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 여주의 옆집에 살고 있습니다-96화 (96/179)
  • #96

    “디, 디온 님이 어떻게 세이나의 집에…….”

    엘렌은 매우 당황했는지 목소리까지 떨었다. 반면 등을 보이고 선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어조도 무미건조했다.

    “세이나는 협회의 일원이니까요. 일 때문에 잠시 들렀습니다.”

    당사자가 듣기에도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이나는 다시 살짝 몸을 빼 보았다.

    엘렌. 엘렌이 확실했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네……. 그렇군요.”

    그 즈음 오웬도 움직였다. 그녀의 바로 옆. 좁은 기둥은 그들이 어깨를 붙이고 숨어 있기에 터무니없이 좁았다.

    두 사람이 서로 자리 경쟁을 시작했다. 네가 저기로 가! 오웬이 저쪽으로 가요! 여기는 내 집이야!

    조금 뒤 엘렌이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싸늘한 음성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한겨울 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죠.”

    ‘와, 정말 상처받았나 봐.’

    오웬을 벽 쪽으로 밀어내고 난 후, 세이나는 다시 디온을 보았다.

    뒷모습만이라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매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테다.

    ‘하지만 속마음은 아니겠지.’

    사람의 눈물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디온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잘 울지 않았다.

    세이나의 몸이 점점 더 그들 쪽으로 기울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이 집 안에 깔렸다.

    “아, 네…….”

    필시 엘렌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걸 어떻게 하죠?”

    “알아서 잘하겠지.”

    반면 오웬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하다. 세이나가 계속 쏘아보자 그가 돌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디온은 어린애가 아니야. 챙겨 줘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긴…… 하지.’

    “세이나는요?”

    “세이나는 저기…….”

    오웬은 바로 벽 뒤로 숨었다. 세이나도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숨느라 그만 기둥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쿵!

    아픔에 저도 모르게 몸을 숙이던 그때, 디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간…… 듯하네요. 하아…….”

    “아, 그렇군요…….”

    다행히 엘렌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세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옆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서 발길질도 해 주었다. 오웬은 발목을 얻어맞고 이를 악물었다.

    사악한 미소가 입에 걸린 찰나 디온이 그녀를 불렀다.

    “엘렌.”

    오웬과 세이나는 동시에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음성이, 몹시 심각하게 들린 탓이다. 디온은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뭔가를, 겨우 참고 있다는 듯.

    “저번 일은 미안합니다.”

    “……네?”

    “엘렌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고, 너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어요.”

    그러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세이나는 그가 어떤 표정일지 몹시 궁금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기분 나빴을 텐데, 미안합니다.”

    “기, 기분 나빴다뇨! 아니에요!”

    엘렌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오히려 감사해야죠. 저 같은걸…….”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세이나는 저를 돌아보는 디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서 돌아보면 어떡해!

    ‘위로해 줘야지!’

    저 같은 걸, 이라니. 여주인공님의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옆의 오웬도 같이 놀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온갖 수신호를 다 동원했다. 다독여 줘라. 잘 달래 줘라. 디온의 눈빛은 이런 뜻 같았다.

    어떻게?

    오웬의 손이 세이나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 그리고 토닥토닥. 세이나는 그를 거부하는 대신 격하게 끄덕였다.

    시범까지 보였건만, 그는 영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디온은 확 눈살을 찌푸리더니 돌아섰다.

    “엘렌, 엘렌은 충분히…….”

    그리고 말을 끌기 시작했다.

    세이나는 양손을 꽉 맞잡은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이어지는 침묵은 그 어느 때보다 갑갑하고 길게 느껴졌다.

    “매력 있는, 분입니다.”

    마치 목을 긁는 듯 거친 소리였지만, 의미는 제대로 통했다. 엘렌이 느리게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디온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을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돌연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멀리 있는 세이나에게 보일 만큼이나 또렷하게. 세이나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마워요. 디온 님…….”

    ‘장하다 도련님!’

    “저, 저 그냥 쿠키를 나눠 주고 싶어서 왔어요. 세이나에게 전해 주세요.”

    “네.”

    “그럼 가 볼게요!”

    엘렌은 디온이 인사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세이나는 흐뭇함에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워서 그렇구나.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사회성 바닥인 우리 도련님이 여기까지 하다니. 큰 발전이야.”

    “잘했어요, 디온! 축하 파티라도 할까요?”

    오웬도 그녀에게 공감했다. 세이나는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양 방긋 웃었다.

    기둥 밖으로 나갔을 땐 디온이 이미 소파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탁.

    바구니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다시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음색이 들렸다. 먼저 세이나의 발이 뚝, 뒤이어 오웬도 걸음을 멈췄다.

    푸른색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세이나는 험악한 표정의 디온을 보고 숨을 멈췄다.

    “이런 짓 시키지 마세요.”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성큼성큼 내딛더니, 이내…….

    쾅!

