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97화 (97/179)
  • #97

    마탑은 1년에 한 번 탑을 개방한다.

    초대권만 있으면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든 들어올 수 있고, 초대권이 없어도 저녁 불꽃놀이는 관람할 수 있다.

    목적은 투자자 찾기.

    신인 마법사들에게는 부자 후원자의 눈에 들 기회를, 중견 마법사들에게는 명성을 뽐낼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나에게 그곳은…….

    “세이나! 저것 봐요!”

    엘렌이 신이 나서 앞으로 뛰어갔다. 세이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도 매섭게 주변을 훑었다. 보라색 없지? 없지?

    “사람이 너무 많아.”

    옆에 있던 오웬이 투덜거렸다.

    이번 마탑 개방일은 작년보다 훨씬 사람이 많았다. 발을 디딜 틈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엇? 하는 순간 흐름에 밀려가기에 십상이다.

    대체 초대권을 얼마나 뿌린 건지.

    하지만 엘렌은 사람의 무리를 잘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작은 데다가 잽싸고 날렵해서 누구와 부딪히는 일도 없었다.

    “이러다 놓치겠어요!”

    “윽, 잠깐만! 발 밟혔어!”

    “엘렌은?”

    “저쪽이요!”

    라샤드의 물음에 세이나가 먼 곳을 가리켰다. 금발의 여주인공님께서는 눈을 빛내며 커다란 막대사탕을 사고 있었다.

    그 빛깔이 보라색이라, 세이나는 또 눈에 힘을 줬다. 파는 이의 머리칼은 옅은 금발.

    “으앗! 떠내려간다!”

    “공작님! 오웬을!”

    “쯧, 정신 차려!”

    라샤드와 세이나가 동시에 오웬의 양팔을 잡아당겼다. 곧 그의 몸이 인파 속에서 퐁, 튀어나왔다. 가을임에도 그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웬이 창백한 안색으로 그들의 팔을 맞잡았다.

    “오랜만에 공포를 느꼈어…….”

    “진짜 징그러울 정도로 많군요.”

    “세이나! 세이나! 어서요!”

    세이나에게 마탑 개방일은 혼돈 그 자체였다.

    엘렌을 쫓아가기도 버거운데, 사람이 너무 많아 일행을 챙기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혼자 올 걸 그랬나 후회가 들 정도였다.

    ‘아니야. 그래도 최대한 많은 편이 좋아.’

    보라 머리가 드디어 나타났다.

    엘렌의 말을 듣자마자 세이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언제? 어느 틈에? 그렇게 자문하자, 그간 놀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아예 꽃집에서 일할 걸 그랬어.’

    저번 건이 도둑 사건이라, 다시 방문한다 해도 아주 큰 소란이 날 줄 알았다. 납치한다 해도, 여주인공이 비명쯤은 질러 줄 줄 알았고.

    이렇게 조용히 접근해서 조용히 떠날 줄이야.

    다음에 만날 장소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

    세이나는 제 옆에 있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20층에 이르는 높이, 회색 외벽에 직사각형 창문이 삭막한 감옥 같다.

    ‘왜 여기로 부른 거지?’

    정말 납치가 목적이라면 그날 데리고 가도 됐을 것이다. 넉넉하게 초대권을 쥐여 주고, ‘친구도 데리고 오세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정말 지인을 초대하듯.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심각하게 마탑을 노려보는 와중, 라샤드가 말했다. 오웬도 땀을 쓸어 내며 덧붙였다.

    “그래, 일단 지금은 엘렌이 무사한 것만 생각하자고.”

    “네. 지금은…….”

    엘렌은 아직도 사탕을 고르고 있었다. 제 것은 한 손에 들고 오렌지색과 레몬색, 사과 모양의 사탕도 하나씩 더 샀다.

    돈을 지불한 후에는 양손이 꽉 차게 되었다. 그녀가 세이나 쪽을 돌아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즐거워 보이네요.”

    라샤드에 더해 오웬까지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엘렌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로 끄덕였다.

    덕분에 놀라 묻게 되었다. 오웬도 같이 가도 괜찮나요? 엘렌은 지금처럼 웃으며 말했다.

    - 아니라고 말해 주셨잖아요. 세이나의 친구분이면 제 친구나 다름없죠!

    그리 말하는 얼굴이 너무 해맑아서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뻔했다. 오늘 아침 만났을 때도, 어색함이란 조금도 없었다.

    오웬은 ‘번쩍번쩍’이 다시 나오지 않을까 좀 경계하는 눈이긴 했지만.

    “주황색이 내 것이지? 고마워. 잘 먹을게.”

    원체 사교성이 좋은 사람인지 지금은 엘렌과 잘 지내고 있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어색한 기류가 조금도 없다.

    “공작님도 받으세요!”

    엘렌은 라샤드와도 제법 잘 어울렸다.

    몇 번 먼저 말도 걸었고, 눈을 마주쳐도 이제 목소리를 떨지 않았다. 세이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꼬아 놓은 문제를 드디어 해결한 느낌.

    ‘아마 저게 원작이었겠지.’

    두 남자와 서 있는 엘렌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오웬이 몇 마디 하자 엘렌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라샤드가 확 인상을 찌푸린 걸 보니, 또 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저 두 남자가 워낙 잘나기도 했고, 엘렌도 예쁘니 눈에 띄는 일행이었다.

    ‘두 남자와 화해를 시키니까 바로 보라돌이가 나타났어. 원작 스토리가 진행되었다는 뜻이겠지.’

