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벌써 세 번째로군.
디온은 작게 중얼거린 뒤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천장의 모양이 그에게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참을 노려보다 또 짜증이 나서 한숨.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요?”
사실, 세이나는 계속 그가 누운 소파 옆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눈이 마주치고 디온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을 때 세이나도 덩달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이나?”
“네? 아, 네. 저예요.”
알레데이아가 사라진 후.
세이나는 잠자코 세 남자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복잡하고 빡빡한 규칙을 잔뜩 붙인 것 치고 요정님은 아무 보상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기가 막혀서.
오웬이 먼저 눈을 떴고, 머지않아 라샤드가 일어났다. 그들이 익숙한 설전을 늘어놓는 와중에도, 디온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걱정되었다.
‘벌써 세 번째.’
그가 쓰러진 횟수였다.
세 번 모두, 마물 때문이었다.
세이나가 알기로 마물의 마력은 인간에게 좋지 않다. 특히나 마법사들에게는 더.
그래서 그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뜨고도, 세이나의 걱정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보고, 너무 놀란 탓이다.
“어디 아파요?!”
“아닙니다.”
“의사 부를게요!”
“세이나, 좀 진정…….”
일어선 순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막 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차가운 체온에 그녀의 눈이 다시 커졌다. 반면 디온은 침착했다.
“진정해요.”
세이나는 조금 풀이 죽어 멈췄다.
세상에, 사람 손이 이렇게 차다니. 아픈 게 틀림없는데.
“그럼 다른 건? 필요한 것 있어요?”
그를 보는 시선에 간절함이 묻었다. 제발 의사를 불러 달라고 말해! 그에 응하듯, 디온의 눈에도 순간 기묘한 광채가 스쳤다.
그가 낮게 물었다.
“……뭐든?”
“네, 뭐든지.”
“그럼…….”
그가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집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요리책을 뒤적이며 식당 의자를 차지한 공작도 없고, 건들거리며 얄미운 미소를 짓는 어떤 헌터도 없다.
디온이 뒤로 푹 누우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계속 잡고 있어 주세요.”
“다음은?”
세이나는 기꺼이 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양손으로 다 감싸도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아, 이러니 병석에 있는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 같은데.
‘아들보단 동생이지.’
무릎을 베고 누웠던 소년과 그가 자꾸 겹쳐 보였다.
우는 척하더니 머리를 잡아당길 땐 정말 얄미웠었다. 그 덕분인지 원래대로 돌아간 후에도 세이나는 그를 계속 어리게 보고 있었다.
건장한 사내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계속 그리 보이는데.
“……이대로.”
“물은 안 필요해요?”
그가 고개를 가로저은 뒤 다른 쪽 손목을 제 이마 위에 올렸다. 그늘진 눈매 속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는 게 보였다. 역시 아픈 걸까?
‘이러면 물어볼 수도 없겠네.’
조금 전이 떠올랐다.
- 디온, 너는…… 세이나를 좋아하지?
디온의 답변은 거짓이었다. 세이나는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너 나 싫어하냐?
이상한 질문임은 알고 있다. 그래서 계속 안 물어보고 있기도 하고.
이런저런 수식어들이 붙으면 좀 더 예쁘게 물을 수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세이나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럼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문득 처음 그가 이곳에 온 그날이 떠올랐다. 비에 젖어서 뚝뚝 눈물을 흘리던 그는, 정말 안쓰러워 보였다.
뭐라도 해 줘야겠다 싶어서 이야기도 들어주고, 수건도 주고, 따뜻한 차도 주고. 이후에는 그가 몇 번 도와줬고. 식사도 얻어먹고, 열쇠도 받아서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
‘애는 나였군.’
참 이것저것 많이도 받아먹었다 싶었다.
거기다 마정석 값도 정산해 주지 않았으니, 돈까지 다 홀랑 먹어 버린 셈이다.
혹시 그건가? 마정석 정산?
“제가…….”
그때, 디온이 입을 열었다.
“제 실수예요.”
“응? 뭐가요?”
“제가 답변을 잘못해서 더 어려워졌잖아요.”
그늘 아래 눈이 한 번,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세이나는 그의 창백한 뺨을 바라보다 작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마지막 질문이 너무 쉬웠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다 일어났어요. 지금은 다른 마물이 나타났는지 주변을 확인하러 갔고.”
“…….”
“알레데이아도 돌아갔고. 디온도 일어났고.”
“…….”
“전부 잘 해결됐잖아요. 마음에 두지 말아요.”
“세이나는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돌연 저를 쫓아오는 시선에 세이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디온은 틈을 주지 않고 물어 왔다.
“마음에 두고, 있어요?”
“아, 그게…….”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역시 물어보기가 어렵다. 당장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니? 아, 이것도 이상하다.
그래서, 이렇게 답하게 되었다.
