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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3화 (103/179)
  • #103

    엘렌은 세이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걸 달래 주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정말 부러진 곳 없냐고 양쪽 팔을 더 흔들어 대서 또 시간이 끌렸고, 말없이 사라지느냐고 호통을 쳐서 또 몇 분을 보냈다. 마지막엔 안도의 한숨이었다.

    엘렌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세이나는 10살짜리 어린애가 된 기분을 느끼며 제 목을 매만졌다.

    오웬과 라샤드도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엘렌의 기세에 눌려서 입도 벙긋 못 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러면 안 돼요! 알겠죠?!”

    “으응……. 안 그럴게.”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 음……. 옛 친구를 만나서, 하하하.”

    그리고 또 엘렌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엘렌을 집으로 들여보낸 후에도 난관은 남아 있었다.

    세이나의 집 거실.

    라샤드와 오웬을 앞에 두고 세이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보라색 머리를 만나고 온 거예요.”

    그러자, 오웬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어디 있어?!”

    “마탑으로 갔어요. 다 설명해……. 잠깐만요! 어디 가요?!”

    “거꾸로 매달아 버리겠어!”

    조금만 늦었다면 정말 놓쳐 버렸을 것이다. 오웬은 투덜거리며 2시간 동안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남자들은 막무가내로 오웬을 밀어붙였다. 치안대로 가서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통에, 그는 억지로 합의금 명목으로 돈도 주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놈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입막음 비용도 달라고 했다. 그건 못 주겠다 하니 또 치안대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주니까 다음 사람이, 또 다음 사람은…….

    “공작님은요?”

    “……나는 별일 없었어.”

    “별일 없기는. 여성분들과 숨바꼭질은 즐거우셨습니까, 각하?”

    “즐겁다니! 내가 얼마나 곤란……!”

    “어쨌든 둘 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들의 고생은 안타까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세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오웬의 입을 막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라 머리가 엘렌의 기억을 지운 사람이었어요.”

    맬빈 유벨르.

    그의 존재는 두 남자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엘렌의 기억을 지운 사람이 그였다는 부분에서 오웬은 특히 놀란 듯했다.

    반면 라샤드는 침착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자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이미 누군가 엘렌의 곁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다고…….”

    “나는 아니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웬이 앞서 입을 열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는 몹시 불쾌해 보였다.

    라샤드의 시선이 계속 그에게 붙어 있었던 탓이다. 대놓고 의심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신뢰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이 자리에서 마족의 부활을 가장 막고 싶은 사람은 나일걸. 장담하지.”

    “어째서?”

    “……일족이 마족으로부터 받은 힘, 기억하시죠?”

    라샤드와 세이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오웬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떤 마물의 색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색이었다.

    “라프만 일족은 힘을 받은 후 마족에게 종속되었습니다. 거부권도 없었죠. 이 힘 자체가 그들이 새긴 각인이니. 노예나 다름없죠.”

    “노예요?”

    “그래. 마족이 부활하면 일족은 다시 그의 수족이 될 수밖에 없어. 그런 굴욕은 한 번이면 족해.”

    “역시 너는…… 힘을 없애기 위해 성국에 협력하는 거군.”

    라샤드의 말에 오웬이 끄덕였다.

    “네. 유클레스 후작과 협력할 수도 없죠. 내 저주는 성녀가 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녀의 안전이 최우선이고. 공작 각하께서도…….”

    그러면서 오웬은 공작을 머리끝부터 아래까지 훑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라샤드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내가 후작의 사람이었다면 마족의 일기를 보여 줄 리가 없지.”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세이나는…….”

    오웬은 라샤드의 물음을 무시하고 세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아닐 테고.”

    “제가 후작의 사람이면 일단 이 집 옆은 피해 달라고 할 거예요.”

    “그럼, 1명밖에 없군요.”

    누구?

    그렇게 묻기 바로 직전에, 그가 떠올랐다.

    오웬은 계속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세이나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집에 가장 오래 있었고, 엘렌과도 과거부터 알고 있는 사람.”

    그러나 답답함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그 이름을 내뱉었을 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디온 프라벨.”

    “아니에요.”

