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1화 (101/179)
  • #101

    세이나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맬빈은 놀라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가 세이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초콜릿 포장지를 뜯었다.

    우물우물. 꿀꺽. 그가 말했다.

    “실물은 처음이네요. 소문의 그분이시군요.”

    “당신, 나를 알아?”

    “리처드 로힐의 딸이 아버지의 행방을 쫓는다는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이 1년 전에…….”

    “그건 됐고. 아버지가 얽힌 사건에 대해 알고 있어?”

    “아니요. 그때는 저도 어렸지요. 9살이었던가요.”

    상대는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 기색이었으나, 굳이 묻진 않았다. 좋은 판단이라고 세이나는 생각했다.

    처음 본 사람이랑 굳이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세르벤스 숲에 후작이 몇 번 갔다는 것까지밖에 말씀 못 드리겠네요.”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땐 그녀도 매서운 눈빛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후작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있어?”

    기대를 품고 던진 질문은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맬빈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후작은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식도, 심지어 아내도 안 믿더군요. 사람을 많이 부리고는 있으나 그의 속내를 제대로 아는 이는 없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고.”

    “구린 구석이 많다고 들리네.”

    “그래서 저도 후작에게 그 사건에 대해 직접 듣진 못했습니다.”

    “그럼 어디서?”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해 주셨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다시 그녀의 눈에 사나운 기운이 감돌자 맬빈이 저지하듯 말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들은 게 어디야.’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니, 또 다른 초콜릿이 튀어나왔다.

    세이나는 선심 쓰듯 그걸 맬빈에게 던져 줬다. 나름의 정보 값이었다.

    “당신은 부모님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후작을 쫓는 거군요?”

    다시 그의 볼이 커졌다. 세이나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참 잘도 먹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후작의 목표가 엘렌이니까. 흠, 엘렌을 지키면 후작을 방해할 수도 있고. 흐음, 그렇군요.”

    “아무튼, 난 여기서 죽을 마음 없어. 다 먹었지? 가자.”

    “잠시만요. 먹고 바로 걸으면 배 아프잖아요!”

    “성가시긴.”

    지적인 학자는 개뿔. 세이나는 혀를 찼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투덜거림이 너무 많았다. 이쪽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인가?

    맬빈은 아예 자리를 잡고 좀 쉴 생각인 듯했다. 아래를 두리번거리더니 발을 움직여 먼지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세이나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쉴 자리는 필요 없고, 저 발목에 걸 만한 끈이 있으면 좋겠다. 질질 끌고 가게.

    ‘응? 저 벽돌은 뭐지?’

    그러다 뭔가가 시야에 잡혔다.

    일전의 지하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삭막한 벽면 사이에 벽돌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벽돌에 다가갔다. 공사가 잘못됐나? 무심코 그걸 누른 순간.

    돌연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졌다.

    “혹시 욕을 가르친 사람도 당…….”

    쿵!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맬빈이 뒤로 나자빠졌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맞으며, 세이나는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뒤이어 감탄사가 나왔고.

    “아.”

    장난스러운 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드디어 움직였네?”

    “죽을 뻔했잖아요!”

    맬빈은 바위 뒤에서 제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덜덜덜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다.

    “아무거나 함부로 누르지 마세요!”

    “출구로 향하는 길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지.”

    “함정이죠! 누가 봐도 함정이잖아!”

    마침 그때, 마정석의 빛이 사라졌다. 세이나는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마정석에 불을 붙였다.

    다시 만난 맬빈은 어느새 그녀의 발치에 와 있었다. 이 녀석 혹시…….

    “어두운 거 무서워하는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를 붙잡지 않은 건 정말 최소한의 이성이었을 것이다. 맬빈은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아마, 후우……. 마나가 제한된 공간이라 마정석 내 마력의 소모도 빠를 겁니다.”

    “이걸로 마법을 못 써?”

    “최하급 마정석으로 이곳의 결계를 깨부수라뇨? 차라리 쥐에게 마법을 가르치세요.”

    말 한번 얄밉게 하는 놈이네.

    “역시 망했습니다.”

    그리고 포기도 빠른 놈이다. 세이나는 맬빈이 다시 주저앉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망했어요. 아무도 이곳을 알지 못해……. 아무도 우릴 찾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꽤 비관적인 놈이기도 했다.

    “그러니, 받아들입시다.”

    아니다. 긍정적인가?

    그가 바닥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두고, 양손은 무릎에 올린 채 하늘을 향해 펼쳐 놓았다.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뭘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 그런 생각이었다.

    그는 참선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더니 스르륵 눈을 감았다.

    “죽음은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이나는…….

    “심호흡하세요. 로힐 양. 마음의 평화가 중요한 겁니다.”

    제 갈 길을 가기로 했다.

    ‘너나 실컷 받아들여라.’

    성큼성큼 떠나는 그녀의 뒤로 숨소리가 따르기 시작했다.

    “후, 후, 하…….”

    아주 끈질기게.

    “후, 후, 하…….”

    * * *

    결과적으로, 맬빈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는다며! 왜 따라와!”

    “혼자 죽긴 외롭잖아요.”