“괜찮아요.”
그러자 디온은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사색이 되었다. 세이나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 다고……?”
“공작님은 영지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거짓으로 나왔어요, 정말 이상하죠? 엉터리 정령이 틀림없어요.”
난 괜찮으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
그런 의도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미간이 바로 구겨졌다. 가늘게 뜬 눈이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방금 대답이 또 그가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될 것이라고. 세이나는 직감했다.
그래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디온의 손은 병자의 것이라기엔 너무 단단했다.
“아직.”
세이나는 당황했다.
“놓아도 된다 안 했는데.”
어린 소년이 사라지고, 낯선 사내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짜증을 내고 있었다. 잡지 않은 손을 들어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기고, 긴 한숨까지 뱉었다.
다음 순간에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이나는 무릎걸음으로 물러나 그가 다리를 내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와중에도 손은 계속 잡고 있었다. 안에 땀이 솟아나는 게 느껴졌지만 디온은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세이나, 나는…….”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어? 일어났네?”
들어온 이는 오웬과 라샤드였다. 돌연 느껴진 기척에 세이나는 놀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 어떻게 됐어요?”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없긴 했지만, 별일은 있었지. 그렇죠, 각하?”
“사고라도 난 거예요?”
그녀의 발이 자연스럽게 현관 쪽으로 향했다.
라샤드가 계속 눈치를 줬지만 오웬은 전혀 그 일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에게 상체를 숙였다.
“공작님이 뭘 했냐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이나가 외쳤다. “정말요?!” 오웬은 끄덕였고, 라샤드는 민망한지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곧이어 웃음소리가 나왔다.
디온은 세이나를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가라앉으며 서늘한 빛을 품었다.
“나는…….”
나지막한 소리는 결국 닿지 못했다. 디온은 텅 빈 손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12. 모든 답은 시작에 있다
최근에 알았는데, 오웬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다.
“뭐 해?”
“고민하고 있어요.”
“아.”
건들거리면서 다가오는 꼴이 꼭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불량배 같다.
옆에 앉아 그녀처럼 턱을 괴고, 시선을 거실로 던지는 것까지 좀 얄밉게 보였다.
“어색해?”
“당연하죠!”
세이나는 그러고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멀리, 하지만 아주 멀지는 않은 거실 소파에 디온이 있었다. 예의 그 ‘범인’이 적혔던 바로 그 신간을 읽는 중이었다.
‘놓지 말라고 했는데.’
정신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손을 놓은 이후였다.
그 이후로도 세이나는 그에게 잘해 주려고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점점 분위기는 어색해지기만 했다.
그 결과, 세이나는 요 며칠 디온과 거의 말을 안 하고 있었다. 어쩐지 말 붙이기가 점점 어려웠다.
“생각해 보니까 이게 다 당신 때문이지…….”
“하하, 진정해.”
사납게 노려보자 오웬이 웃으며 몸을 뒤로 빼내었다.
또 딱밤을 맞을까 봐 긴장하는 눈치다. 그럴 마음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세이나는 손가락을 튕기지 않고 다시 턱을 괴었다.
지금 탓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먹을 걸 사 주면 되려나?”
“쟤가 애야?”
“윽.”
“확실히 너는 저 도련님을 어린애 취급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
“……저보다는 어리잖아요.”
“그래도 성인이지. 음, 스물둘이었던가.”
“어린 것 맞네.”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오웬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그녀를 따라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서 싫어하는 걸지도?”
“네? 무슨?”
그때였다.
“저는 일이 있어서 오늘 일찍 가겠습니다.”
돌연 그가 일어나 식당 쪽을 보았다. 어느새 책도 내려놓았고, 벗어 두었던 외투도 걸쳤다. 세이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 그래요. 디온.”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하지?
엘렌은 내게 맡겨라!
……좀 이상하지 않아?
고민하는 사이 디온은 벌써 현관문에 이르러 있었다. 그가 손잡이를 잡았을 때도 세이나는 딱히 할 말을 못 찾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내일은 꼭 대화해 보자!’
그리 막 다짐한 순간이었다.
세이나와 오웬은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문은 제대로 열렸다.
오후의 햇살과 함께 쌀쌀해진 가을바람이 문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디온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다.
먼저 일어선 사람은 세이나였다.
식당을 나와 소파를 지나치기 직전. 그녀의 걸음도 디온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제야 그의 어깨 너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직후엔 오웬도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뭔데 그래?” 그가 앞으로 나가려 하자 세이나는 급히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모든 사람이 멈춰 버렸다. 그리고 그때, 가을바람에 날려 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세이나는 당황 속에서 겨우 입을 떼었다.
“파, 팝콘 가져와요. 오웬.”
뒤늦게 오웬이 “팝콘?”이라고 물었지만 세이나는 그에 답할 정신도 없었다.
엘렌이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디온 님.”