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100화 (100/179)

#100

“침묵이 기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맬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축축했다. 묘하게 무겁고, 답답한 데다가 악취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세이나의 집중력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칼끝이 닿은 곳의 살이 푹 들어갔다.

맬빈의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닫혔다. 무슨 말을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거 알아? 헌터들 중에는 말이야.”

세이나는 그의 고민을 덜어 주기로 했다.

“가끔 아주 고약한 녀석들이 있거든. 예를 들면, 긴 전투 후 동료들이 쉬고 있는데 몰래 마정석을 훔쳐서 달아나는 놈들이 있지.”

그의 목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맬빈이 살짝 고개를 틀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뻔뻔한 녀석 중엔 몰래 마정석을 숨겨 놓고 돌아와서 시치미를 떼기도 해. 그 때문에 헌터질을 하다 보면…….”

세이나는 그런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빛이 닿은 그녀의 금색 눈동자가 마치 맹수의 것처럼 밝게 빛났다.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방법 한두 개쯤은 싫어도 익히게 되거든.”

“죽이세요.”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순순히 털어놔라. 이렇게 덧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맬빈의 대답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리고 단호했다.

“죽이십시오.”

“그런 이야기도 꽤 자주 들어.”

세이나는 비틀린 미소와 함께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단검이 목을 지나 다시 허리로 돌아왔다. 살짝 찌르자, 그가 흠칫 놀라 다시 돌아보았다.

“걸어가. 너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할 거야.”

“저, 저기를요?”

“그럼, 여기서 굶어 죽을까? 뭐라도 해 봐야지.”

맬빈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쭉거렸다.

세이나가 다시 단검으로 그를 쿡 찔렀다. “어디서 앙탈이야?” 쏘아붙이자 드디어 그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진짜 뭐 하는 놈이야?”

다시 질문을 떠올린 건 넓은 방에서 막 벗어났을 때였다. 이어진 길은 좁은 복도였다. 창문 하나도 없는 외길.

무심코 더듬어 본 벽은 차갑고 축축했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세이나는 바로 손을 거두었다.

“그것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마탑의 함정을 작동시키는 법을 아는 것 보면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마법사인가 본데…….”

맬빈은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대화하기 싫다. 그런 뜻이 그의 어깨를 통해 전달된다.

세이나는 제멋대로 추리를 떠올렸다.

“……너 설마 마탑주?”

답은 없었다.

“나 마탑주랑 갇힌 거야?”

계속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세이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푸핫! 마탑주가 마탑의 함정에 갇혀?”

“웃지 마세요. 사안의 심각성을 모르겠습니까?”

“풉, 마탑주가 함정에…….”

“마탑의 함정은 마탑주들에게만 전해집니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조차,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제야 맬빈이 미간을 구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린 여기에 갇힌 겁니다. 예의 없는 헌터 씨.”

그리 말하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세이나는 급히 웃음을 거두고 괜히 헛기침했다. 단검을 거둔 것도 바로 그때였다.

“좋아. 기 싸움은 그만둘게.”

맬빈이 다시 돌아섰다. 끝없는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뒤에서 세이나가 다시 속삭였다.

“그거 정말이야?”

“제가 이런 상황에 왜 거짓말을 합니까.”

“날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아, 당신은 엘렌의 친구죠? 엘렌의 친구에게 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해를 가하려면 처음 벗어날 때 그런 작은 마법을 쓰진 않았겠죠.”

“오, 미로 속에 가두는 건 괜찮고?”

“……나중에 구해 주려고 했습니다.”

저건 거짓말 같은데.

세이나는 일단 의심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보다는 일단.

“난 엘렌의 친구가 맞아.”

그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엘렌이 걱정되어서, 엘렌을 부른 놈을 잡으러 온 거지.”

“예, 그런 것 같았습니다.”

“엘렌에게도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며? 그럼 왜 우리를 굳이 떨어트려 놓은 거야?”

“칼만 공작이 있지 않았습니까.”

세이나는 새로운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우리 집 요리사는 공작님이었지. 종종 까먹는다니까.

“그리고 붉은 머리는 라프만……. 어느 쪽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응, 이제 걔들도 네가 싫을 거야.”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을 제일 먼저 떨어트려 놓을 걸 그랬네요.”

맬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세이나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인정받은 것 같아 조금 뿌듯한걸.

“그런데.”

그러다 돌연 맬빈이 멈춰 섰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뭘?”

“유클레스 후작 말입니다.”

“아, 그건…….”

세이나는 느리게 눈을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도서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아직 그의 속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 않았나.

게다가 거기서 그는 후작의 수하처럼 보였다. 이건 일시적인 동맹일 뿐이다. 세이나는 답변을 골랐다.

“엘렌에게서 들었어.”

“거짓말.”

그러나 겨우 생각해 낸 변명은 1초도 버티지 못했다. 세이나는 위협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야.”