    지겨운 숨소리가 사라질 때쯤, 가쁜 발소리가 들렸다. 설마, 뒤를 바라보자 어둠 속을 헤치고 맬빈이 튀어나왔다.

    - 진짜 가면 어떡해요!

    ……라고 울먹이면서.

    ‘성가신 녀석.’

    맬빈은 이제 그녀의 뒤에 찰싹 붙어 있었다.

    잠시 혼자 겪었던 어둠이 정말 무서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세이나는 더는 끈을 찾지 않게 되었다.

    진작 이렇게 겁줄걸. 잘만 따라오잖아.

    “어쩔 겁니까?”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갈림길이 나왔다. 그녀는 양쪽의 어둠을 한참 번갈아 보다 말했다.

    “헌터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뭔지 알아?”

    “뭡니까?”

    “바로 직감이야.”

    그녀의 양손이 갈림길 사이의 벽을 짚었다.

    맬빈까지 입을 다물자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바라던 바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 생각해. 생각해 보자.’

    보통 미로에서는 한쪽을 정해 걸어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어두웠고, 마정석도 거의 다 떨어졌기에 무작정 헤매기도 어려웠다.

    모든 결정을 신중하게 내려야 했다. 세이나는 눈을 질끈 감고 집중했다. 뭔가……. 뭔가…….

    뭔가 없을까?

    그때였다.

    달칵.

    돌연 들려온 소리에 그녀는 물론, 맬빈의 눈도 번쩍 뜨였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오른쪽을 향했다.

    잠시 후, 또 한 번 소리가 났다.

    달칵.

    “저기다! 내 직감이 외치고 있어!”

    “소리가 나서겠죠!”

    “아니야! 직감이라니까!”

    아옹다옹하면서도 두 사람은 착실히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길은 지금까지와 같은 좁은 복도였다. 다행히 외길이었고, 걷다 보니 바람 소리도 들렸다.

    맬빈의 얼굴에 점차 희열이 올랐다. 세이나도 미소 짓게 되었다. 직감이다! 아니다! 싸우면서도 두 사람은 밝게 웃고 있었다.

    그 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문이네.”

    “문이네요.”

    사실, 그냥 무시하고 걸어가도 된다.

    길은 계속 이어져 있었으니. 문은 있는 곳은 벽면의 오른쪽. 그것도 혼자 겨우 지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떠날 수 없었다.

    달칵. 그 소리가 혹시 문을 여닫은 소리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혹시, 다른 누가 있는 걸까?”

    “사, 사람이요? 여기에?”

    사람이라고 하진 않았는데. 세이나는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맬빈의 안색이 너무 나빴다.

    유령 싫어하는 사람이 여기 하나 더 있네.

    “열게.”

    라고 말하기 전에, 그녀의 손은 이미 손잡이에 가 있었다. 맬빈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은 세이나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었다.

    “여세요.”

    그리고 끼이익. 문이 열렸다.

    마정석의 빛 아래 드러난 방은 평범한 서재였다. 정면에는 책상과 의자가, 벽면에는 책장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다만, 아주 오래된 곳으로 보이긴 했다. 세이나는 거침없이 시야를 가로막는 거미줄을 잡아 뜯었다.

    “용감하시네요…….”

    맬빈은 몸을 움츠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책장 앞에 들어서 있는 형체들은 모두 상자들이었다. 세이나는 거침없이 상자를 열었다.

    “콜록! 콜록! 웬 먼지가……. 콜록!”

    오랫동안 방치된 상자는 먼지 그 자체였다.

    열자마자 갑자기 연기처럼 먼지가 피어오르며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세이나는 열심히 먼지를 헤치면서도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 이건?

    “마정석?!”

    점차 먼지가 가라앉자 그 빛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세이나는 기뻐 외쳤다.

    “마정석이야!”

    비록 최하급이지만 이 정도로 많으면 마법을 쓰는 데 무리 없을 것이다.

    “콜록! 그거 아주 잘……됐……! 쿠에헥!”

    “괜찮아?”

    “괜찮지 않…… 콜록! 콜록!”

    맬빈이 요란하게 기침을 쏟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세이나는 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손이 맬빈의 팔을 감쌌고, 그의 몸이 앞으로 확 기울었다. 그는 그렇게 겨우, 마정석에 닿을 수 있었다.

    마정석이 하나둘 점멸한 건 그 순간부터였다.

    “오?”

    세이나는 한결 나아진 공기 속에서 감탄했다. 눈 깜짝할 새 주변의 먼지가 모두 말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마탑주가 맞긴 하구나?”

    “그걸 왜 거짓말을 합니까. 하, 이제 살 것 같네요.”

    상자에 몸을 기댄 채 맬빈이 한숨을 쏟았다. 고작 몇 초 기침했을 뿐인데 그는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축 처진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세이나는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잘했어. 이제 이걸로 나가…….”

    바로 그때, 다시 상자 안으로 세이나의 시선이 닿았다. 빛을 잃은 마정석들은 볼품없었다. 그냥 돌멩이. 길에 널리고 널린 모양이다.

    문제는 모든 마정석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모든.

    “그걸 다 쓰면 어떡해!”

    “저는 어릴 때 천식으로 고생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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