    어딘가 책의 삽화로 어울릴 법한, 그림 같은 광경이다. 하지만 그녀의 흐뭇한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을 지켜보다 보니, 또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주일째.’

    디온은 오늘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례를 무릅쓰고 한 번 협회를 찾아간 적도 있다. 사이가 좋든 안 좋든, 회장은 그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거절.

    비서는 다다음 달까지 약속이 가득 들어차 있다 했다. 아쉬운 대로 비서에게라도 물으려고 했지만, 그도 바쁘다고 바로 자리를 떠 버렸다.

    사실 지금도 조금 불안하긴 했다.

    집을 비운 사이에 찾아오면 어쩌지?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실망하면 어쩌지?

    “세이나.”

    그때, 불쑥 노란 막대 사탕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이나는 애써 웃으며 라샤드가 내민 사탕을 받았다.

    “아, 고마워요.”

    사탕은 레몬 맛이 맞았다. 입술을 대자마자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래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저를 빤히 보는 라샤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입을 열었던 그때, 세이나가 앞서 먼저 말했다.

    “네, 엘렌에게 집중할게요.”

    라샤드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리 덧붙이려고도 했다.

    그러나 세이나의 시선은 이미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엘렌이 그녀에게 다가오자 세이나가 물었다.

    “친구분이랑은 어디서 만나기로 했나요?”

    “아, 오면 먼저 말 걸겠다 했는데…….”

    엘렌은 그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쳐다보는 사람은 몇 있었지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안 보이네요.”

    “아무래도 우리가 옆에 있으니까 안 오는 것 같죠?”

    세이나가 라샤드에게 속삭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 저것 봐요!”

    엘렌이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신이 난 강아지 같아, 세이나는 결국 웃음 짓게 되었다.

    이후로도 엘렌은 주도적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예쁜 소녀가 눈을 빛내며 물어보니, 마법사들도 친절히 그녀를 응대했다.

    오웬은 그녀의 옆을 지켰다. 마법사들의 말에 한마디씩 덧붙일 때마다, 엘렌이 눈을 크게 뜨며 “그게 정말이에요?!”라고 소리쳤다. 정말 반응이 좋은 소녀였다.

    라샤드랑 세이나는 계속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마탑 안에 들어선 후에도 보라색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 비슷한 색조차 없다.

    엘렌은 이제 어떤 마도구 가판대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오웬이 물었다.

    “마도구를 어디에 쓰려고요?”

    그즈음 세이나와 라샤드는 떨어져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엘렌이 그녀를 보더니, 오웬에게 작게 속삭였다.

    “세이나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하.”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뭐가 좋을까요?”

    “그럼 나도 사야지.”

    “잠깐만요! 제가 먼저 골랐어요!”

    저녁이 다 되었을 땐, 세이나는 세 사람이 가져다 안긴 선물에 양손이 묶이게 되었다.

    어느덧 일행에 합류해 같이 선물을 고르는 라샤드를 보며, 세이나는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위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니. 아주 싫진 않…….

    “이게 더 어울려요!”

    “이게 더 나아.”

    “내가 보기엔 이게 더…….”

    ‘싫진 않…….’

    “세이나는 파란색이 잘 어울려요. 그건 무늬가 너무 화려하잖아요!”

    “음, 동의해.”

    “그렇죠? 오웬은 정말 감각이 꽝이에요!”

    “뭐?!”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끼어들지 않았다면 싸움으로 번질 뻔했다.

    마탑 일꾼에게 선물 배송을 맡기고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마탑 앞은 낮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이제 행사는 마지막 단계를 앞두고 있었다.

    “어디에 가야 불꽃이 잘 보일까요?”

    “저 언덕이 제일 잘 보일 텐데,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그래도 가 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엘렌은 이번에도 씩씩하게 앞장섰다. 종일을 돌아다녔는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빠른 걸음이었다.

    오늘 내내 그러했듯 오웬이 그녀의 뒤를 먼저 따랐다. 라샤드가 중간을, 세이나는 끝에서 걸음을 옮겼다.

    딱히 역할을 나누고 집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세이나의 걸음이 느린 탓이다. 깊은 생각이 내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같이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보라색 머리처럼, 은발의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세이나는 뒤를 살피며 무심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돌연 휘청 몸이 기울었다.

    “악!”

    “괜찮아?!”

    라샤드가 그녀의 팔을 확 붙잡았다.

    그를 부여잡고 세이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왼쪽 발이 움푹 팬 곳에 빠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파헤치기라도 한 것 같다.

    “하아. 고마워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다른 게 아니라…….”

    그때였다.

    “지나갈게요!”

    갑자기 그들 사이로 누군가 들이닥쳤다. 세이나는 놀라 라샤드를 놓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1명, 2명……. 아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의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큰 상자를 들고 있었다. 마탑 일꾼들인가?

    “지나갑니다!”

    세이나는 점점 더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제 다 지나갔나? 싶던 그 순간, 느닷없이 뒤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다.

    “지나갈게요!”

    “좀 비켜요!”

    세이나의 몸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녀가 황당해서 외친 말도, 사람들 속으로 파묻혔다.

    지나갈게요! 비켜! 언덕이 명당이란 말이야! 꺅! 누가 만졌어! 이 자식이, 어깨 치우지 못해!?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세이나가 참다못해 소리치려던 그때.

    펑! 펑!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정신없이 흔들리던 몸도 멈추었다. 사람들이 멈춰 서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세이나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도 그때였다. 두 발이 드디어 땅에 닿고, 펑! 깜깜한 하늘 위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엘렌?”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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