    세이나는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끼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두 번째 부정은 조금 더 확신을 넣어 보았다.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디온이 후작의 사람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요.”

    “디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세이나?”

    세이나는 자신이 디온을 잘 안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그녀는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내가 알기로 디온 프라벨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어. 그런데, 지금은 너무 건강하지.”

    “이봐.”

    “어디 건강뿐일까. 나는 많은 헌터들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회장의 첫째 아들이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어.”

    “…….”

    “그리고 셀론 프라벨은 19살 이후로 조카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 이상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지금 수도에 있는데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아는 사람은…… 어쩌면 디온 프라벨의 이름만 빌려 쓰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리고 그제야 세이나는 꺼림칙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몇 달 전, 신전 도서관에서 그는 다른 이의 헌터증을 내밀었다.

    루셀 도르.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라고 말하던 어조가 퍽 가벼웠다. 당시에는 그렇구나, 넘겼지만…….

    ‘디온이…… 디온이 아니라고?’

    세이나는 제 안에서 작게 솟아난 의심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알고 지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와는 거의 매일 얼굴을 보던 사이다. 아니라고, 그를 믿자고 더 세게 말해야 하는데.

    왜 나는 지금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왜 당장, 그를 찾아갈 수도 없는 걸까.

    만약 그가 디온이 아니라면…….

    “디온에게서 수상한 기색은 없었어?”

    그래서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모든 의문을 토해 낸다면 오웬은 더욱 그를 의심할 것이다. 세이나는 엘렌을 도와주고 싶었다. 후작도 막고 싶었다.

    하지만 디온을 믿고 싶기도 했다. 그녀가 느리게 고개를 젓자,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는 수 없군. 내가 알아볼게.”

    “……네?”

    “나는 셀론은 물론 이자벨라와도 친분이 있으니까. 가서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잠깐만요!”

    손이 멋대로 나간 것은 오웬이 거실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급작스레 뻗어나간 손이 오웬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다행히 오웬은 그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가 멈춘 후에도 세이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 갈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그 두 녀석은 디온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미쳤어요?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러나 당장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아닐 거예요.”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입안이 자꾸 말라 왔다. 가쁜 숨을 몰아쉰 후에도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팔을 붙잡은 손이 더욱 강해졌다. 다음 순간, 세이나는 언성을 높였다.

    “디온은 엘렌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

    “진정해, 세이나.”

    라샤드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의 한쪽 손이 세이나의 어깨를, 다른 쪽 손은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세이나는 오웬에게서 떨어진 후에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는 건 이해하지만, 나 역시 디온을 의심하긴 어렵군.”

    “…….”

    “디온이 후작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눈치챘을 거야.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고 엘렌을 후작에게 데려갈 생각만 했겠지.”

    “…….”

    “하지만 디온은 계속 이 집에만 붙어 있었고 엘렌에게 접근하는 기색도 없었어. 오히려 피해 다녔지. 너도 봤잖아?”

    “그것도 타당한 추측이긴 하군요.”

    “디온의 꿈속에서 셀론 프라벨은 디온을 조카로 대했어. 엘렌도 함께 있었지.”

    “꿈은 대체로 기억을 기반으로 하나,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것으로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 맬빈이라는 자도 의심스러워. 엘렌에게 걸린 마법을 알아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아. 엘렌의 앞에서 ‘유클레스’라는 단어만 언급해 보면 되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라샤드는 세이나를 놓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웬은 그런 그를 빤히 보았고, 세이나는 또 그녀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세이나, 그자와 언제 다시 만나기로 했지?”

    그 때문에 조금 뒤, 라샤드의 물음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결론을 말했다.

    “디온을 만나야겠어요.”

    “……어떻게?”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 * *

    아침 청소를 하면서도 세이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은 유난히도 길었다. 맬빈의 경고 탓인지 세 사람은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평소라면 잡담을 하며 시간이라도 보냈을 텐데. 누구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교대를 제안한 이는 오웬이었다.

    세이나는 늦은 새벽에 침실로 올라왔지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엘렌이 꽃집 문을 여는 것을 본 후에도 그랬다.

    ‘디온.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였다.

    똑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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