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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99화 (99/179)

#99

세이나는 단검을 더욱 바짝 그의 목에 붙였다. 가발이 완전히 흘러 떨어진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허물처럼 버려져 있는 금색 머리칼을 본 맬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이나는 보란 듯이 그 위에 걸쳤던 로브도 벗어 던졌다.

‘운이 좋았지.’

라샤드와 떨어진 순간에는 그녀도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의아했다.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몰려들어?

세이나는 한층 더 예민해진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승사자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마탑 앞이라 다른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하지만, 세이나는 그가 유독 의심스러웠다.

그는 한창 불꽃이 터지는데 하늘을 전혀 보지 않았다.

세이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가발 가판도 찾아내었다.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낮 내내 소리치던 마법사는 불꽃을 구경하러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탐스러운 긴 금발 가발을 집었다. 그리고, 옆에 물건을 덮어 두기 위해 둔 검은 천도.

그리고 그림자의 주변에서 얼쩡거려 보았다. “돈으로 해결하죠! 네?!” 오웬이 그리 외친 순간, 세이나도 그 근처에 있었다.

맬빈은 예상대로 그녀를 쫓아왔다.

“움직이지 마, 맬빈.”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을 꾹 눌렀다. 피는 아직 나오지 않았건만, 맬빈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했다.

“우리 아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할 얘기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천천히…….”

펑! 섬광이 번쩍 빛난 것은 그때였다.

돌연 느껴진 열기에 세이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확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불꽃 마법이었다.

겨우 눈을 떠 앞을 확인했을 땐, 이미 맬빈이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야! 어디 가!”

그는 제법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마탑까지도 계속 뛰었을 텐데, 아주 맹렬한 기세였다. 마법사치곤 잘 뛰는군. 세이나는 평가했다.

하지만 헌터보다 잘 뛰진 못했다.

“거기 서어어어어!”

“으아아아악!”

펑! 마지막 불꽃이 터졌다.

세이나는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맬빈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손을 뻗기에는 좀 애매하고, 태클을 걸면 적당히 닿을 것도 같다.

‘정말 밀어 버려?’라고 고민할 무렵 맬빈이 새로운 문을 열어젖혔다. 1명이 겨우 지나갈 것 같은 좁은 복도가 펼쳐졌다.

두꺼운 벽에 부딪혀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거기 서라고 했지!”

“그만 좀 따라와!”

제법 간절한 외침이었다. 그녀는 가뿐히 그 요청을 무시했다.

도서관에 언제 들렀는지 이제는 까마득할 지경이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뭐? 따라오지 마?

“얘기 좀 하자고!”

복도를 지나자 다시 계단이 나타났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선형 계단이다. 그래도 세이나는 거침없이 올랐다. 탁. 탁. 탁. 탁. 앞서가는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맬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벽을 꾹 눌렀다.

‘설마.’

세이나는 일단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쿠쿠구궁! 굉음과 함께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겨우 벽의 튀어나온 곳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리 아래가 허전해졌다.

“이 미친놈이!”

“쫓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이나가 튀어나온 벽돌을 붙잡고 소리치자 맬빈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녀는 제 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이 무너진 것이다.

“함정…… 제길!”

눈치채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저 까마득한 어둠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빨리 눈치챘다 해서, 그녀가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세이나는 상체만 겨우 앞의 계단에 매달려 있었다.

절벽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그녀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저 아래는 뭐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기세등등해진 맬빈은 계속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제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얄미운 놈.’

상태만 괜찮았다면 확 걷어차 버렸을 것이다. 그가 한 걸음 더 계단을 내려와 세이나의 바로 앞에 섰다.

무릎을 접자 후드 아래로 그의 머리칼이 흘러나왔다.

보라색. 그걸 본 세이나는 결정을 내렸다.

“자, 이제 제가 묻지요. 도대체 누구시기에 이러는…… 끄아악!”

그녀의 손이 맬빈의 발목을 꽉 붙들었다. 그 바람에 맬빈이 중심을 잃고 뒤로 철퍼덕 넘어졌다. 세이나가 씩 웃었다.

혼자 떨어질 순 없지.

“놔요!”

“못 놔!”

“놓으라고요!”

“못 놔!”

맬빈은 결사적으로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잡히지 않은 발이 그녀를 노렸으나, 세이나는 가뿐히 피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웠다.

맬빈은 제법 단단한 지지대였다.

그녀의 다른 쪽 손이 움직였다. 맬빈이 아주 단단하니, 다른 확실한 지지대만 있다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마침 눈앞에 튀어나온 손잡이가 보였다.

왜 이런 것이 여기에 있지?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세이나는 확 그것을 잡았다.

철컥.

“안 돼!”

