것. 매우 익숙한 음성이었다. 세이나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니었어.’
긴장이 풀리자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녀는 터덜터덜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나타난 얼굴은 예상한 사람이었다.
“안나.”
“세상에! 얼굴이 왜 그래요? 잠은 제대로 자요?”
동시에 달칵,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한 번 더 달칵. 이번에는 제법 가까이에서 들렸다.
라샤드와 오웬이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안나의 시선은 계속 세이나의 얼굴에만 붙어 있었다. 그녀의 등에 가려서 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한 듯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내가 쉬는 데 방해했나?”
“아니야. 들어올래?”
거실에 이른 후에야 세이나는 안나가 들고 온 커다란 바구니를 발견했다. 갖가지 병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건강에 좋은 차고, 이건 수면에 도움이 된대요. 그리고 이건 딸기잼. 사과잼. 아, 이건 열어 두면 집에 좋은 향기가 난다 해서…….”
“고마워. 잘 쓸게.”
“고맙긴요. 가족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안나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인데.”
그들의 첫 만남은 해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그때 세이나는 막 학교를 그만둔 뒤였고, 안나는 어린 심부름꾼이었다.
만남의 장소는 뒷골목. 시각은 깜깜한 밤이었다.
의뢰인에게 물건을 배달하고 돌아오던 길에서 안나는 몹쓸 불량배들과 마주쳤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때, 세이나가 마침 지나치고 있던 것이다.
세이나는 깔끔하게 불량배들을 일망타진했다. 더하여 마침 잘됐다며 불량배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까지, 안나는 놀란 눈으로 보았다.
세이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 나눠 가질래? 반반.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갑자기 월세가 올라 집에서 쫓겨난 후에는 안나가 한동안 세이나의 집에서 머물기도 했다.
협회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도 세이나의 소개 덕분이었다.
“요즘 통 얼굴이 안 보여서 걱정했어요.”
안나는 한때는 자신이 늘어져 있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램프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뭔가 싶어 수상하게 보던 찰나. 세이나가 말했다.
“아, 몸이 안 좋아서.”
“몸이요?”
안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이나가 몸이 안 좋아?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곧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웬 그 자식 때문이죠?!”
“어, 엉……?”
“그 자식이 준 의뢰가 마지막이잖아요!”
“응? 그, 그렇긴 했지…….”
“그 망할 놈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내가 혼쭐을 내 줘야겠어!”
‘응, 저 방에 있어.’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기에, 세이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안나는 언성을 높였다.
“어쩐지 간단한 의뢰인데 금액이 너무 많더라니! 사기꾼이죠? 사기꾼이지!? 어쩐지, 생양아치처럼 생겼더라고요! S급도 날로 먹은 게 틀림없어!”
옆방까지 다 들릴 정도로 말이다. 세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았다.
또 엄청 부들부들하고 있겠네.
“어디 다친 거예요?! 막, 막…… 협박당하고, 그랬어요?”
“협박?”
“안 도와주면 죽이겠다 총을 들이대고? 응?”
그리고 지금은 좀 양심이 따끔할 것이다. 총을 들이댄 건 맞으니 말이다.
“아니야. 의뢰는 거절했어.”
“정말요?”
세이나가 끄덕이자 그녀가 털썩 다시 소파에 앉았다.
“하, 난 또.”
하지만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안나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곧 그녀가 크게 다짐한 얼굴로 말했다.
“세이나. 아무리 오웬을 존경한다 해도 절대로 몸이 상하면서까지 도와주지 말아요.”
그리고 직후.
쿵!
돌연 들려온 소리에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안나의 시선이 바로 입구 쪽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꽤 예리했다.
“……저기 누구 있어요?”
“청소 때문에 창문을 열어 둬서. 바람 소리 같아.”
‘정확히는 놀란 오웬이 문에 머리를 들이받는 소리겠지만.’
또 그 ‘존경’이 나오다니. 세이나는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거기다 그 대상과는 어제 신경전을 벌인 이후 말 한마디도 섞고 있지 않았다.
세이나는 그쪽 방을 보는 것도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받을 건 받고, 정산할 건 정산하고! 응?”
“알아. 당연하지.”
“세이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약하니까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예요. 카일 건도 그렇고…….”
쿵!
“바, 바람이야.”
“흠, 이상한데…….”
“그래서 카일이 뭐?”
“아, 사실 이 잼들은 카일 어머님이 주신 거예요. 못난 아들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수다가 시작되자 안나는 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문에 흥미를 잃었다.
세이나는 웃으며 그녀가 쏟아 내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나도 마주 보고 웃었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몸이 안 좋은 건 그때의 후유증이 맞죠?”
“으응, 아마도……?”
“하, 이 상황에서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안나는 말을 하다 끊고 입을 다물었다. 망설이다 나온 이야기는 꽤 의외의 것이었다.
