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라샤드는 급히 소리쳤다.
“세이나!”
해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그의 앞에 커다란 벽을 만들었다. 그 기세에 밀려 저절로 뒷걸음질을 치던 순간.
시야에서 세이나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소리를 내 보려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빠르게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퍽! 또 다른 누군가 그의 발을 밟았다.
“윽!”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샤드는 아주 거대한 흐름 속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좀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멀어지고,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외쳐 보려고 했다. 퍽! 또 누군가 그를 지나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젠장!’
그 순간, 불꽃이 터졌다.
펑!
마법으로 쏘아 올린 불꽃이 일대를 환히 비췄다. 그러자 또 마법이라도 부린 듯, 사람의 물결도 뚝 멈춰 버렸다.
라샤드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금빛으로 물든 얼굴 중, 세이나는 없었다.
이미 너무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 틈에 나아가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생각하며, 급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퍽!
누군가와 또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작은 몸이 뒤로 쓰러졌다. 라샤드는 당황하여 쓰러진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나?”
여자가 소리쳤다.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예욧?!”
그것이야말로, 그가 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돌연 그 여자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론이 봤으면 ‘암살자냐!?’라고 소리쳤을 만큼이나 세게.
그러나 여인의 손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보는 눈도 너무 많았다. 라샤드는 화를 억누르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나?”
“괜찮을 리가…… 헉!”
그런데, 여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잔뜩 화가 나서 고개를 쳐들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크게 놀라 버렸다.
“괘, 괘…….”
라샤드는 빠르게 그녀를 포기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급해서. 실례하지.”
“괜찮지 않아욧!”
오늘은 여러 번 발목이 붙잡히는 날이군. 말 그대로, 여인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외쳤다.
“아아, 너무 아파! 너무 아파요!”
“……괜찮아 보이는데.”
“아파요! 너무 아프다고요!”
“케일린! 드디어 찾았…… 어머!”
매정하게 뿌리칠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라샤드를 보자마자 쓰러진 여자처럼 눈을 빛냈다.
“누구야? 이 멋진 분은?”
친구를 일으켜 주지도 않고 말이다.
“피해를 줘서 미안하군. 크게 다쳤다면 내일 칼만 공작가로 찾아와. 그럼 난 이…….”
“잘생긴 신사분! 같이 구경하러 가지 않으실래요?!”
그리고 다음 순간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요! 같이 가요!”
다른 여자가 외쳤다. 쓰러진 여자는 어느새 일어나 다른 쪽 팔을 잡고 있었다.
“내가 먼저 찾았어!”
라샤드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소리쳤다.
“자, 잠깐! 잠깐만!”
* * *
오웬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가 있는 곳은 언덕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나무들에 가려서 밤하늘은 잘 안 보이지만, 아래쪽을 살피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올라서자 라샤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를 노리고 달려온 어떤 여자도.
그녀는 정확히 라샤드를 노리고 돌진했다.
그리고 그녀가 쓰러지자 몇 걸음 밖에 있던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공작을 떨어트릴 속셈이군.’
보라 머리의 짓이 틀림없다. 오웬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래쪽을 계속 살폈다.
라샤드는 여자들에게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그냥 뿌리치거나 꺼지라고 소리쳐도 될 텐데, 마음이 약해 그것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그 야박한 비난은 라샤드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불꽃이 터지자마자, 그도 사람의 무리에 휩쓸렸다. 정신없이 떠밀렸고, 주변이 혼잡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멍청했어.’
그는 지금 홀로 떨어져 있었다. 언덕에 오른 것도, 엘렌을 찾기 위해서였다.
멍청하긴.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데. 놓치다니.
“빨리 찾아야 하는데.”
그리 중얼거리던 순간, 마침 그의 시야에 긴 금발 머리가 들어왔다. 라샤드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아래였다. 오웬은 투덜거렸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급히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불꽃이 터졌다. 펑! 펑! 그에 맞춰 금색 머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깨에 큰 충격이 느껴진 것은 언덕을 막 다 내려온 순간이었다.