    귀가 떨어질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세이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 말도.

    * * *

    디온이 가출했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세이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지, 정정해야겠다.

    디온이 오지 않고 있다.

    벌써 4일이나 지났다. 첫날에는 바쁜가 보다 했다. 제대로 설명을 들은 바는 없지만, 그는 가끔 ‘일’이 있다 했으니.

    둘째 날에는 일이 계속 바쁜가 했다. 저번에도 이틀 정도는 안 온 적 있으니까. 어? 그런데 그거 좀 한참 전 일 아닌가?

    세 번째 날부터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 어디 아픈가? 다쳤나? 사고라도 당했나?

    당연하지만 이곳에는 실종 신고 라는 게 없었다. 라샤드는 연락이라도 해 보라고 했고, 세이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디온이 어디 살지?

    네 번째 날부터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조급한 걸음으로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녀가 오가는 것에 따라 라샤드와 오웬의 눈동자도 함께 움직였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오…….

    “모르겠어요.”

    세이나가 멈춰 섰다.

    “혹시 디온이랑 연락하는 법, 아는 사람?”

    “가장 확실한 건 회장이지.”

    오웬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회장이랑 사이가 안 좋아요.”

    “그럼 다른 가족?”

    “누구요? 셀론? 이자벨라?”

    “……형제.”

    “모두 사이가 안 좋다 했어요. 전부 회장 자리를 두고 경쟁한대요.”

    “어머님…… 은 돌아가셨군.”

    “아론 같은 부하는 없어?”

    불현듯 누가 떠오르긴 했지만 세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둠에 잠겨 있어 얼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터너. 그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 원체 흔한 이름이지 않은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매일 오니까. 연락할 방법을 둘 생각을 못 했어요.”

    “괜찮을 거야. 어디 가서 당할 녀석도 아니고. 곧 오겠지.”

    “글쎄요. 화가 잔뜩 났던데.”

    분명 그랬었다. 문제는 그 이유다. 근 4일간 세이나는 그날 자신의 행실을 열심히 되짚어 보았다. 사실…… 좀, 예의가 없긴 했다.

    자신에게 찾아온 손님을 그에게 미룬 거니까. 그리고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이런저런 일을 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화낼 만한 일인지 모르겠는데.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세이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4일간 그랬듯이 다시, 그날을 떠올렸다.

    그를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래, 화를 낼 수도 있지. 꼴 보기 싫을 수도 있지. 다시 안 찾아오고 싶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려면 애초에 ‘그 전제’부터 없애야 했다.

    디온이…….

    ‘엘렌을 좋아하지 않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세이나는 현관까지 달려갔다.

    “디온! 왜 이제야……!”

    하지만 현관 앞에 나타난 이는 은발의 청년이 아니었다. 그보다 한참 아래, 금발을 한 소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뒤이어 깜빡깜빡. 세이나는 뒤늦게 인사했다.

    “아, 엘렌.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세이나.”

    엘렌도 뒤늦게 웃었다. 그녀가 어깨 너머의 안을 살피다가 말했다.

    “디온 님을……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요즘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만난 적 있나요?”

    “아뇨…….”

    “하, 진짜 미치겠네.”

    세이나는 미간을 좁히며 문간을 짚었다.

    역시 4일은 너무 걸린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코앞에 있는 엘렌의 존재감도 흐려졌다.

    “세이나.”

    그녀가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아, 미안해요. 엘렌. 들어올래요?”

    “아뇨. 사실 뭘 물어보려고요.”

    “네?”

    “혹시, 이틀 뒤에 시간 괜찮으세요?”

    엘렌이 종이를 내밀었다. 직사각형의 손바닥보다 큰 티켓이었다. 세이나는 무심결에 글자를 읽었다.

    “마탑 초대권?”

    “네! 마법사들이 지내는 바로 그 탑이요! 단 하루 동안 개방돼요! 신기한 물건들도 많이 팔고, 특이한 마법을 선보이기도 하나 봐요! 불꽃놀이도 하고요!”

    “아, 벌써 그럴 시기가 되긴 했네요.”

    “손님이 나눠 주셨어요.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요! 표도 넉넉하게 있어요. 친구분들을 더 불러도 돼요!”

    그러고 엘렌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 공작님도…… 괜찮고…….”

    세이나의 시선은 줄곧 티켓 위로 올라와 있었다.

    마탑 초대권. 이틀 후. 마법사들의 축제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평소 같으면 ‘별, 돈이 부족해졌나.’ 라고 툴툴거렸을 테다.

    하지만 세이나는 그마저도 못 하고 있었다. 마법사. 이걸 준 손님은 틀림없이 마법사다.

    거기에 완전히 정신이 사로잡혔다. 그녀가 불안함에 휩싸여 물었다.

    “설마 그분 머리칼 색이 보라색이에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세이나는 윗입술을 말아 물었다.

    ‘X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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