“제가 저번에 말한 정보상이요.”
“정보상?”
“참, 제가 반년 전에 말했잖아요.”
반년 전.
그때를 회상하던 세이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한창 그녀가 힘든 시기였다. 뭘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잘되던 것조차 엉망이었다.
안나가 깊어지는 생각을 가로막듯, 그녀를 흔들었다.
“그 사람이 최근에 수도에 나타났대요!”
“아, 어……. 그래?”
“성격이 좀 고약해도 정보는 확실하대요. 왜, 예전에 윈플레드 백작저에 도둑이 들었잖아요. 그때 사라진 보물과 도둑의 정체까지 모두 맞혔나 봐요!”
윈플레드 백작이라면 보석 수집광으로 유명한 귀족이었다.
신문 기사에서는 백작이 끈질긴 추격 끝에 도둑을 잡았다 했지만, 사실은 정보상이 알려 준 것이라고 안나가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가 세이나 부모님의 행방을 알아낼지도 몰라요.”
대가만 제대로 치른다면, 어떤 정보든 찾아 준다 덧붙이기도 했다.
세이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의 행방. 그녀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미안, 디온.’
그를 찾아야겠다 다짐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지만. 이 좋은 기회를, 세이나는 놓칠 수 없었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열의로 빛났다.
“그 녀석,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어?”
* * *
정보상을 찾아가는 길은 꽤 힘겨웠다.
‘여기서 또 오른쪽으로?’
안나가 알려 준 곳은 수도에서도 꽤 외진 곳이었다.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치안으로 따지자면 안 좋기로는 여기가 1등, 세이나가 사는 곳이 3등 정도.
그래서 오웬과 라샤드를 떼어 놓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오겠다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고, 그들과 상관없으니.
오웬이 바보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어서 더 같이 가기 싫었다.
같이 가면 ‘언제부터 존경했어?’라고 실실 웃으며 붙을 게 뻔했다.
‘그리고 여기서 또 왼쪽으로 가면 간판 없는 식당이……. 아, 있다!’
안나가 대충 그려 준 약도는 꽤 정확했다.
세이나는 쓰러지기 직전의 낡은 건물로 향했다. 문을 열어젖히자 삐거어어억……. 문도 곧 떨어질 것 같다.
가게는 뜻밖에도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모두 허름한 복장.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상들이다.
한창 카드놀이를 하던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꽂혔다.
하지만 말을 건 이는 그들이 아니었다.
“어서 오…….”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특이하게도 작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쿠키를 오물거리고 있던 입이 세이나를 보자마자 딱, 굳었다. 그녀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응? 여기가 아닌가?’
“장사 안 해요.”
퍽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분명 친절하다 들었는데. 이상했다. 세이나는 일단 밀어붙이기로 했다.
“술 먹으러 온 게 아닌데.”
“아무튼 안 해.”
“여기 차가 엄청 맛있다고 들어서.”
그녀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아이의 입술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아주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남부산 리브카르네. 두 스푼에 5분.”
“당신에게 내줄 차는 없어요.”
그리고 세이나는 또 한 번 의아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했는데?’
“꺼지라고요. 안 들려요?”
아이는 이제 몽둥이라도 들 기세였다.
저 작은 손으로 들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분명 그런 반응이었다. 저 가면 아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일 테다.
‘잠깐만. 이 여자애. 어디서 본 것 같…….’
딸랑딸랑.
세이나가 소녀를 뜯어보기 시작한 그때, 술병이 진열된 선반 옆의 방울이 움직였다. 아이는 그걸 올려다보다 혀를 찼다.
“쳇.”
‘쳇?’
아무리 봐도 친절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다. 혹시 내가 잘못 찾아온 걸까. 세이나가 물으려던 순간.
“따라와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안쪽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따라 들어가자 높은 계단이 나타났다.
마탑에서 본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또 함정이라도 나오는 건가. 의문스러운 와중에도 세이나는 일단 전진했다.
그래도 여기는 창문은 뚫려 있었다. 여차하면 저기에 매달리거나 몸을 던지면 될 것이다.
“들어가.”
‘이젠 반말이네.’
방 안으로 들어간 이유도 창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쾅! 문이 닫혔다.
어이가 없어 그 문을 돌아보느라, 세이나는 맞은편에 선 존재를 늦게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 뒤이어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시야가 천천히 움직였다. 차분한 베이지색 벽지. 붉은 커튼. 고급스러운 소파와 그리고…….
검은 가면을 쓴 사내.
‘저건.’
거기서 세이나의 시선이 멈췄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옷.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사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빛이었다.
정체를 숨기려고 갖은 애를 쓴 티가 났다. 실제로 흘러나온 목소리도, 마법으로 변조된 것이었으니.
“처음 뵙겠습니다.”
하지만 세이나가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디온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