“악!”
“윽!”
외마디 비명이 일더니 뒤이어 풀썩. 부딪혀 온 그림자가 쓰러졌다. 오웬은 얼굴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나도 떨어트리겠단 말이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오웬은 여자들이 몰려드는 상황에 익숙했다. 순진한 공작과 달리, 여자를 떼어 놓는 것 정도는 힘들지 않게…….
“넌 뭐야?!”
“예…… 예?”
“너 뭐 하는 새끼야!? 감히 날 때려?!”
갑자기 멱살이 잡혔다. 일어선 그림자는 여자가 아닌, 공작만큼 덩치가 큰 사내였다. 오웬은 굴하지 않았다.
“때리다니! 그냥 부딪혔잖아!”
“하, 발뺌하시겠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리고 또,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번에 몰려든 쪽은 여자가 아니라 곰 같은 덩치의 사내들이었다.
도합 6명의 사내가 쏘아보기 시작하자 오웬의 기세도 꺾였다. 이만한 수는 나도 감당하기 벅찬데.
“일단 이거 놓으시고…….”
“이 새끼가 날 때리고 내빼려고 하잖아.”
“뭐?!”
하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쳐 둔 함정인 걸 머리로 알면서도, 오웬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그림자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지금 노려보고 있는 자까지 더하면 모두 10명…….
오웬은 급히 소리쳤다.
“돈으로 해결하죠! 네?!”
* * *
같은 시각, 그들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장식 하나 없는 검은 로브와 검은 부츠.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였다.
턱마저 가려져 있었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할 만한 외양이었다. 오웬이 끌려가는 모습을 본 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소동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지고 있었다. 와중에도 불꽃은 터지고 있었다. 펑! 펑!
펑! 불꽃이 터지고,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빛나는 금발을 보았다.
남자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금발의 여인도 움직였다.
두 사람이 마탑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거의 헐떡이고 있었다. 여인은 그토록 빨랐다.
“잠깐만요, 엘렌!”
기어코 애절한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여인은 멈추는 기색도 없었다. 그녀가 마탑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녀를 쫓았다.
“엘…… 허억……!”
펑! 다시 불꽃이 터지고, 그가 거친 숨소리를 뱉었다.
여인은 이제 계단을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남자도 계단을 올랐다. 허억, 허억, 난간을 부여잡으며.
겨우 도착한 곳은 3층 발코니였다.
“엘렌!”
밤하늘을 불빛이 수놓았다.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금빛 사이로, 여인이 몸을 돌렸다. 남자는 그녀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단 하나, 금발 외에는.
“……누구시죠?”
“하아, 접니다.”
“저라고 하시면…….”
“맬빈입니다.”
“아.”
펑! 또 한 번 찬란한 불빛이 일었다. 남자는 그녀가 미소 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 맬빈.”
“엘렌, 혹시…… 키가…… 자랐나요?”
“오늘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구두를 신었어요.”
“목소리는 왜…….”
“목감기에 걸려서요. 콜록! 콜록!”
“괜찮습니까?!”
그때, 그녀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맬빈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의 떨리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에, 엘렌?”
“네, 맬빈.”
그녀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맬빈은 의아해졌다. 엘렌의 눈동자 색이…….
왜 금색이지?
“엘렌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흘러내렸다.
맬빈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여자가 그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뒤이어 그의 몸이 확 돌아갔고 바로.
쿵!
그의 얼굴이 벽에 부딪혔다.
맬빈은 이를 악물었다. 이마가 찢겼나 의심이 들 만한 충격이었다. 여인은 그만큼 거칠었고, 또한 빨랐다.
강인한 힘이 그의 몸을 압박했다. 맬빈은 여자가 그에게 더욱 가까이 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맬빈.”
뜨거운 숨결이 귓불을 스치자, 맬빈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목에는 날카로운 감촉이 닿았다.
바로 단검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보라돌이.”
화려한 밤하늘 아래, 세이나가 사악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