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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2화 (102/179)
  • #102

    꽥 소리를 지르는 그의 눈가가 촉촉했다.

    아니, 힘든 건 알겠는데. 그래도 다 쓰는 건 좀 아니잖아.

    세이나는 더 투덜대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상자 안을 뒤적거렸다. 하나, 아직 빛이 남은 것이 있다. 딱 하나.

    최하급 마정석을 주머니에 넣으며 세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맬빈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혹 다시 먼지가 피어오를까 봐 겁이 나는지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지도부터 찾아봐.”

    “알고, 있습니다……. 으으,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방 안은 아주 지저분했다. 정돈되지 않은 종이들이 곳곳에 널려 있고, 책도 여기저기 쌓여 있다.

    세이나는 조금만 건드려도 툭 쓰러질 것 같은 물건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났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책상 앞이었다.

    ‘일기?’

    그녀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낡은 책 하나를 펼쳤다.

    페이지 가장 위에는 날짜가 쓰여 있었다.

    1월 21일. 몇 년도인지는 적힌 게 없지만 필시 아주 오래전 같다. 노랗게 변한 종이 위, 글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엉망진창이지만 못 읽을 정도의 악필은 아니었다.

    “1월 21일. 루이가 오랜만에 수도에 찾아왔다……. 루이가 누구지?”

    “루이요?”

    “응. 여기에.”

    일기장 주인은 이 ‘루이’라는 사람과 아주 각별한 사이 같았다.

    그리고 기록벽이 있었다. 일기에는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모조리 적혀 있었다.

    덕분에 세이나는 루이라는 남자가 홍차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과, 마법사라는 것, 귀족이며, 제법 깐깐한 성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종이가 넘어갔다. 첫 문장은 이것이었다.

    “루이가 내민 것은 뜻밖에도, 마족의 봉인석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맬빈이 나지막이 중얼거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설마 루이반?”

    “그게 누군데?”

    “……유클레스 후작입니다.”

    세이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후작이 그런 깜찍한 애칭으로 불린다고? 그냥 우연 아니야?

    “더, 더 읽어 보죠.”

    그는 어느새 맨손으로 일기장을 붙들고 있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일기의 내용을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루이는 일기장의 주인에게 함께 연구할 것을 제안했고, 일기장의 주인은 쉽사리 경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봉인석? 봉인석이라고?

    그러다 돌연, 루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도움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그는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루이는 다른 손도 그 위에 겹쳤다.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은 열을 품고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마족을 부활시킬 수 있어.

    * * *

    성녀의 피는 마족을 봉인할 수 있다.

    하지만 봉인석을 살펴본 결과, 나는 위의 문장이 반쪽짜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녀의 피는 마족을 봉인한다. 단, 마족의 육체만.

    나는 성국의 비밀 서고에서 마족을 반신(半神)이라고 부르는 기록을 찾아냈다. 즉 육체는 지상에 속해 있으나 영혼은 신에 더 가깝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 육체와 혼은 연결되어 있다. 성녀는 육체만 봉인함으로써 마족의 혼도 잡아 둔 것이다.

    마력의 근원은 마족의 혼에 있다.

    나와 루이는 육체와 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마족의 혼을 빼내는 방법을 생각했다. 육체에 얽매이지 않으면 봉인에도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혼만으로는 지상에 잡아 둘 수 없는 법. 나는 다른 사람의 육체에 마족의 혼을 이식하자고 제안했고, 루이는 받아들였다.

    ……아마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래야, 마물을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나는 마물에게 당해 오는 사람들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마주한다. 그들의 고통, 슬픔, 분노를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마족은 마기로 이 땅을 오염시켰다. 그렇다면, 이 마기를 거두는 법도 필시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다음의 마탑주들을 위해 이 방과 이 일기를 남긴다. 만약, 내가 실패했다면 부디 내 연구를 이어 나가 주기를 바란다…….

    루이반 유클레스. 그가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다.

    일기는 거기가 끝이었다.

    * * *

    맬빈은 경악에 차 소리쳤다.

    “후작이 마족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까?!”

    “너 몰랐어? 엘렌이 성녀잖아.”

    “엘렌이 성녀라고요?!”

    세이나는 그보다 더 놀라게 되었다. 얘 대체 뭐지?

    “너 그럼 후작이 엘렌을 찾는 이유도 몰랐어?”

    “가, 가문의 명예에 흠을 낼지도 모르니…….”

    “하. 그렇게 둘러댔군.”

    “그래서 찾는…… 거라고…….”

    맬빈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듯했다.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턱은 그보다 더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뭐야. 얘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도저히 연기로 보이진 않았다.

    불안정한 숨소리. 잔뜩 긴장된 몸. 토막토막 끊겨 나오는 목소리. 이게 대체……. 후작은 왜…….

    “내 일행은 엘렌을 성녀로 추정하고 있어.”

    세이나의 말에 그가 고개를 홱 들었다. 옅은 갈색 눈에는 충격이 가득했다.

    “엘렌이 성녀라면 그냥 마족을 부활시켰어야죠. 왜 굳이 정착시킵니까?”

    “이미 부활시킨 마족이 있어.”