쿠구궁! 다시 굉음이 시작되었다. 세이나는 제 상체를 기대고 있던 계단마저 무너지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도 빠르게 판단하긴 했다. ‘아, 이것도 함정 스위치였군.’ 바로 그 순간에 맬빈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세이나는 미련 없이 그를 놓았으나…….

덥석.

“악!”

이번에는 맬빈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놔!”

“못 놔요!”

“놓으라고!”

“못 놔요!”

“이런 미친!”

세이나는 그가 그랬듯 발길질을 해 보았다. 퍽! 소리가 났으나, 발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그가 악 소리를 냈다.

“진짜 좀 놔!”

“장치를 작동시킨 건 그쪽이 아닙니까!”

“그러게 누가 처음부터……!”

거기까지 말하고 세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목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혼자만으로도 힘든데. 저보다 키가 큰 남자를 하나 더 달고 있자니 더욱더 힘들었다. 게다가 지금 의지할 곳은 단 한 손뿐.

그리고 그녀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예정된 결과가 나타났다. 땀에 젖은 손이 손잡이에서 미끄러지자 세이나가 중얼거렸다.

“시X…….”

그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으아아악!”

* * *

다행히 떨어진 곳은 푹신했다.

“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아래로 꺼졌다. 그리고 곧 다시 튀어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세이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건 뭘까. 거대한 슬라임?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큰 매트리스?

“살긴, 살았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맡은 것만으로도 속을 메스껍게 하는 악취였다. 코 안이 따끔거리는 감각은 분명, 현실의 것이었다.

다시 손을 움직이자, 부드러운 뭔가가 손끝에 닿았다. 세이나는 일단 후려쳐 보았다.

찰싹!

“이봐! 정신 차려!”

“으으, 어머니…….”

“그래, 맬빈. 엄마란다.”

“어머……는 무슨! 저리 가요!”

맬빈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그의 손목을 제압해 쓰러트렸다.

세이나는 제 아래에 깔린 남자를 보며 웃었다.

“잘됐어. 우리 하다 만 깊은 대화를 나눠 보자고.”

“이것 놔요!”

그때, 다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세이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천장이 되어 버린 계단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빛을 가리더니…… 이윽고.

쾅!

“엥?”

주변이 캄캄해졌다. 직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또 다른 소음이 들리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탁! 탁! 불꽃이 튀었고.

곧 마정석의 불이 밝혀졌다. 세이나는 맬빈을 흔들었다.

“이봐, 일어나.”

주황색 빛이 비춘 맬빈의 얼굴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세이나가 쓰러트린 자세 그대로 하늘을 향한 채, 살짝 입을 열고 있다.

숨소리마저 없었다면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어디로 나가야 해?”

“망했어!”

그가 제 얼굴을 감싸며 외쳤다.

“다 망했다고……! 당신 때문에……!”

세이나는 그가 혼란스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계속 툭툭 발길질하자, 그가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짓입니까!”

“알아듣게 설명해야 같이 절망해 줄 거 아냐?”

“하, 여기는…… 여기는 마탑에서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만든 함정입니다.”

“응. 그래 보이네.”

“그리고 이 안은 미로예요.”

“미로든 뭐든 출구는 있을 거 아냐.”

“……없을지도 모릅니다.”

“뭐?”

“저기 보세요.”

그가 한구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주황색 빛이 닿은 물체는 누군가의 두개골이었다. 세이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

“……요즘 저런 인테리어가 유행이야?”

“저게 인테리어로 보입니까?”

맬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보다, 무슨 마법이라도 써 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침입자를 막기 위한 곳이라고. 모든 마나가 차단된 곳입니다. 마법을 쓸 수 없어요.”

“갈수록 첩첩산중이네. 일단 일어나.”

맬빈은 예상외로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세이나는 그를 옆으로 이끌었다. 마정석의 빛으로도 밝힐 수 없는 어둠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먼저 걸어.”

“네?!”

“당신 말 못 믿겠으니 일단 걸으라고.”

그녀는 어느새 단검도 다시 꺼내 그의 등 뒤를 겨누고 있었다. 그 감촉을 느꼈는지, 맬빈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음, 이러니까 내가 악당 같군.

“가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아까부터 이야기를 하자 그러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요?”

“그야 당연히 엘렌에 대해서지.”

그의 긴장이 칼끝을 타고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까처럼 뿌리치거나 도망치지 않는 걸 보아, 마법을 못 쓰는 것은 진짜인 것 같다.

“당신, 엘렌이랑 무슨 사이야?”

“……단골손님일 뿐입니다.”

“아하, 그래?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네.”

세이나의 칼끝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허리부터 등을 가로질러, 어깨를 넘어 다시.

목에 닿았다.

“유클레스 후작과 무슨 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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