맬빈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짜증스레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세이나를 노려보았다.

“엘렌은 유클레스 후작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뭐?”

“아, 마법이 끝나 가네요.”

그 순간, 마정석의 불빛이 끝났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 속에서 세이나는 다시 안주머니를 뒤졌다. 탁! 탁! 불꽃이 튀어 오르고, 곧 다시 주변이 밝아졌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너…….”

세이나는 굳어 버렸다.

그는 또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나의 시선이 향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 결 좋은 머리칼이 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보라색이 아닌, 녹색으로.

“설마, 엘렌의 기억을 지운 게 당신이야?”

* * *

맬빈의 이야기는 길었다.

“엘렌과는 12살 때 만났습니다. 스승님이 유클레스 후작과 인연이 있어서 영지에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가 묘사한 과거에서도 엘렌은 매우 불행했다.

가족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밝게 웃는 모습이 안쓰러워 차마 보고 있기 힘들었다고, 맬빈은 덧붙였다.

“그래서 도주 계획을 도운 겁니다.”

엘렌이 열여섯이 되던 생일날. 그는 조촐한 생일 파티를 위해 몰래 영지에 들어갔다.

거기서 계획을 세웠다.

“유클레스 후작의 말을 따르는 것도 엘렌을 위해서입니다. 곁에 있으면 엘렌을 찾으려는 후작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으니까요.”

세이나는 계속 그의 머리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을 끄기 전엔 분명 보라색이었는데, 이젠 나뭇잎 같은 녹색이다.

‘세상에. 보라돌이가 남주인공 후보 중 1명이었다니.’

원작이 꼬여서 계속 안 나오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는 계속 엘렌을 지키고 있었다. 후작의 곁에서 첩자 노릇을 하면서.

맬빈, 그는 마지막 남주인공 후보가 확실했다.

‘그래, 이상하다 생각했어.’

도서관에서 그는 바로 엘렌을 만나러 갈 분위기였다. 그래서 세이나도 더 경계했고.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납치범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원작이 꼬여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맬빈은 일부러 오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었다.

“머리 색은…….”

“이건 마법이니까요. 마력이 차단된 공간에 왔으니 지워지는 거겠죠.”

“왜?”

“왜라니. 보라색이 더 예쁘잖아요.”

“아, 그래…….”

그렇구나. 세이나는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해초 같아서 마음에 안 듭니다. 원래는 이런 색이 아니었는데 어릴 때 마법약을 잘 못 먹어서 이렇게 됐죠.”

그러고 그는 드디어 손을 내렸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세이나를 향했다.

“그럼 이제 말해 주겠습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도서관에서 들었어.”

“도서관? 아…….”

“몰랐던 거야?”

“신전은 마법이 제한된 구역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감각이 둔해져요.”

“어쩐지. 전혀 모르더라.”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거기서 만난 이유는, 도청 마법의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일부러 금지된 공간에서 만났는데…….”

“내가 당신을 쫓아간 거야. 수상해 보였거든.”

“……그랬군요.”

그리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이나는 그동안 맬빈을 관찰했다. 녹색 머리에 옅은 갈색 눈동자.

자세히 뜯어보니 제법 잘생기긴 했다. 책에 둘러싸여 공부하는 학자. 나름대로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범상치 않은 외모는 보통 주요 등장인물이지. 세이나는 그의 존재감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마치 신호인 양, 맬빈도 움직였다. 그가 제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 이제 서로의 문제는 해결되었군요. 그럼 이제 사이좋게 죽을 준비나 할까요?”

“뭐?”

“말했지만 이곳에서는 마법을 못 씁니다. 저는 마법이 없으면 무력한 놈이라서요.”

지적인 분위기는 취소다. 근성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걷기나 해. 뒤는 내가 볼 테니까.”

“사실 배고파서 못 걷겠습니다.”

“나 참, 손 많이 가는 녀석이군.”

세이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엘렌이 맛있다고 억지로 쥐여 준 초콜릿과 사탕이 거기에 있었다.

가볍게 던지자 맬빈이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갈색 눈에 생기가 가득 찬 순간이었다.

“그거나 먹어.”

“……갑자기 친절하니까 소름 끼치네요.”

“그건 당신이…….”

남주인공 후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지.

세이나는 할 말을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엘렌을 위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그래.”

맬빈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포장지를 뜯었다.

정말 배가 고팠는지 한 번에 초콜릿 대여섯 개를 입에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씹는 것도 거침없었다. 부푼 양 볼이 햄스터 같다.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그가 물었다.

“엘렌이랑 절친한 분이신가 보네요.”

“그냥 이웃 주민이야.”

“제 이름은 맬빈 유벨르입니다.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세이나.”

“세이…….”

그때,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기묘한 광채가 스쳤다.

세이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가 초콜릿을 꿀꺽 삼킨 후 물었다.

“당신이 그럼 리처드 로힐의 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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