    “예!?”

    세이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털어놓았다.

    칼만 공작이 마족을 만난 것과, 그를 추적하다가 어떤 일기를 발견한 것. 그리고 그 엘렌의 피를 받아 그가 힘을 점차 회복했다는 것도.

    그는 도망친 후에도 계속 엘렌을 노리고 있으며, 그가 보낸 마물 때문에 세이나 자신의 집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까지.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맬빈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이러다 정말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을 정도다.

    하지만 세이나의 집 근처에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부터는 점점 침착해졌다. “엘렌을 지켜 주셨군요.”라는 목소리에선 깊은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럼…… 그럼 이 연구는 실패한 걸까요?”

    “글쎄.”

    칼만 공작은 그 마물이 괴기한 형상이었다고 회상했다. 사람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마족은 마물의 창조주이니 비슷하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실험이 실패했다는 뜻인데…….

    “네 이전의 마탑주를 알아?”

    “제 이전 마탑주는 스승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편안히 임종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럼 그보다 더 이전…….”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탑주님! 여기 계셨군요!”

    문 앞에 나타난 이는 아주 어린 여자아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에 맬빈은 물론, 세이나도 확 얼어붙어 버렸다.

    그러나 잠깐뿐이었다. 세이나는 곧 밝게 외칠 수 있었다.

    “살았다!”

    “여기서 뭐 하세요!? 모두 찾아다니고 있잖아요!”

    “살았다! 살았어, 맬빈! 드디어……. 어, 너 울어?”

    “크흡! 제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착각하신 겁니다.”

    “정말, 이런 곳에 계시면 어떡해요? 행사의 마무리를 하셔야죠! 어서 가요!”

    세이나와 맬빈은 허겁지겁 소녀의 뒤를 따랐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도 거침없이 걸어갔다.

    어떻게 길을 알고 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의아해할 만한 부분은 많았지만 두 사람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했던 탓이다.

    세이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작은 대체 언제부터 마족 추종자였던 걸까?’

    “다 왔어요!”

    그러다 돌연, 마탑이 나타났다.

    세이나는 그제야 저가 밟고 있던 돌계단을 확인했다. 자신이 마탑 근처의 지하를 헤매고 있던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출구는 마탑 근처에 있는 숲속이었다. 저 멀리, 반짝거리는 마정석의 빛이 보였다.

    “다행이군요. 드디어 밖이에요.”

    맬빈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맑아진 공기를 만끽했다. 몇 번 허공에 손짓하다가 미소 짓는 걸 보니, 마력도 돌아온 모양이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건 바로 그다음부터였다.

    “고맙구나. 이름이……?”

    하지만 돌아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 갈래머리를 휘날리며 활기차게 뛰어가던 소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기이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세이나,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뭐, 뭔데?”

    “그 아이, 발소리가 들렸었나요?”

    분명 그게 들렸어야 했다.

    그러나 세이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들린 건 오직 바람 소리밖에 없었다.

    어, 그러고 보니 지하에서도 문에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우, 우리가 유령이라도 본 걸까?”

    “일단 나왔으니 조, 조, 좋게 생각합시다! 긍정적으로!”

    “탑주님! 여기 계셨군요!”

    멀리서 들려온 소리가 또 한 번 그들을 일깨웠다. 세이나와 맬빈은 다가오는 청년의 그림자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도 있고, 발소리도 있고. 안색도 유령 같진 않다.

    이번에는 사람이 맞는 듯하다. 그가 거칠게 숨을 쏟아 낸 후 다시 외쳤다.

    “한참 찾았잖아요!”

    “아, 그랬군. 미안하네.”

    “어서 가셔야……. 응? 이쪽 분은 누구시죠?”

    맬빈은 그의 시선을 바로 가로막았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해 준 배려 같았지만, 세이나는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청년이 몸을 숙이면서까지 그녀를 더욱 유심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탑주의 숨겨진 애인, 뭐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저는 일단 가 보겠습니다. 조만간 찾아가겠습니다. 옆집 맞죠?”

    “응.”

    “아무래도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후…… 아니, 그분이 저를 의심하고 있거든요. 사실 지금까지도 꽤 시간을 끌었지요.”

    의심이요? 청년이 중얼거렸다. 맬빈은 그에게 물러나라는 듯 손짓하더니 세이나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무래도. 후작이 엘렌이 그 꽃집에 있는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꽤 전부터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아, 그럼 곧 들이닥치겠군.”

    세이나는 덩달아 작게 속삭였다.

    “잘 지켜보고 있을게.”

    “아니요……. 그런 낌새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뭔데?”

    “이미 누군가 엘렌의 곁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

    “탑주님!”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불빛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은데, 시간이 너무 없었다.

    더군다나 먼저 온 청년은 이제 맬빈의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탑주니임! 빨리 가 보셔야 해요!”

    “일주일!”

    그리고 그는 꽤 힘이 좋은 듯했다. 우악스러운 힘에 맬빈의 몸이 바로 옆으로 기울었다. 맬빈이 버둥대며 세이나에게 외쳤다.

    “일주일 후에 꼭 가겠습니다!”

    세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미…… 누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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